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소위 ‘운동권 출신’이라서 데모 경험이 꽤 있는 편이다. 데모를 조직한다는 것, 탄압이 심하던 시절에 시위 참여의 어려움을 어느 정도는 안다. 해방 이후 한국 현대사에는 관심이 많았지만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대체로 무지한 편이었다. 3·1 운동 100주년을 맞이해 탄압이 극심하던 식민지 시대에 어떻게 전국적으로 수십만에서 수백만 명이 참여하는 ‘비폭력 만세운동’이 가능했는지 강력한 의문이 생겼다.
3·1절 연휴 기간 〈항거: 유관순 이야기〉라는 영화도 봤다. 유관순의 싸움은 ‘죽음을 각호하고, 비타협적인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 과정에 있었던 많은 열사들을 생각게 한다. 영화를 보는 내내, 슬픔과 경이로움, 그리고 숙연함을 금할 수 없었다. 이후 ‘전 민족적’ 3·1 운동이 가능했던 동력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기 위해 조한성의 『만세열전』(생각정원)과 김형민의 『한국사를 지켜라 1: 독립운동가로 산다는 것』(푸른역사)을 봤다. 메모를 겸해 정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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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를 지켜라 1』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들이 겪었던 사연들을 다룬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 33인’은 시위가 예정되어 있던 파고다 공원에 참석하지 않았다. 군중, 시위장소에 대한 예고는 있었지만, 지도부는 현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때 파고다 공원에서 ‘최초로’ 만세운동의 불꽃을 붙인 사람은 경신학교 졸업생인 정재용이었다.
그밖에 ▲ 2·8 동경 유학생 운동의 주역들, ▲ 이완용을 죽이려 했던 이재명과 이동수, ▲ 이회영와 그의 형제들, ▲ 님 웨일즈의 아리랑으로 유명한 김산(장지락) 이야기, ▲ 도산 안창호 선생이 극찬했던 김마리아, ▲ ‘폭탄 투척’을 기획했던 나석주, ▲ 일제강점기 가장 비싼 현상금이 걸렸던, ‘현대사’의 비극을 온몸으로 간직한 밀양 출신 의열단 단장 김원봉, ▲ 김원봉의 밀양 출신 친구였던 의열단 윤세주, ▲ 일본에 충성하려다 김구에게 폭탄 투척을 자임한 이봉창, ▲ 서울 한복판에서 지붕 위 활극을 펼쳤던 김상옥, ▲ ‘암살’의 실제 주인공인 여걸 남자현, ▲ 일본놈에게는 술을 따르지 않았던 ‘수원 기생’ 김향화, ▲ 서릿발 칼날 진 그 위에서, 강철로 된 무지개가 되어 ‘광야’를 목 놓아 불렀던 시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이육사, ▲ 3·1 만세운동 이후 새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 조선총독부 총리에게 폭탄을 투척했던 예순다섯의 어르신 강우규 등을 다룬다.
원래도 알았지만 저자 김형민은 진정 ‘타고난 글쟁이’이다. 글이 정말로 술술 읽힌다. 마치 현장에 내가 있는 듯한 느낌이 들 정도로 이야기가 생생하고 묘사가 탁월하다.
『만세열전』의 부제는 ‘3·1 운동의 기획자들, 전달자들, 실행자들’이다. 저자 조한성은 민족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이기도 하다. 『만세열전』에서 특히 놀라운 점은 3·1 운동 당시 구속된 사람들의 경찰 조서와 검찰 조서를 일일이 확인해서 시위자들의 당시 ‘진술’을 서술한다는 점이다. 분명 ‘슈퍼 울트라 쌩노가다’였을텐데, 이런 작업을 했다는 것만으로도 책을 읽을 가치는 충분했다.
알고 싶었던 궁금증의 핵심은 “왜, 어떻게, 탄압이 극심했던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인구 2,000만 명 중 최대 200만 명이 참여한 대규모 비폭력 만세운동이 가능했을까?”였다. 『만세열전』을 포함해 3·1 운동 100주년을 기념해서 나왔던 신문들의 각종 ‘기획 기사’를 참고했다. 결론을 종합해보면, 민족적 만세운동이 가능했던 동력의 핵심은 ‘위대한’ 정세 오판(誤判)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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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만세운동에 영향을 준 동력은 ① 환경적-객관적 요인과 ② 주체적 요인으로 구분할 수 있다. 이 중에서 환경적-객관적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 첫째, 3·1 만세운동이 있기 몇 달 전인, 1918년 11월 11일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다.
