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미국에는 TOTY(Toy of the Year Awards)라는 것이 있다. 각 부문별로 그해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종류별 완구, 라이선스, 콘텐츠 등을 선정하여 시상하는 어워드로, 2019년의 경우 ‘올해의 라이선스’ 에서 한국의 <핑크퐁>이 선정된 바 있다.
그런데 TOTY의 2021 Winners는 다소 특이하다. 이미 선보인 지 40년이 넘은 IP 하나가 절반 가까운 분야를 싹쓸이했기 때문이다. 놀랍게도 바로 <스타워즈>다. <스타워즈>는 <스타트렉>과 함께 미국을 대표하는 양대 SF 프랜차이즈이지만, 이제는 너드들이나 아재가 좋아하는 콘텐츠 정도로나 대접받고 있다. 그 예로 미국민들이 가장 사랑하던 TV쇼인 <빅뱅 이론>과 <How I Met Your Mother>에서도 이 두 콘텐츠가 ‘생명력은 길지만 다소 매니악한 IP’로 수십 번 등장했던 바 있다.
2.
이렇게 미국 내에서도 다소 너디한 아재들의 콘텐츠로 취급받던 스타워즈가 TOTY 절반 가량을 휩쓴 것은 <스타워즈: 만달로리안>이라는 드라마 덕분이다. 스타워즈는 한국에는 잘 알려지지 않았으나 미국 내에서는 프리퀄 시리즈가 종료된 이후 <클론전쟁> 3D 애니메이션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세계관 확장이 이루어졌다. 만달로어인과 얽힌 이야기들도 이 세계관의 한 부분이었다.
온갖 작가들은 마르고 닳도록 스타워즈의 확장 세계관을 애용해 왔다. 루카스는 몇 가지 금기사항을 제외하고는 스타워즈의 각종 설정을 만지는 데 특별한 제한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클래식 6편과 시퀄 7편 사이 거의 5천 편(!)이 넘는 외전이 만들어졌다. 이게 변화하기 시작한 시점은 2012년 디즈니가 루카스필름을 인수한 후였다.
디즈니는 한물간 것으로 여겨지는 스타워즈 세계관을 리부트하여 싱싱한 IP로 재탄생시키고 싶어 했다. 그래서 2014년, 기존 스타워즈 외전들의 모든 설정을 한꺼번에 비공식화하는 어려운 결정을 내렸다. 디즈니가 공식 설정에 포함한 작품은 클래식-프리퀄 영화 6편과 <스타워즈: 클론전쟁>까지 총 7작품 뿐이다.
프리퀄 이후 끊임없이 확장해 나가는 세계관에 익숙해져 있던 기존 스타워즈 팬들의 반발은 매우 심했다. 특히 시퀄 영화 3작품이 각종 논란에 휩싸이고 작품성 또한 엉망인 것으로 평가되자, 디즈니가 사실상 리부트에 실패했다는 평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만달로리안>은 보란 듯이 모든 것을 뒤집으며 전미를 다시 스타워즈에 주목하게 만든 것이다.
3.
스타워즈 만달로리안의 성공 요인은 여러 가지를 들 수 있겠으나, 크게 3가지로 요약해 볼 수 있다.
- 미국 전통적 가치로의 회귀
- 디즈니 특유의 연출력
- ‘그로구’ 의 존재
기본적으로 스타워즈 사가의 매력은 아주 고전적인 영웅 스토리에서 출발한다. 탄생의 비밀을 지닌 주인공이 혹독한 수련과 깨달음을 통해 영웅의 반열에 오르고, 그 와중에 미국 특유의 ‘Daddy Issue’를 해결하면서 가족을 재구축하고 악을 물리치며 평화를 가져온다는 것이다. 우직하게 이 명제에만 집중했던 클래식 3편이 고전 명작으로 남은 이유고, 프리퀄 3편은 스타일리시하고 화려하지만 거부당하는 일이 잦은 이유고, 시퀄 3편이 사실상 내놓은 자식 취급받는 이유다.
이러한 점에서 볼 때 만달로리안은 클래식 스타워즈의 공식을 충실하게 따르고 있다. 주인공 딘 자린은 아기 그로구를 보호하기 위해 여러 행성을 다니며 혹독한 경험을 쌓는다. 마지막에는 자식처럼 아끼던 그로구가 제다이 기사를 따라 수련하러 떠나는 것을 허락하며, 마음으로 자신이 그로구의 아버지임을 깨닫게 된다. 이 과정은 마치 다스 베이더가 클래식 6편에서 루크가 자신의 자식임을 느끼는 모습을 연상케 한다.
이는 끊임없는 논란에 휩싸였던 시퀄 스타워즈의 레이와는 분명히 선을 긋는 연출이며, 디즈니의 스타워즈가 클래식으로 되돌아가겠다는 선언과도 비슷하다. 이 때문에 시즌 2 마지막 화에서 루크 스카이워커의 “훈련받지 않은 재능은 아무 소용이 없다.”라는 대사를 시퀄 3부작에 대한 비판으로 받아들이는 팬들이 부지기수다.
사실 디즈니는 시퀄 3편을 제작하면서 끊임없는 과잉 PC 논란에 시달렸다. 일각에서는 남성 중심 콘텐츠와 화이트워싱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시도가 문제가 있냐고 지적하기도 했다. 하지만 <만달로리안>의 성공은 정치적 올바름이 콘텐츠의 핵심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캐릭터의 성별과 인종에 지나치게 반성적으로 집착한 나머지 스토리의 핍진성을 상실했으며, 이 문제를 CG 떡질로 메꾸려 했던 것이 문제였을 뿐 설정 자체가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실제로 스타워즈는 다양한 종족과 은하계가 자유롭게 등장하는 현대 스페이스 오페라이기 때문에, 연출의 설득력이 충분히 뒷받침된다면 성별과 인종의 설정은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다. 물론 클래식 시리즈 6편에서 레아 공주가 겪는 ‘붙잡힌 히로인’ 같은 설정은 2020년대의 관점에서 충분히 문제가 될 수 있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레이 캐릭터를 등장시킨다고 하여 해결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확장 유니버스 이야기로 돌아와 보자. 마블이 원탑으로 전 세계를 지배했던 2010년대의 확장 유니버스 시대를 벗어나, 앞으로는 다양한 프랜차이즈들이 글로벌 OTT 배급력의 힘을 빌어 경쟁 관계를 유지하는 시대가 되지 않을까 싶다. 마블의 경우 <노 웨이 홈>이 상당히 흥행했지만 인피니티 사가가 마무리된 후에는 다소 숨 고르기를 하는 모양새다. 또 새로운 사가를 만들어나가야 하는 입장이라, 세계관 재활용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다른 프랜차이즈들이 치고 올라올 숨구멍도 생긴 상황이다.
한편으로는, 빅 콘텐츠 프랜차이즈들이 모두 군상극 위주로 재편되며 고전적인 의미에서의 무비 스타가 소멸하는 흐름이 빨라질 것으로 예상된다. 알려진 대로 2020년대 이후의 사가들은 인물이 아닌 설정 위주로 제작되고 있다. 따라서 이 설정을 어떻게 핍진성 있게 이끌어 나갈지가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한 가지 안타까운 점은 이와 같은 환경에서 우리가 ‘새로운 사가’를 창조해 낼 수 있냐는 것이다. 그래서 <왕좌의 게임>이 용두사미로 끝난 게 참으로 아쉽게 느껴진다.
원문: 김현성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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