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2년 함경북도에서 태어난 나운규는 식민지 백성의 고난을 겪으며 성장했습니다. 1912년 회령보통학교를 졸업한 뒤 신흥학교 고등과로 진학했으며, 1918년에는 만주 간도에 있는 명동중학에 들어갔지만 일제의 탄압으로 학교가 폐교되며 1년여 동안 북간도와 만주지방을 유랑하게 됩니다.
이때 독립군단체와 관련을 맺으며 10대 소년 시절부터 독립운동에 참여했고, 한때는 북간도와 러시아 연해주 일대로 피신하기도 했는데요. ‘청회선터널폭파미수사건’의 용의자로 잡혀 감옥에서 1년 6개월의 형을 살기도 했습니다.
출감 이후에는 영화를 통해 새로운 인생을 찾게 됩니다. 1924년 부산에 조선키네마주식회사가 설립되자 부산으로 내려가 연구생이 되었는데요. 그는 조선키네마가 제작한 윤백남 감독의 〈운영전(雲英傳)〉에 가마꾼으로 출연하며 영화 인생을 시작했습니다. 이른바 엑스트라 수준의 출연이었는데요. 비록 비중은 적었지만, 당시 그가 친구 김용국에서 보낸 편지를 보면 스물셋 청년이 새로운 인생을 찾은 감격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내가 찾던 길, 내 소지를 시험해 볼 곳이라야 지금의 조선에서는 이곳뿐이기에 찾아온 것이며 또 내가 항상 동경하는 예술이 하루라도 일찍 우리 민중에게 표현되어 그들로 하여금 감상케 하고 그네들을 웃기고 그네들과 한가지로 울 수 있다면 그뿐이 아니겠느냐. 어쨌든 나는 오랫동안 헤매던 미로에서 해탈했다. 그리고 환경이란 서리에 시들었든 내 이상의 싹이 한 잎 두 잎 피게 될 봄이 점점 가까워 오는 것 같다. […] 운규의 이상의 길은 지금부터 열리는 것이다.
그리고 1925년, 백남프로덕션의 작품 〈심청전〉에서 나운규는 처음으로 주역(심봉사 역)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조선키네마의 〈농중조〉에 출연해 절찬을 받으며 일약 명배우가 됩니다. 그러나 그는 배우로 만족하지 않고 직접 영화를 만들 것을 결심합니다.
조선키네마의 〈아리랑〉(1926)은 그의 다짐과 기대를 실현한 영화입니다. 이 영화에서 그는 원작, 각색, 주연을 겸했는데요. 〈아리랑〉은 통속적인 멜로드라마였지만, 관객들은 영화 속 마을 사람들이 지주에게 시달리는 모습에서는 식민지 시대의 암울한 현실을, 주인공이 낫을 휘둘러 악인을 죽이는 장면에서는 카타르시스를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큰 돌풍을 일으키며 나운규는 한국 영화의 중심에 서게 되었습니다. 이어서 저항 작품의 성격을 띠는 〈풍운아〉 역시 직접 쓰고 주연을 맡았을 뿐만 아니라, 감독까지 겸하며 그는 영화계의 귀재로 불리게 됩니다.
1927년에는 윤봉춘 등과 함께 자신의 이름을 딴 나운규프로덕션을 창립했는데요. 〈옥녀〉 〈사나이〉 〈사랑을 찾아서〉를 만들었고, 1929년에는 격조 높은 문예영화인 〈벙어리 삼룡〉을 발표했습니다.
그러나 독립투쟁하는 늙은 나팔수를 그린 〈사랑을 찾아서〉 때문에 일본 경찰에 붙잡힐 뻔하기도 했는데요. 이 시기 나운규의 대중적 인기는 절정에 달했으나 그의 무질서한 사생활로 회원들이 떠나며 나운규프로덕션은 해체됩니다.
그 후 나운규는 박정현의 원방각사와 손잡고 〈아리랑 후편〉 〈철인도〉를 만들었고, 우리 영화계에서 꺼리던 도야마프로덕션의 〈금강한〉에도 출연합니다. 이로 인해 나운규의 인기는 하루아침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생활을 위해 악극단 무대에 출연하기도 했습니다. 1931년에는 일본에 가서 동경 영화계를 시찰했고, 다음 해 귀국해 옛 동지들을 모아 영화 〈개화당이문(開化黨異聞)〉을 만들었지만, 검열로 많은 장면이 잘린 채 개봉했기에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한편, 같은 해 이규환 감독의 〈임자 없는 나룻배〉에 주연으로 출연해 좋은 연기를 보여주기도 했는데요. 이 시기 나운규의 작품들인 〈무화과〉 〈강 건너 마을〉 등은 문명비판·사회비판 등 부정 정신을 나타냅니다. 그 밖에도 〈종로〉 〈칠번통(七番通)의 소사건〉 〈그림자〉 등을 제작했으나, 흥행에는 실패했습니다. 이 시기 그는 연쇄극을 만들어 지방 순회공연을 다니기도 했습니다.
1936년에는 우리나라 영화계에 획기적 선풍을 일으킨 발성영화가 등장했습니다. 이에 나운규는 〈아리랑〉 제3편을 발성영화로 제작합니다. 그는 당시 문예 작품의 영화화에 주력했고, 이때 이태준의 소설 〈오몽녀(五夢女)〉를 영화화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이 작품은 그가 침체에서 벗어나고자 온 힘을 기울였으나, 무리를 거듭한 탓에 지병인 폐결핵이 악화하며 〈오몽녀〉는 나운규의 최후의 작품이 되고 맙니다.
당시 몇 번이나 쓰러졌다가 겨우 정신을 가다듬는 일들이 반복될 정도로 그의 건강은 심각했는데요. 〈오몽녀〉에서 나운규가 맡았던 일은 연출로, 배우로 시작해서 감독으로 영화 인생을 마무리한 셈이었습니다. 그리고 1937년 8월 9일, 나운규는 짧은 생을 마무리했습니다.
나운규가 일관되게 추구한 예술 테마는 식민통치에 대한 저항과 비판이었습니다. 그는 영화인으로 활동한 약 15년 동안 29편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영화계에서 보낸 시간이 결코 길다고 할 수는 없지만, 한국 영화계에 아주 큰 영향을 미쳤음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독립운동에 나선 시절부터 시대의 영화인이 되기까지, 그의 삶 자체가 하나의 영화와도 같다고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원문: 대한민국역사박물관의 브런치 / 글·기획: 대한민국역사박물관 한걸음기자단8기 양여진
참고 문헌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조희문, 「나운규의 영화활동과 서울의 흔적들」, 『영화교육연구』, 7(0), 2005, pp. 155-174.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