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역설: 6월 항쟁을 바라보는 시각
상식적으로는 먼 옛날의 역사를 기억하기가 더 어렵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역설적이게도 오히려 지나치게 가까운 과거의 기억이야말로 가장 쉽게 잊혀지곤 한다. 아직 개개인의 체험의 영역에 대체로 머물러 있기에, 나름대로 표준적 해석들을 바탕으로 기억해둘 역사로서 간주하지 않기 때문이리라.
하지만 그런 것과 정반대로, 오늘날 우리들의 삶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는 가까울수록 중요한 것들이 많다. 게다가 현대문명이 발달할수록 중요한 사회적 사건들이 벌어지는 빈도 역시 늘어나지 않던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모습을 이해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밑거름 중 하나인 1987년의 6월 항쟁 역시 그렇다. 20년이 조금 넘은 정도의 일이었고 당시의 참여세대가 현재 사회적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음에도, 사회보편적인 역사적 교훈이 널리 공유되거나 나아가 생활화되어 있다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학자들이 정치적 함의를 논하고 386세대 담론이 이미 한차례 보편화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상생활의 역사적 교훈 같은 것은 고대사에서 배웠다는 “우리는 음주가무에 능한 민족” 수준으로도 기억해주지 않는다. 그때 어떤 심경으로 무엇을 위해서 움직였는지, 그리고 지금 그 목표가 어떻게 되었고 당시 그런 자존심을 보여준 이들이 어떤 식으로 움직여야 할지 같은 것들이 얄팍한 세대론 등으로 뭉개져있다.
물이 끓는 온도, 사회가 바뀌는 온도 100도씨
역사를 다루는 대중문화 작품은, 역사적 의미와 일상적 기억을 엮어준다. 그 중에서도 소위 후일담 문학의 회고적 성격보다 좀 더 생생하게 이야기를 현재진행형으로 만들어준다면, 단지 당시를 경험한 세대들의 기억이 아닌 그 다음 세대에게도 전달되는 ‘역사’가 된다. 6월 항쟁에 대해서 그런 역할을 해주는 작품 가운데 가장 돋보이는 것이 바로 최규석의 만화 『100도씨』다. (여기서 볼 수 있다.)
제목으로 사용한 100도씨는 물이 끓는 온도다. 그 의미는 사회를 좋은 쪽으로 바꾸려는 싸움이 계속 좌절당할 때 어떻게 계속 힘을 낼 수 있는가라는 질문에, 100도씨면 물이 끓는데 사람은 온도를 잴 수 없으므로 지금이 99도씨라고 믿고 계속 하는 것이라는 한 감옥 속 활동가의 답변에서 드러난다.
따지고 보면 한국사회는 현대사 내내, 각 세대의 시민 다수가 백도씨를 넘겨 끓어올라 사회개혁을 부르짖은 역사적 기억이 있다. 419세대든, 유신철폐운동 세대든 말이다.
그런데 그 기억을 자신들의 그 다음 사회생활 단계는 물론 다음 세대에게도 이어줌으로써 그 사회발전을 지속적으로 관철하는 일에는 실패하곤 했다. 한쪽으로는 군사쿠데타 같은 외부요인도 있었지만, 이 정도 했으면 됐다며 포기하고 99도에서 만족해버리고 급격히 식어버리는 내적 패턴이 더 씁쓸함을 남긴다.
100도씨의 미덕: 담담함과 구체성
『100도씨』의 미덕은, 과정의 어려움에 대한 디테일을 역사적 기억으로 만들어주는 것이다. 폭력시위의 문제에 대한 이야기, 이전 세대들과의 마찰, 운동과 먹고사니즘의 갈등 같은 것들이 지난 몇 년 사이의 발명품이 아니라 당시의 민주화운동에서도 원래 중요한 요소들이었다고 담담하고 구체적으로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에 싸움에 나선 것은 그럼 무엇이었단 말인가. 당시에 이미 고민했던 문제들에 대해서 지금 더 고민하지 않는 것은 어째서인가. 왜 그런 기억들을 스스로도 다음 세대로도 이어가기 거부하게 되었을까. 얼마 오래 지나지도 않은 것인데, 왜 잊고 있게 되었을까.
물론 작품은 그에 대한 대답을 해주지 않는다. 역사만화 한 권으로 가볍게 적당한 감동을 느끼고 싶었는데 그런 묵직한 화두에 봉착하게 된 여러분 스스로가 내려야할 대답이다.
원문: capcold님의 블로그님
※ 이 글은 전자신문의 ‘만화로 보는 세상’에 실었던 글을 수정, 재게재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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