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정용진 신세계 회장이 ‘멸공’이라는 단어를 썼다가 삭제되자 인스타그램에 ‘표현의 자유’를 주장해 복원시켰다는 뉴스를 봤다. 결론부터 말하면 그건 표현의 자유가 아니다. ‘반공’은 가능하다. 공산주의에 대해 반대하는 건 얼마든지 표현의 자유에 해당하며 그 말을 썼다고 해서 수구꼴통이라 낙인 찍을 수 없다.
그러나 멸공은 다르다. 공산당이든 공산주의자든 ‘멸하자’ 즉 없애버리자는 의도가 담긴 말이다. 즉 전시 상황에서 상대방을 죽여야 내가 사는 처지의 군인들은 쓸 수 있을지 모르나 보통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일상에서 표현의 자유로 옹호될 수 있는 성격의 단어가 아니다. 일례로 삼성에 반대할 수는 있으나 이 씨 피가 섞인 것들은 이 씨고 정 씨고 친가고 외가고 다 쳐 죽이라고 누군가 선동한다면 그 또한 있을 수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하물며 대한민국에는 전쟁 와중에 군인들끼리 죽인 것도 아니고 군인들이 경찰들이 민간인들을 끌고 가서 ‘멸공’해 버리고 그 숫자조차 지금까지 파악되지 않는 뼈아프고 끔찍한 과거가 존재한다. 그런 판에 ‘멸공’이라는 단어를 쓰면서 표현의 자유를 주장한다는 것은 언젠가 “빨갱이는 죽여도 돼.” 방패를 들고 섰던 땡중의 자유와 다를 것이 없다. 그 땡중이 방패를 들고 시위에 선 것 가지고 잡아가는 것은 지나칠지 모르나 그 땡중이 그 방패를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리면 신고를 받는 건 당연한 것이다.
“가라 자본가 세상”은 정치적 구호지만 “자본가들의 배때지를 죽창으로 찌르자.”는 폭력 선동이다. 적어도 ‘멸공’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더 가깝게 수렴한다. 배울 만큼 배운 기업 회장 치고는 매우 무식한 단어를 쓴 것이고 ‘표현의 자유’를 갖다 대는 것은 그 무식함의 경지를 드넓히고 있는 것이다.
2.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의 멸공 이후 대통령 후보부터 전직 감사원장까지 멸치와 콩을 들고 멸공 세레모니에 바쁘다. 그 꼬락서니가 참 애처롭게 우습거니와, 적어도 저 단어를 저리 쓰는 게 무슨 의미인지를 생각이나 해봤을까? 이 ‘멸공이스트’들의 사진을 빤히 쳐다보게 된다.
멸공이라는 단어가 사실은 반중 의식의 소산이며, 그냥 표현이지 공산주의자들을 다 죽이자는 얘기겠느냐 운운하기도 한다. 하지만 특정한 사상이나 신념을 가진 이들을 멸하자는 표현은 엄연히 혐오 표현에 속한다.
‘멸기독교’나 ‘무슬림 절멸’을 외치는 자들이 나타나면 그 멱살을 잡아야 하는 것처럼, 거기에는 명확하게 반대해야 한다. 누가 “토착 왜구 절멸” 운운하던 이 정권 지지자들은 뭐냐고 묻는다면 단호하게 대답하겠다. 그 인간들의 멱살도 잡아야 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무엇보다 이 나라는 숫자도 파악 되지 않는 민간인들이 대한민국 공권력과 군대에 의해 학살당한 아픈 과거를 갖고 있다. 그리고 그 명분이 멸공이었다. 아이들은 빨갱이의 씨라고 죽였고 여인들은 빨갱이를 낳았다고 죽였던 그 인간 백정 판의 작두가 ‘멸공’이었다. 또 멸공의 이름 아래 ‘공산당’이 되어 ‘멸해진’ 이는 전쟁 이후도 셀 수 없이 많다
그리고 이 땅의 오른쪽 사람들, 적어도 ‘대한민국을 수호하자.’고 외치고 자유민주주의를 신앙처럼 되뇌는 사람들이 그 학살에 대해 사과한 적도 없고, 그 죄상을 인정한 적도, 진상 규명에 떨쳐 나선 적도 없다. 친구가 죽는데 유서 대필을 하는 빨갱이라고 몰아 한 사람 인생을 망친 이들도 양심의 가책조차 없다. 그런 이들이 떠드는 ‘멸공’이라는 단어가 어떻게 범연할 수 있을까.
소련식 공산주의는 이미 20세기가 끝나기 전에 망했고, 북한의 공산주의는 공산주의라 부를 것도 없는 봉건 왕정이다. 하지만 중국의 15억 인구는 공산 치하에서 살고 있고 베트남 1억 인구도 마찬가지다. 우리의 주요 교역국인 그들을 멸할 것인가?
(오징어 게임 할아버지 어투로) 그럴 능력은 되고? 그리고 능력이 되면 정말 그럴 생각이고?
더구나 사태의 시작이 정용진 신세계 회장이라는 것도 웃긴다. 체중 104kg으로 간당간당 군대 면제됐던 재벌 회장님은 아마도 이 군가를 모르시겠지만, 마지막 단어 하나 바꾸면 매우 절절하게, 눈물 나게 부르실 수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이 강산을 지키는 우리
사나이 기백으로 오늘은 산다
포탄의 불바다를 무릅쓰고서
고향 땅 부모 형제 평화를 위해
전우여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그리고 마지막 구절.
“멸공의 횃불 아래 체중을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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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이미지 출처: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