만원에 4캔 맥주를 그렇게 진공청소기처럼 먹을 거면, 그냥 위스키를 사는 게 낫지 않을까?
친구의 말은 식비와의 전쟁을 하던 자취생활에 큰 전환점이 되었다. 메마른 사막에 장맛비 내리듯이 만족을 모르던 맥주 대신 하루에 한 잔 마시는 위스키가 건강적으로나, 금액적으로나 완벽했다. 물론, 그때는 하루에 한 잔만 마실 줄 알았지.
어쨌거나 앞으로 다가오는 밤은 위스키를 마시기로 했다. 하지만 슬기로운 위스키 생활은 결심하는 순간부터 숙제들이 찾아온다. 일단 뭘 마셔야 하지? 얼마까지 써야 적당한 위스키를 산 거지? 잘못 샀다가 돈은 돈대로 입맛은 입맛대로 날리는 것은 아닌지. 그때 위스키 좀 마신다는 멋진 동료가 떠올랐다. 그는 말했다.
어, 너 그냥 뉴비면 발렌타인부터 마셔.
야밤의 위스키 뉴비클럽. 오늘 주제는 왜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는 친구들은 입문자에게 발렌타인을 추천하는지에 대한 주제로 시작한다.
스카치위스키에도 족보가 있다: 위스키의 예송논쟁
위스키는 족보의 술이다. 사람이 국적이 있고, 혈액형이 있고, 성씨가 있듯 위스키도 국적이 있고, 각각 부르는 명칭들이 존재한다. 오랜 시간 연구를 하고 경쟁을 하며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구분이지만, 그걸 모르고 마신다고 하여 위스키 뉴비클럽에서 출동해 잔을 압수한다거나, 위스키 없는 섬에 유배를 보내는 것도 아니다.
다만 마시는 입장에서 위스키의 종류를 구분할 줄 안다면. 내 취향에 맞춰서 다음 위스키를 찾을 때, 혹은 색다른 느낌의 위스키를 찾을 때 도움이 된다. 아까 위스키는 족보의 술이라고 했었던가? 그렇다면 우리는 족보를 사고 모아 도감을 완성하는 ‘포켓몬 마스터’라고 볼 수 있다.
자 이제 위스키의 시작, 위스키의 태초마을에 갈 필요가 있다. 아마 당신이 고를 위스키는 스코틀랜드에서 만들어진 일명 ‘스카치위스키’일 것이다. 그게 제일 많으니까.
그리고 여기서 어떤 재료를 썼는가에 따라서 보리만 쓰면 ‘몰트위스키’, 그 외의 곡물을 쓰면 ‘그레인위스키’라고 불린다. 이걸 섞으면 ‘블렌디드 위스키’가 되는 것이고, 한 증류소의 몰트위스키만 가지고 만들면 ‘싱글몰트 위스키’가 되는 것이다. 잡곡밥과 흰쌀밥의 차이라고 할까(아니다).
선물이나 입문용 위스키에 발렌타인, 조니워커를 부르는 이유
그렇다. 친구 녀석은 내게 잡곡밥 아니 블렌디드 위스키로 대표되는 ‘발렌타인(Ballantine’s)’을 추천했다. 거기에는 세 가지 정도의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있다.
- 제일 유명하니까
- 파는 곳이 제일 많으니까
- 맛이 호불호가 안 갈리니까
그렇다. 무심하게 말했지만 발렌타인을 비롯한 유명 블렌디드 위스키를 입문용, 선물용으로 고르는 데는 ‘실패할 확률이 가장 적은’ 위스키를 추천한 것이다. 특히 발렌타인의 경우는 1989년에 한국에 일찍 들어온 위스키이기도 했고, 부드러운 맛과 목 넘김 때문에 명절 선물의 대가가 되었다. 수많은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검증, 아니 사랑받은 위스키인 것이다.