- 둘째, ‘전후(戰後) 질서’를 합의하기로 한 파리 강화회의가 1919년 1월 18일부터 6월 28일까지 열리게 됐다. (마무리 일정이 예정됐던 것은 아니고, 결과적으로 6월 28일에 끝났다.)
- 셋째, 1차 세계대전을 통해 미국은 ‘신흥 강대국’으로 떠올랐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은 전후 구상 14개 조항을 발표했고, 그중 ‘민족 자결주의’가 포함됐다.
- 넷째, 국내적으로 보면 조선의 국왕이었던 고종이 1919년 1월에 죽게 됐다. 그런데, (사실과는 달랐지만) ‘독살설’이 유포됐다. 이는 조선인들의 민심을 매우 민감하게 자극했다.
정리하면 ① 1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戰後) 질서 수립을 위한 파리강화회의 개최, ②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③ 고종의 독살설이 ‘민족적인’ 차원의 3·1 만세운동을 가능하게 만들었다. 3·1 만세운동을 초기에 주도하고 조직한 주체적 요인을 살펴보면 아래와 같다.
첫째, 3·1 만세운동에 관한 최초의 조직가는 1919년 당시 34세였던 ‘여운형’이다. 여운형은 1918년 11월 27일 상해 칼턴 카페에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특사’였던 찰스 크레인의 환영회에 참석한다. 크레인은 미국 대선 당시 선거비의 대부분을 도와줬던 윌슨 대통령의 친구였다. 크레인의 환영식이 열렸던 당시 중국 상해 칼턴 카페에는 1,000명의 인파가 운집했고, 여운형도 그중 하나였다.
크레인은 이 자리에서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것이라며 ‘민족자결주의’의 취지에 대해 연설했다. 여운형은 이후 동지들과 상의했고 파리강화회의에 대표 파견을 결정했다. 영어를 잘하는 김규식을 보내기로 했다. 우드로 윌슨 미국 대통령에게 독립청원서를 보내기로 했다.
여운형은 ‘독립청원서’를 작성하면서 ‘명의(名義)’ 문제에 직면한다. 조선의 독립 문제를 ‘개인 이름’으로 쓰는 것은 정치적 무게감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한청년당이라는 서류상 정당을 만든다. 이때 가담하는 멤버들이 김규식, 조소앙, 장덕수, 김철 등이다.
여운형은 이후 ‘장덕수’를 도쿄로 보내, 도쿄 유학생들에게 이 소식을 전한다. 이후 2·8 동경 유학생 선언이 발생하게 되는 계기이다. 여운형은 조선에는 ‘김철’을 파견해서 천도교 인사들을 만나게 한다. 김철은 천도교 조직에게 3만 원의 거금을 지원받는 약속을 받아낸다(『만세열전』, 24–49쪽). 여운형은 또한 ‘선우혁’을 조선에 보내 기독교인들을 만나게 한다.
국내적으로 볼 때 3·1 만세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의 연합을 통해 이뤄졌다. 천도교와 기독교 모두 ‘여운형이 파견한’ 사람을 통해, 파리강화회의 개최 소식과 김규식의 파견 등을 접한다. 3·1 만세운동을 추진한 계기였다.
둘째, 도쿄의 조선 유학생들이다. 유학생들이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하는 과정은 『만세열전』에 나오지 않는다. 김형민의 『한국사를 지켜라 1』에서 한 꼭지로 소개한다. 1919년 당시 조선에서 일본으로 건너간 유학생은 약 1,000여명이었다. 1912년 조선 유학생 대부분을 포괄하는 조선 유학생 학우회라는 조직이 만들어진다. 조선 유학생 학우회는 사실상 ‘유니언 숍’ 비슷하게 운영됐다.
조선 유학생 학우회는 《학지광》이라는 기관지가 있었는데, 편집장은 최팔용이었다. 최팔용은 도쿄 강당에서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한다.(『한국사를 지켜라 1』, 25–33쪽) 도쿄 유학생이었던 ‘송계백’은 2·8 독립선언서를 발표하기 전 독립선언서 초안을 갖고 조선에 잠입한다. 조선에 들어온 송계백은 천도교 쪽에 있던 최린, 현상윤, 최남선 등을 접촉하고 손병희와도 연결된다.
