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영길 대표가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저희는 한때 민주주의를 위해 싸우고 감옥에 가는 희생을 겪었다… 검찰 출신 국민의힘 의원들은 우리나라 민주주의와 조국을 위해 어떤 희생을 했느냐”
80년대 학생 운동의 얼굴들이 정계에 진출한 것은 90년대 말 2000년대 초반에 본격화되지만, 그 시발은 1992년 총선부터였을 겁니다. 그때 나이 서른도 안 된 스물 여덟 살 김민석이 영등포에서 전직 장관 나웅배와 맞붙어 접전을 벌였으니까요.
제가 사회에 발을 내디딜 무렵, 이미 일군의 왕년의 ‘스타’들은 나름 화려한 이력을 쌓기 시작하고 있었고 그들 귀에 닿지는 않을 기원이겠으나 이렇게 빌어 보았던 기억이 납니다.
당신들이 무엇이 되든 당신들을 지키기 위해서도 싸웠던 사람들, 당신들이 구호 외치는 것을 잘 보이게 하기 위해 목말을 태워주고 당신들의 투쟁 공간을 열기 위해 각목을 휘두르고 경찰과 싸운 사람들, 그래서 나중에 정치적 자산이 될 정치범 경력도 아니고 경관 폭행 같은 ‘잡범’으로 전과를 쌓은 사람들 잊지 말기를. 아울러 그 와중에서 다치고 죽어간 사람들, 망가진 사람들을 제발 잊지 말기를.
이른바 80년대는 몇몇 영웅들의 시대가 아니었습니다. 지금은 이름도 빛도 없이 세상 한 귀퉁이에서 애면글면 살아가는, 하지만 그때는 참을 수 없어서 소리 지르고 손뼉 치고 경찰에 대들었던 수많은 사람들이 돌멩이가 되어 쌓아 올린 역사였습니다. 그리고 그 돌들 사이에는 피어나지도 못하고 바스러진 사람들의 인생이 스며들어 있습니다.
송영길 대표를 비롯한 한 자리씩 차지하고 한세상 누렸던 분들은 그 인고의 돌담 위에 서 계신 겁니다. 그분들 역시 그 짧았던 젊음을 독재와의 투쟁에 소진했음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이걸 ‘희생’이라고 여길 수도 있겠지만 그 단어 선택은 부적절하다고 생각합니다. 적어도 그분들이 ‘희생’을 이야기하기에는 그분들의 발밑에 쌓인 돌들의 무게가 너무 무겁습니다.
그 돌담은 더 나은 세상을, 보다 많은 사람이 가 보게 하려는 마음들이 쌓아 올린 디딤돌이고, 더 멀리 보게 하려는 전망대이지 송영길 대표 이하 여러분들의 ‘희생’이 모양새 나도록 쌓아 올린 성벽이 아닙니다. 그 위에서 깃발 휘두르라고 그 돌들이 한층 한층 올라간 게 아닙니다.
송영길 대표 이하 여러분들의 친구들, 먼저 간 사람들, 지금도 고통에 신음하고 있는 사람들, 그래도 세상은 나아질 것이라며 수구 세력보다는 이쪽을 택해야지 고개 주억거리는 사람들을 생각한다면 여러분은 ‘희생’을 입에 담으면 안 되지 않겠습니까.
송영길 대표님 이하 여러분은 오히려 이제부터 희생하셔야 합니다. 과거의 희생은 이미 충분히 보상받으셨으니 이제부터는 다시 보답하셔야 합니다. 전두환과 싸우던 열정 이상으로 부지런하고 성실하게, 그리고 무엇보다 지혜롭고 단호하게 새로운 미래를 제시하여야 한다는 뜻입니다.
이미 ‘똥팔육’은 젊은이들의 비아냥과 웃음거리로 전락해 있습니다. 이 똥팔육은 여러분들을 가리키는 말이지만 동시에 80년대의 그 많은 진짜 희생과 아픔, 슬픔까지도 도매 단위로 넘어가고 있습니다.
이른바 산업화 세력, 6.25를 겪었던 세대의 절절한 회고가 80년대의 젊음에 외면당했던 것은 바로 그를 간판으로 내건 세력의 정치적 타락 때문이었습니다. “빨갱이하고 싸워서 민주주의 지켰다더니 더 독재하고 있어.” 바로 여러분이, 그리고 우리가 한 말 아니었겠습니까. 지금 젊은이들은 “민주화했다더니 자기들도 다 해 먹었더라.”고 비웃고 있습니다. 그 일그러진 웃음 앞에서 ‘희생’ 이라는 말이 과연 적절하겠습니까.
때아닌 희생 타령 앞에서 제 얼굴이 다 벌게집니다. 얼마나 많은 사람이 터무니없이 빨리, 아프게 밤하늘의 별이 되어 박혀 있는데… 송영길 대표에게 그중 한 사람을 소개해 드리고 싶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덤터기로 욕보이는 말씀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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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미지 출처: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