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독서
봄이다. 이 말은 안 그래도 팔리지 않는 책이 더 안 나간다는 출판 종사자들의 푸념도 있지만, 그런 슬픈 현실을 차치하고 보더라도 봄이 책 읽기 참 좋은 계절이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밤이면 창으로 들어오는 선선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져 책을 열 장 남짓 뒤적이기만 해도 내가 낭만 독자가 된 것만 같다. 잔잔하고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벌레 소리가 한여름 매미소리와 달리 독서를 방해하지 않는 백색소음이 되어 귓가를 스쳐가는 것도 좋다.
아니, 좋았다. 나는 분명 학창 시절에 비하면 독서의 기쁨을 잃어버린 느슨한 독자가 되었다. 『해리포터』시리즈를 반복해 읽으며 마법 주문이 주는 설렘을 느끼던 초등학생 시절도 지났다. 새벽에 스탠드만 켜놓고 『샤이닝』을 읽을 때의 짜릿함도, 책 읽는 모습이 간지 날 것 같아서 『상실의 시대』를 들고 다녔던 것도 고등학교 때 이야기다.
그래도 종이책은 여전히 낭만 그 자체여서 아직도 책을 못 놓는다. 책을 읽다가 새벽에 잠들면 후회하지 않는데 스마트폰만 만지작거리다 새벽을 맞이하면 그렇게 스스로가 한심할 수가 없다. 그런데 그토록 불성실 독자인 내가 보기에도 요즘 아이들은 참 책을 안 읽는다. 아, 내가 벌써 꼰대가 되었나.
90년대 생은 부모님으로부터 TV랑 컴퓨터 때문에 책을 안 읽는다는 잔소리를 들었는데, 밀레니엄 세대 아이들은 스마트폰 때문에 같은 잔소리를 듣는다고 한다. 그럼 우리 이전의 어른들은 무엇 때문에 책을 안 읽는다고 잔소리를 들었을까. 아니, 듣지 않았을 수도 있겠다. 그들에게 독서는 억압의 시대에서 잠시 벗어나기 위한 휴식처이자 유토피아였을지 모른다.
‘책따’라는 말이 있을 정도이니 요즘 아이들에게야 책이 근사한 미디어는 아닐지 몰라도, 어른들의 향수에는 책이 빠지지 않는다. 왜 옛날 영화나 드라마에 보면 그런 장면 하나쯤 있지 않나. 한쪽 팔에 책을 끼고 다니는 여학생에게 시선을 빼앗기거나 창틀에 앉아서 철학책을 읽는 남자 선배에게 설레는 장면들. 월간 문예지 『문학사상』을 돌려 읽으며 해외 소설과 사상으로 영혼의 충만함을 느꼈을 시대. 신문에 연재되는 『토지』나 『별들의 고향』을 읽는 것이 트렌드를 따라가는 것이었을 시대.
그렇게 그들에게 책은 청춘의 한줄기에 늘 함께하는 친구이자, 사유의 뒷받침이었을 것이다. 책과 사상이라는 안식처는 그들에게 사회 내부의 모순과 억압을 통찰하는 힘을 기르게 했고, 이는 민주주의를 억압하는 세력에 대항하고자 하는 용기에 불씨를 붙이는 데 일조했음이 분명하다. 야만의 시대에 낭만을 잃지 않도록 그들을 버티게 해 준 힘, 그 자체가 책이었을 것이다.
덧붙여 책을 많이 읽지 않은 사람이더라도 부모가 되어 자녀에게 “책 많이 읽어라!” 잔소리를 하는 이유도 책을 읽은 사람들이 더 똑똑하고 멋져 보일뿐 아니라, 독서를 통한 지적 충만이 성공의 자양분이 된다는 맹목적 믿음마저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이유들로 우리에게 책을 읽으라는 기성세대의 잔소리는 잔소리가 아니라 진심 어린 걱정과 조언일 수 있다. 문제는 어른들이 지금의 우리 아이들에게서 독서를 빼앗아간 주범을 디지털 매체로 보는 것이다.
독서도둑은 과연 누구일까?
이번 서평의 주인공 『다시, 책으로』의 저자 매리언 울프는 뉴미디어의 범람이 독서량 저하에 영향을 주었음은 부정하지 않지만, 독서도둑이라 부를 만큼 극단적으로 몰아가지는 않는다. 오히려 책과 뉴미디어의 공존을 이야기하기 때문에, ‘독서도둑’을 잡는 것은 한국 교육을 받고 자란 우리나라 독자와 어른(부모)들이 추가적으로 고민할 몫이다.
