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전
대학 입학한 첫 해 6월은 뜬금 없는 통일 논의로 시끄러웠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 부르며 홍제동에 드러누운 사람들을 훑는 비디오를 보면서 한켠으로는 가슴이 뜨거워지다가도, 한켠으로는 ‘공동올림픽’을 주장하는 사람들에게 흰눈을 치켜뜨는 일상을 보내던 중 선배가 또 하나의 비디오를 보여 주었다. 그건 87년 6월항쟁 비디오였다. 10.28 건대와 박종철 학생의 이야기가 지나간 후 등장한 것은 학교 정문 앞에 붙여진 ‘결전 1일전’이라는 알림판이었다.
박종철 학생의 아버지 박정기씨가 언 강 위에서 유골을 뿌리며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데이”라고 피를 토한 다음 날 고려대 정문 앞에는 바로 그 말이 담긴 플래카드를 들고 고려대생 수백 명이 몰려 나왔다. 흑백 사진으로 보면 검은 바탕의 흰 글씨. 아부지는 할 말이 없을지 모르나 우리는 할 말이 너무도 많다는 듯 어깨동무하고 뭔가를 노래하는 청년들. 그 청년들이 비디오 속에 있었다.
더 이상은 이 정권과 하늘 아래 살 수 없다는 이들의 각오가 온 캠퍼스에 퍼져 있었다. 그 모든 기운이 ‘결전’이라는 단어에 몰려 있었다.
“검은 리본을 달지 말라” 전두환 정권의 강경 대응
다음날 6월 10일은 야당과 재야 운동 단체가 총집결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 개최하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조작, 은폐 규탄 및 호헌철폐 국민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행사가 열리는 성공회 서울주교좌성당에는 경찰의 원천봉쇄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인사들이 잠입해 있었던 상황이라 경찰이 성당에 군홧발을 들이밀지 않는 한 원천봉쇄 속에서도 그 깃발은 가냘프게 올릴 예정이었다. 이에 맞선 독재정권은 참으로 찌질했다. 악당도 포스가 있는 법인데 6월의 ‘결전’을 맞는 전두환 정권이 자행한 짓거리는 해외토픽에 실릴 만했다.
6만 경찰을 총동원한 것은 물론, 동조 경음기 시위를 우려하여 택시와 버스의 클랙슨을 빼 버리는 개그콘서트를 연출했고 가슴에 검은 리본을 다는 사람은 ‘불법부착물’ 혐의로 잡아가겠다고 으름장을 놨다. 교회와 사찰의 종을 치지 말아달라는 ‘협조 요청’은 코미디를 넘어 비극에 가깝다.
검사들을 일선경찰서에 배치시키는 건 기본으로 하고 심지어 시위 현장에 나가서 진압을 독려할 것을 지시했으며 ‘갑호비상’을 전국으로 깔았다. 도심의 각급 학교에는 단축 수업이 실시됐고 고층 빌딩들에는 “학생들의 점거와 투신”을 예비한 대책 수립을 독촉했다.
중앙일보 사진부장의 결단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6월 9일 전국적으로 각 대학에서 ‘출정식’이 열렸다. 나는 청소 도구를 사러 나왔다가 동의대 올라가는 언덕길에서 한 동의대학생이 목이 쉬어라 ‘아지’를 하고 있는 것을 들었다. 무슨 사연인지 핸드마이크를 들고 혼자서 외치고 있던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 마디는 명확하다.
이건 전두환이 죽느냐 우리 모두가 죽느냐의 싸움입니다.
이날 서울 시내 거의 모든 대학에서도 6.10 대회 참가를 결의하고 기말고사를 거부하는 학생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연세대학교에서도 그랬다. “국민대회 출정을 위한 연세인 결의대회.” 2천여 명의 학생들이 몰려들었고 학내 집회가 끝난 후 교문으로 진출했다. 그들 앞에 선 플래카드의 내용은 이랬다.
4천만이 단결했다. 군부독재 각오하라.
당연히 최루탄이 터졌고 학생들은 학교 안으로 후퇴했다. 그런데 후퇴하는 학생들 사이에서 한 학생이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다. 경영학과 2학년 이한열이었다.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이한열을 도서관학과 학생 이종창이 부축하면서 처연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순간. 그 순간을 포착한 것이 로이터 통신 정태원 기자였다.
경찰이 삼면에서 최루탄을 쏘자 학생들이 학교 안으로 도망쳤고 나도 학생들을 따라가면서 촬영을 했다. 뿌연 연기 사이로 한 학생이 쓰러지는 것을 보았고 다른 학생이 그를 일으키고 있는 걸 찍었어. 부축하던 학생이 힘이 부쳤는지 다른 학생들과 함께 데려가는 모습까지 찍고 (회사로) 들어왔지.
회사에는 이미 연세대생이 최루탄을 맞아 병원에 실려갔다는 소식이 전해져 있었고 확인 결과 ‘뇌사’ 상태였다. 로이터는 6월 9일 오후 6시 30분 연세대생 시위 도중 사망 소식을 사진과 함께 세계에 전달하게 된다.
이 사진이 국내 신문에 처음 실린 것은 중앙일보였다. 이창성 사진부장은 시원찮게 나온 중앙일보 기자들의 사진을 두고 고민하다가 로이터 통신에 사진 협조를 의뢰했고 표준렌즈로 찍은 작은 사진 하나를 받는다. 바로 이종창이 이한열을 부축하는 그 사진. 순간 이창성은 결단한다.
이 사진을 키워서 낸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보안대에 끌려가도 내가 끌려간다.
6월 항쟁 이브의 풍경
그것은 기자의 근성이자 육감이었을 것이다. 이 사진 하나가 현대사의 물줄기를 바꿀 수도 있다는. 1987년 6월 9일 이한열의 사진은 중앙일보 1면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사람들의 영혼을 뒤흔들었다.
우선 연세대학교부터 뒤집혔다. 공수부대, 해병대를 위시하여 육군과 전경 출신의 예비역들이 군복을 입고 ‘전략적인’ 시위에 나섰고 여행 동아리, 종교 동아리 등 별반 운동권과 관계없던, 오히려 배타적이던 이들까지도 세브란스 병원에서 밤새 이한열의 시신을 지켰다.
6월 9일 밤을 뜬눈으로 지새운 사람 가운데에는 내무부 장관 고건도 있었다. 참여정부의 국무총리를 지낸 그는 치안의 책임자로서 6월 9일 밤을 보내고 있었다. 그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치안본부에서 밤을 새며 상황을 주시했다. 그에게도 당연히 이한열의 소식은 전달되었을 것이다. 경찰들은 발을 동동 굴렀다.
하필이면 이런 악재가 6.10을 앞두고.
한낮의 뜨거운 기운은 밤이 되어도 수그러들지 않았다. 되려 끓어오르고 있었다. “이 개새끼들 내일 두고 보자.”
1987년 6월 대한민국에서 잠 못 이룬 사람들은 참으로 많았다. 다음날 대통령 후보가 될 꿈에 부풀어 있던 노태우부터 성공회 성당에서 안절부절하며 6월을 기다리던 사람들, 경향 각지 대학의 학생들, 세브란스 병원에서 한열아 한열아를 부르짖던 연세대 그림패 동아리 학생들, 혹여 내일 보안대에 끌려가더라도 의연해야지 다짐했을 중앙일보 사진부장, 내무부 장관 고건, 그리고 내가 봤던 핸드마이크의 동의대생까지.
6월 항쟁 이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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