잡곡밥이라고 비유한 것은 미안하다. 발렌타인을 비롯한 블렌디드 위스키는 싱글몰트에 비해 뒤처지는 것도 아니다. 블렌디드 위스키란 소맥처럼 섞는 것이 아니라 훈련되고, 선택된 사람이 엄밀하게 위스키 원액들을 배합하여 만든 최적의 맛을 내는 예술이다. 발렌타인도 200년의 역사 동안 이걸 할 수 있는 사람은 창업자인 ‘조지 발렌타인’을 포함하여 5명밖에 없었다.
그런 위대한 제품을 한국에서는 웬만한 상점에서 구할 수 있다. 동네 슈퍼에서도 파는 발렌타인 17년도 만들어질 당시는 세계에서 가장 독특하고, 맛있고, 비싼 역사적인 위스키였다. 그런 귀한 발렌타인을 폭탄주로 만들어 소진하는데 써버리니, 발렌타인 마스터블랜더가 이걸 보면 뒷목을…
개인적으로는 발렌타인 17년이나 21년 정도면 블렌디드 위스키는 이렇구나 충분히 느낄 수 있다. 30년도 있다고? 맞아 30년은 백만원이 넘는 거 같더라… 성공하면 마셔보고 알려주겠다.
과연 싱글몰트 위스키는 블렌디드보다 위대한가?
그런데 왜 친구는 싱글몰트 위스키를 마시는 것일까? 그것은 블렌디드 위스키도 맛있지만, 스스로 위스키에 대한 세부적인 취향을 찾는 것이다. 마블이나, 헐리우드 대중영화를 보다가 갑자기 배우나 감독을 따라서 인디영화, 예술영화를 찾아보기 시작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일반적으로 몰트를 사용한 위스키는 개성이 강하다. 블렌디드 위스키는 여기에 부드러운 그레인위스키를 섞어 균형적인 맛을 낸다. 하지만 싱글몰트 위스키는 한 곳의 증류소에서 만든 개성이 강한 몰트만 사용한다. 그래서 브랜드마다 제품마다 호불호가 갈릴 수이다. 하지만 호라면 인생 위스키를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싱글몰트 위스키란 개념이 유행한 역사는 얼마 되지 않는다. 애초에 대부분의 스카치위스키는 블렌디드 위스키였다. 몰트위스키를 만드는 증류소들은 이런 거대한 위스키 브랜드에 위스키 원액을 납품하는 하청 브랜드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들이 반격을 시작했다.
상대적으로 작은 증류소가 거대하고 균형 잡힌 ‘블랜디드 위스키’를 무너뜨릴 수는 없었다. 대신 그들은 새로운 개념으로 싱글몰트 위스키를 알린다. 대표적으로 더 글렌리벳(The Glenlivet)은 자기들의 위스키를 ‘언블렌디드(안 섞은) 올 몰트 위스키’라고 했고, 글렌피딕(Glenfiddich)은 ‘스트레이트 몰트 위스키’라고 말했다.
섞지 않았다니! 맥주나 소주에서도 듣던 순수 마케팅이 위스키에도 있다. 물론 싱글몰트 위스키가 확연히 구분되는 매력이 있었기 때문에 이런 용어가 통하기도 한 게 아닐까? 물론 나는 다 맛있었다만.
세상에 마셔야 할 위스키는 많다, 물론 지금 마시는 게 제일 맛있다
모르고 마셔도 당연히 맛있지만 조금씩 알아가면서 마시면 더 재미있는 술이 위스키인 것 같다. 우리가 처음 마시는 위스키가 블렌디드인지, 싱글몰트인지 아는 것만으로도 꽤나 즐겁게 위스키를 마실 수 있지 않을까? 이걸 오크통이 어떻고, 숙성 연도가 어떻고 이런 이야기는 다음 야밤의 위스키 뉴비클럽에서 진행하자고.
추신 : 당신이 좋아하는 위스키는 블렌디드였나요? 싱글몰트였나요?
원문: 마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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