나는 독서도둑으로 한국 교육을 지목한다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는 것인가, 독서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가져본 적 없는 것인가. 유년기에는 가정에서 스마트폰 공갈젖꼭지를 물려 아이들을 키우고, 학교에서는 독서 교과목으로 아이들에게 독서를 ‘가르치고’ 있다. 논술조차 공식대로 습득하라고 하고 있지 않나. 문학 작품 한 권을 읽는 것보다 그 작품에 담긴 저자의 의도와 작품의 의의만을 배우라 하지 않는가. 지름길은 결코 왕도가 될 수 없는데, 독서마저도 속도에 맞춰 ‘배우라’하는 한국 교육이 결과적으로 아이들로부터 독서를 앗아가는 것이다.
요즘 아이들은 분명 똑똑하다. 알고 싶은 것, 읽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만큼의 시간과 노력을 투자해야 했던 과거의 세대들과 달리 모든 정보를 10분 이내에 찾을 수 있는 검색 능력을 갖추고 있고, 인터넷은 무수한 정보를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들이 똑똑해진다고 마냥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니다. 지금 우리 아이들이 섭취하고 있는 텍스트가 단지 지식의 축적에 그칠지, 지혜로의 확장까지 이어질지 살펴보고 고민해야 한다.
한국 교육은 독서를 교육의 범주에 넣어버리는 오류를 범했다. 이는 아이들에게서 독서 그 자체를 빼앗은 것뿐 아니라, 기성세대가 누려온 독서의 낭만과 기쁨을 맛 볼 기회마저 빼앗아버린 것이다. 아이들이 교과서에서 독서를 배우고 있으니, 기성세대는 ‘요즘 아이들은 책을 읽지 않아’라며 혀를 찬다. 아이들은 진짜 독서는 강탈당한 채 가짜 독서, 겉핥기 독서만 하고 있는 것이다. 한국식 교육이 만들어 낸 내부의 모순을 개혁하지 않는다면 결코 아이들은 독서의 낭만을 맛볼 수 없을 것이다.
그러니까 다시, 책으로
책을 왜 읽어야 해? 구글에서 더 빨리 정확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데?
아이들이 어른들에게 이렇게 묻는다면 무어라 말해야 할까. 구구절절 설명할 수야 있겠지만 나는 그보다 앞서 “아 이거 참 좋은데, 설명할 방법이 없네!”라는 광고가 떠오른다.
비용·시간 등의 경제적 측면에서 견주자면 책은 뉴미디어를 당해낼 수가 없다. 『다시, 책으로』1권의 무게가 579g인데, 집에 있는 책장을 통으로 옮겨도 넉넉한 전자책 단말기 1대의 무게가 고작 180g(크레마 사운드 업 기준)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책, 특히 종이책이 중요하다 말한다. 이렇듯 표면적으로는 전자책과 뉴미디어가 더 효율적이기에, 지금의 아이들에게 책을 읽어라 말하기에 앞서 왜 읽어야 하는지 알려줄 필요가 있다. 그리고 우리 스스로도 그 이유를 알아야 한다. 매리언 울프는 『다시, 책으로』를 통해 “왜 책으로?”라는 질문에 친절히 답을 알려준다. 게다가 반박하지 못할 정도로 과학적으로.
‘읽기’를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선천적으로 가지고 있는 능력이 아니라, ‘비자연적인 문화적 발명’이라 정의하는 것은 우리가 당연하게 여겼던 ‘읽기’에 대해 돌아보는 계기를 제공한다. 문학만 읽다가 비문학을 읽으려면 어렵다. A라는 저자의 책만 읽다 다른 저자의 책을 읽으려면 낯설다. 우리가 이따금씩 느꼈던 ‘한국어인데 뭔 말인지 하나도 모르겠어.’라고 읊조리는 의문을 첫 장에서 간단히 해결해준다. 저자는 문해력이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교육과 습관을 통해 터득해나가야 하는 것임을 짚어나간 후, 그래서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에 집중한다.