당시 천도교의 수장이었던 손병희와 천도교 지도부가 독립운동 가담을 결정한 가장 중요한 요인은 ‘학생들의 움직임’이었다. 당시 손병희 왈 “어린 학생들이 저렇게 운동을 한다 하니 어찌 앉아서 보기만 할 수 있느냐”라고 말하며, 그날로 천도교 최고간부회의를 소집해서 독립운동 참가를 결정한다. (앞의 책, 50–53쪽)
도쿄에서 발표된 2·8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작성했다. 2·8 독립선언서 발표 이후 조선인 학생들은 대부분 연행된다. 이 중에서 2·8 독립선언으로 실형을 받은 사람은 최팔용, 김도연, 김철수, 송계백, 김상덕, 백관수, 윤창석, 이종근, 서춘 아홉 명이다. 2·8 독립선언서를 낭독했던 최팔용, 조선에 잠입해서 천도교의 합류를 이끌어낸 송계백은 모두 감옥에서 고문을 당하고 끝내 숨을 거둔다. 김상덕은 해방 이후 ‘반민특위 위원장’을 한다.
셋째, 천도교와 기독교의 공동전선이 중요했다.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서를 발표한 사람의 서명자 순서가 ‘상징적’이다. 1순위는 천도교 손병희, 2순위는 기독교 장로교 길선주, 3순위는 감리교 이필주, 4순위는 불교 백용성이었다. 이후부터는 교단과 관계없이 무작위로 했다.
실제로 3·1 만세운동은 천도교와 기독교(장로교)가 주도하고, 이후에 감리교와 불교가 합류했다. 원래는 천도교, 기독교 15인씩 30명으로 할 예정이었다. 이후 불교 2명이 합류해서 ‘33명’의 운율을 살리기 위해 기독교를 한 명 추가했다. 최종적으로 (장로교와 감리교를 포함한) 기독교 16인, 천도교 15인, 불교 2인이 되었다.
『만세열전』을 보며 흥미로웠던 점은 당시 ‘천도교 조직’이 가장 잘 정비된 전국조직을 갖추었다는 점이다. 경제적 자금 측면에서도 가장 빵빵했다. 천도교와 기독교가 3·1 만세운동의 공동 전개 여부를 협상 중일 때, 기독교 쪽에서 천도교 손병희에게 만세운동 준비자금으로 5,000원을 요청한다. 손병희는 기꺼이 이에 응한다. 양쪽 교단의 ‘신뢰 관계’가 두터워지는 계기가 됐다.
천도교 조직이 기독교에 비해 ‘전국적으로 잘 정비된’ 조직을 갖춘 이유 중 하나는, 기독교는 ‘의사결정’이 분권적인 반면 천도교는 ‘중앙집중적’ 의사결정이었기 때문이다.
더 중요한 이유는 동학농민운동의 패배 이후 위기에 처한 동학 교단이 의도적으로 ‘친일 노선’을 걸었기 때문이다. 손병희는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의 승리를 예상하고 일본 육군성에 1만 원의 거액을 헌납한다. 천도교 교도들에게는 일본군 원조를 지시한다. 강제병합 이후에도 일본의 탄압을 ‘미리’ 무마하기 위해 메이지 신궁의 건축비로 1,000원을 기부하고, 메이지 천황이 사망했을 때는 조선총독부를 찾아가 조의를 표하기도 했다.
이랬던 손병희는 파리강화회의가 열릴 예정이라는 것, 미주, 상해, 시베리아에 ‘독립운동’을 하려는 동지들의 존재, 도쿄 유학생들과 서울에 있는 학생들의 독립운동 움직임을 알자 ‘교단이 순식간에 날아갈’ 위험을 감수하고 독립운동을 결정하게 됐다. 천도교 지도부는 독립운동을 결심하면서 3가지 원칙을 정했다. ① 대중화, ② 일원화, ③ 비폭력이다. 우리가 아는 3·1 만세운동의 운동방식이 이때 결정된다. (『만세열전』, 48쪽)
넷째, 서울의 학생 지도부다. 기독교 세력이 3·1 만세운동에 합류한 이유가 흥미로운 지점이다. 파리강화회의 소식을 접한 기독교 쪽의 구상이 매우 흥미롭다. 그들의 생각인즉, ① 일본에게 조선의 독립을 ‘청원’한다. → ② 일본에게 조선 독립 청원을 ‘파리강화회의’에 알린다. → ③ 그럼 ‘독립 과정’의 주도권을 기독교 세력이 가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독교 쪽은 처음에 독립 ‘청원’을 원했다. 그래서 3월 1일 발표하는 내용도 독립청원서로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천도교 쪽에서 독립 ‘선언’을 강하게 요구했다. 어쩔 수 없이 ‘독립 선언서’로 합의가 이뤄졌다.