깊이 읽기, 천천히 읽기의 중요성을 과학적 측면에서 친절하게 설명해줌으로써 독자를 납득시키는 이 책은 정보화 시대에 우리가 ‘어떤 독자’의 자세를 취해야 하는지 방향성까지 제시한다. 트위터의 140자가 우리의 긴 글 읽기/쓰기를 저해한다고 단순히 진단하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디지털 시대를 살아가는 인류가 ‘양손잡이 뇌’의 힘을 기름으로써 과거와 현재, 미래의 장점을 모두 포섭하여 진보해가기 위한 구체적 방향성을 말이다.
유튜브, 트위터,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브런치, 블로그 등 온라인 플랫폼이 많아질수록 우리가 접하는 정보는 더 많아진다. 정보의 홍수라는 말은 인터넷 초창기부터 있었지만 지금의 시대에 오히려 적합한 말인 듯하다. 저자는 이런 시대에 그럼에도 우리가 책을 놓지 말아야 할 이유를 조목조목 전달한다.
저자에게, 또한 우리에게, 책은 단순한 정보매체가 아니다. 1차적으로는 내면의 지식을 확장해가는 출발점이고, 인간관계에 있어서는 타인의 생각과 느낌을 이해하도록 도와주는 거울이며, 사회적으로는 정치적 양극화와 가짜 뉴스의 범람에서 생존할 수 있는 도구이다.
다만 이 점에서는 아쉬운 부분도 있다. 저자는 책을 읽음으로써의 개인과 사회의 성장이 가능하다고 말하지만, 한 편으로는 책에게 무한의 권력을 부여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백면서생이란 말도 있지 않은가. 책은 음식과 같아서 어떻게 읽느냐에 따라 득이 될 수도 독이 될 수도 있다.
그럼에도 이 책이 매력적인 이유는 저자의 논리가 체계적이고 납득 가능하며 실용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저자가 거듭 강조하는 깊이 읽기, 양손잡이 뇌의 중요성 및 육아·교육법이 더욱 타당하고 진정성 있게 느껴질 수 있었던 저변에는 저자의 ‘책에 대한 무한사랑’이 있었기 때문이다.
총 9개의 장으로 이뤄진 이 책에서 저자는 틈틈이 주제에 맞춰 본인이 읽어왔던 다양한 장르의 책들을 언급한다. 그가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읽어온 수많은 책들이 여전히 저자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이 느껴졌다. 사물·사회를 보는 시선, 사람들과의 관계, 인생에서의 방향, 이 책을 쓰던 그 순간까지. 저자의 모든 순간순간에 그가 읽었던 책의 문장들이 역동적으로 살아 움직이며 저자의 이성과 감성을 자극해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나는 이 책을 단순한 ‘독서법’으로 받아들이지 않을 수 있었다.
아이들에게 다시, 독서를
현재 이 책은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인문학 주간베스트 64위, 알라딘에서는 인문학 주간 28위와 동시에 6주째 종합 top100 안에 들고 있다.(2019.9.17.기준) 엄청난 베스트셀러는 아니지만 ‘순간접속의 시대’에 책으로 돌아오라는 메시지가 독자들에게 다가가고 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제법 많은 사람들이 이 책을 읽고 있으며, 아이들에게 어떻게 독서를 알려주면 좋을지 고민하는 부모들에게는 새로운 지침서가 될 수도 있다.
다만 학부모는 이 책을 읽은 다음 앞서 언급한 것처럼 독서를 교육하려는 실수를 범하지 않아야 한다. 독자로 하여금 다시 책으로 돌아오길 바라는 저자의 진정성을 읽어내지 못한 채, 이 책을 단순한 독서교육서로 판단하는 것은 읽지 않느니만 못하다.
지난 6월 예스24에서 발표한 2019년 상반기 종합 베스트셀러 1위는 『공부머리 독서법』이었다. 저자의 독서논술 노하우가 집약된 책으로, 수능에서 언어 영역이 점점 어렵게 출제됨에 따라 학부모와 학생들의 학습 열기가 독서 판매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결국 공부, 점수 때문에 책을 고른 것이다. 안타까운 현상이다.
아이들에게 진정한 독서의 참맛을 알려주려면 독서를 교육의 영역에서 한 발 떨어뜨려 놓아야 한다. 아이들 스스로 책 속에 빠져 들어가는 능동성을 기를 수 있도록 조언자의 역할을 하며 지켜볼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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