① ‘독립 선언’ → ② 일본 총독부에게 전달 → ③ 시민들에게 독립선언서 배포 → 독립과정의 주도권 확보 발상은 천도교 쪽도 대동소이했다. 천도교 쪽이 기독교 쪽과 다른 게 있었다면 기독교는 독립 ‘청원’ 방식을 선호했고, 천도교는 독립‘선언’을 선호했다. 기독교는 독립선언서의 ‘시민 배포’ 자체를 동의하지 않았고, 천도교는 ‘시민 배포’까지는 동의했다.
고종의 국장(國葬)이 3월 3일로 예정되어 있었다. 당시 3월 3일은 ‘월요일’이었다. 고종의 국장 당일 날은 ‘폭동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었다. 3월 2일은 일요일이었다. 기독교 입장에서 ‘주일’이었다. 그래서 독립선언서 발표일은 ‘토요일’인 3월 1일로 결정됐다. 발표 장소는 ‘파고다 공원’으로 결정했다.
그런데 천도교 세력은 서울의 학생 지도부와도 채널을 가졌다. 3·1 만세운동을 하기 하루 전날인 2월 28일, 민족대표 33인은 3월 1일 당일 학생들이 대규모로 파고다 공원 앞으로 모일 예정이라는 소식을 접한다. 천도교와 기독교는 모두 일본에게 선언서를 ‘전달’하는 것까지만 할 생각이었다.
판단과 동기가 그랬기에, 천도교와 기독교는 모두 학생들의 광범위한 참여가 불편했다. ‘소요’로 번질 가능성도 있다고 판단했다. ‘시민들의 참여’도 부담스러웠다. 이들은 ‘판’이 커지는 것을 경계했다. 연희전문학교 3학년 김원벽, 나중에 고려대가 되는 보성법률상업학교의 강기덕, 나중에 서울의대가 되는 경성의학전문학교 한위건이 학생의 참여독려 작업을 주도했다.
김원벽, 강기덕, 한위건은 몇 가지 중요한 결정들을 한다. (앞의 책, 97–124쪽)
첫째, 2선 지도부를 만들었다. 김원벽, 강기덕 등은 3월 1일 만세 시위에 참석하지만 한위건은 빠진다. 김원벽, 강기덕이 구속된 이후 투쟁을 기획-주도할 수 있는 2선 지도부가 되기 위해서였다. 이후 윤자영, 한창환, 이용설 등이 ‘2선 지도부’를 구성한다.
둘째, 2차 독립운동을 3월 5일 아침 9시 남대문역에서 진행하기로 결정한다. 2선 지도부 결성과 2차 만세 시위에 대해 김원벽은 이렇게 표현했다.
독립운동은 한번 만으로 성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제1회에 선언서를 발표한 사람이 체포되면 제2회, 제3회, 계속하여 운동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 110쪽
실제로 3월 5일에 남대문에서 있었던 2차 만세 시위는 향후 국면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시위가 ‘1회성’에 머무르지 않고 2차, 3차로 확산되며 향후 전국화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게다가 3월 5일, 2차 만세 시위는 3월 1일 1차 만세 시위보다 ‘규모’가 훨씬 더 커졌다. 일제 당국의 자료에 의하면 3월 1일 시위에 모인 군중을 약 3,000명이라고 기록했다. 그런데 3월 5일, 2차 만세 시위에 모인 군중을 1만 명으로 기록했다. 2차 만세 시위는 3월 1일 시위에 비해서도 ‘3배 이상’ 많은 사람이 참여했다.
1차 시위 때는 ‘깃발’ 같은 것이 없었는데, 2차 시위부터 조선독립이라고 쓰인 ‘깃발’이 등장했다. 다음은 당시 보성법률상업학교(이후 고려대학교) 3학년 강기덕이 검사 심문 과정에서 했던 말이다.
“그대는 어찌하여 독립운동을 하려고 했나?”
“조선 사람이니 독립을 하려고 한 것이오”
“그래서 어떤 수단으로 독립을 하려 했나?”
“조선 사람이 일본에 복종하지 않는 모습을 보여 독립을 성취하려고 했소.”
- 131쪽
원래 3·1 만세운동을 주도했던 민족대표 33인은 일회성 행사로 생각했다. 그리고 조선총독부에 ‘독립의지를 전달하는’ 수준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별도의 움직임이었던 학생 지도부 한위건의 제안으로 제2 지도부를 만들고 2차 만세 시위를 기획한다. 3월 5일에 진행된 2차 만세 시위는 독립운동이 일회성 행사에 끝나지 않고 연속적-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계기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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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열전』이라는 책은 3·1 만세운동에 관한 ① 기획자들, ② 전달자들, ③ 실행자들을 다룬다. 내가 위에서 쓴 글들은 이 중에서 ① 기획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내용이다. 올해 3·1절 100주년을 맞이해 문재인 대통령이 ‘친일청산론’을 제기했다. 2019년 오늘 현재, 우리에게 바람직한 ‘친일청산’이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바람직한 친일청산론을 정립함에 있어, 나는 ① 베트남, ② 프랑스, ③ 한국을 비교하는 것이 유의미하다고 생각한다.
베트남의 경우 1883년 프랑스는 선교사 탄압 사건을 빌미로 아르망 조약을 통해 베트남을 식민지화했다. 이후 일본의 지배와 미국의 지배를 받는다. 1973년 미군이 철수하고, 1975년 북베트남과 남베트남이 통일되기까지 약 100여 년에 걸쳐 세계 최강의 제국주의 국가였던 프랑스, 일본, 미국과 ‘반외세 독립투쟁’을 전개했다. 세월이 길어 베트남은 ‘친프라, 친일파, 친미파 청산’을 하지 않는다. 죄질이 매우 중요하고, 악질 중에 악질 일부만 처단했다.
프랑스는 반대되는 경우이다. 프랑스의 독일점령 기간은 1941–1945년이었다. 불과 4년이었다. 게다가 프랑스가 독일(프로이센)의 점령을 받은 것은 이때가 처음이 아니었다. 기간이 짧고 선례가 있었기에, 프랑스는 ‘부역자 처단’도 화끈하게 할 수 있었다.
조선은 1910–1945년, 35년 기간 동안 식민지였다. 외교권을 박탈당한 을사늑약을 기준으로 보면 1905–1945년, 40년의 기간이다. 프랑스에 비해서는 9–10배가 더 길고, 베트남에 비해서는 ⅓을 살짝 넘는다. 한국은 역사적 기간으로 볼 때 베트남과 프랑스의 중간쯤에 위치한다.
‘친일청산’은 중요하고, 매우 악질적인 이들로 엄격하게 제한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국은 ‘반일 민족주의’를 통치 세력의 이데올로기로 활용한 감이 없지 않다. 그리고 정작 해야 할 일이었던, 독립운동가의 발굴, 역사적 사료 발굴, 연구 지원 등은 소홀히 했다. 이를테면 네거티브한 접근은 최소한으로 하고, 포지티브한 접근을 극대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3·1 만세운동에서 천도교와 기독교는 처음부터 ‘일본에 청원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을 꾀했다. 지나치게 나이브한 정세판단을 했다. 그러나 정세판단의 오판은 이들만 그런 게 아니다. 3·1 만세운동에 참여한 조선 민족 대부분이 그랬다고 봐야 한다.
3·1 만세운동은 ① 파리강화회의와 민족자결주의로 상징되는 세계사적 정세변화 국면에 만들어진 국면에 대한 ② ‘위대한’ 정세 오판에 기초해 ③ (‘나라를 팔아먹은’ 국왕의 죽음도 슬퍼하는) 半봉건-反외세 민족주의적 감성이 결합하며 ④ 계층을 초월해 광범위하게 참여한 대중운동이었다.
유관순, 김원벽, 강기덕, 한위건으로 상징되는 ‘학생운동’의 흐름이 독립운동에 대한 원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면, 천도교와 기독교는 뭔가 타협적이고 ‘세상의 모순에 물든’ 모습을 보여준다. 게다가 2·8 동경 유학생들의 독립선언서는 ‘이광수’가 작성했고, 3·1 독립선언서는 ‘최남선’이 작성했다.
광범위한 대중운동은 원래 ‘직선’으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곡선’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다시 한번 확인하게 만든다. 학생 지도부도 중요했고, 천도교와 기독교도 중요했다. 오늘의 현재가 있기까지 진정 “새는 좌우의 날개로 날았다”라고 표현할 수 있다. 보수도 기여했고, 진보도 기여했고, 독립운동가도 기여했고, 심지어는 (천도교, 이광수, 최남선처럼) 친일파도 기여했다.
만세 시위를 통해, 일본에게 독립을 청원하고, 파리강화회의에 그걸 알리면 조선이 독립될 수 있다고, 조선 민족 대부분이 생각했던, ‘위대한’ 정세 오판이 3·1 만세운동의 기적이 가능했던 이유였다. ‘위대한’ 정세 오판은 조선독립은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3·1 운동 세대를 만들어낸다.
돌이켜보면 수십만 명이 참여하는 대중운동이 진정으로 남기는 것은 ‘투쟁의 목표’ 그 자체가 아니다. ‘사람’ 그리고 ‘투쟁의 경험’ 그 자체이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