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인은 우리 소설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그는 춘원 이광수와 함께 초기 현대소설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했다. 소설 문장을 과거형 시제로, 영문의 ‘he’와 ‘she’에 대응하는 ‘그’와 ‘그녀’라는 삼인칭 대명사를 정착시킨 게 이들 작가인 것이다.
김동인의 아버지는 평양의 대부호인 기독교 장로 김대윤, 일제 강점기 때 각종 친일 단체에서 활동하고 제헌국회 부의장을 지낸 김동원이 이복형이다.
동인은 일본 유학 중이던 1919년 2월, 도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순문예 동인지 『창조(創造)』를 창간했다. 그는 주요한을 발행인으로 한 이 동인지에 단편소설 「약한 자의 슬픔」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춘원과 함께 초기 현대소설의 발전에 이바지했지만, 문학을 바라보는 관점 따위에서 그는 춘원과 차이가 있다. 춘원이 자신의 계몽주의적 사상과 가치관을 대중들에게 설득하는 통로로 문학을 상정한 데 반해 그는 순문학적 목표를 분명히 했던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김동인은 1919년 2월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열린 재일본 동경 조선 유학생 학우회 독립선언 행사에 참여하여 체포되었다가 하루 만에 풀려났다. 3월에 귀국하여 동생이 사용할 3·1운동 격문을 기초해 준 일로 구속되었다가 6월에 풀려났다. 이는 어떤 형식으로든 ‘조선인’ 김동인의 정체성을 보여준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김동인이 본격적인 친일의 길로 들어선 것은 1930년대 후반이다. 동인은 1939년 2월 초중순경 조선총독부 학무국 사회교육과를 찾아가 ‘문단 사절’을 조직해 중국 화북지방에 주둔한 ‘황군(皇軍)’을 위문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이 받아들여져 3월 위문사(문단 사절)를 선출하는 선거에서 박영희·임학수와 함께 뽑혔고, 4월 15일부터 5월 13일까지 ‘북지(北支) 황군 위문 문단 사절’로 활동했다.
조선 민중에게 성전(聖戰)의 참 의의와 병사들의 노고를 보고하여 조선 민중의 몽매함을 깨닫게 할 중대한 사명과 의무가 우리들 조선 문사(文士)에게 있다.
- 「북지 전선을 향하여」, 『삼천리』(1939년 6월호) 중에서
본인의 제안으로 떠나게 된 여행이라 결의도 굳세었던 모양이다. 동행했던 박영희와 임학수가 돌아와 각각 『전선 기행』, 『전선 시집』 등으로 자신의 임무를 완수했지만, 김동인은 병 때문에 약속했던 방문기는 쓰지 못했다.
김동인의 역사소설 『세이간의 길』과 『백마강』
히가시 후미히토(東文仁)로 ‘창씨개명’한 김동인의 친일 행위는 총독부 외곽단체인 조선문인협회 발기인으로 참여한 이후 본격화된다. 작가로서 그는 ‘역사소설’을 통해 이른바 ‘황민화 운동’과 ‘내선일체’의 선두에 섰다. 임종국이 ‘조선의 역사소설은 마침내 김동인에 의해서 조선 역사를 버리고 일본 역사에서 취재한다는 난센스’라고 조롱한 문제의 작품은 장편 『세이간(星巖)의 길』(『조광』 1944년 8월~12월호)이다.
이 장편의 주인공은 야나가와 세이간(梁川星巖)인데 그는 도쿠가와 막부 말기의 시인이며 막부가 양이(攘夷) 근왕론자(勤王論者)들을 체포했을 때 25편의 시로써 시사(時事)를 개탄 비분했다는 사람이다. 김동인이 굳이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소설을 쓴 이유를 짐작하기는 쉽지 않다. 아마도 메이지 유신의 숨은 원동력이 된 세이간을 통해서 메이지유신 전후의 일본은 그려 국민 의식을 고취하려 한 듯하나 이 소설은 연재가 중단되어 완결하지 못하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본을 배경으로, 일본인을 주인공으로 한 역사소설을 쓴 김동인의 의식 세계를 짐작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는 적어도 일제의 ‘내선일체’ 정책에 동의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것은 분명해 보인다. 그의 이러한 적극적 친일 행위는 이내 1941년 7월부터 《매일신보》에 연재된 장편소설 『백마강(白馬江)』의 집필로 이어진다.
『백마강』은 《매일신보》에 소개된 것처럼 “내선일체의 성지 백제를 배경으로 신체제에 즉응하여 역사소설의 신기원을 만들고자” 한 작품이었다. 이 소설은 백제 의자왕이 항복하자 일본이 구원하러 온다는 내용으로 ‘내선일체’의 역사적 연원을 끌어내어 부여신사(夫餘神社) 건립 시책을 다루었다.
일제에 협력하는 글쓰기에서도 김동인은 다른 친일 문인들과 다르지 않은 활동을 벌였다. 그는 ‘일장기’를 ‘광명의 원천인 태양의 단순 간결한 표시’라며 찬양하는가 하면 ‘내선일체’와 ‘동조동근론(同祖同根論)’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는 글을 썼다.
대동아전이 발발되자 인제는 ‘내선일체’도 문젯거리가 안 됐다. 지금은 다만 ‘일본 시민’일 따름이다. 한 천황폐하의 아래서 생사를 같이하고 영고(榮枯)를 함께할 한 백성일 뿐
이미 자란 아이들은 할 수 없지만 아직 어린 자식들에게는 ‘일본과 조선’이 별개 존재라는 것을 애당초부터 모르게 하련다.
- 「감격과 긴장」, 《매일신보》(1942.1.23.)
성전의 결과로 생겨날 대동아공영권 ― 즉 신일본권이야말로 우리가 지금껏 옛말에서나 듣던 바와 같은 용궁(龍宮) 같고 선원(仙園) 같은 찬란한 대지역일 것이다. 무진장의 수산물·광산물·식물의 위에 찬연한 일본의 문화를 가한, 마치 태양과 같이 빛나고 무지개와 같이 찬란한 신일본권의 문물은 지금 바야흐로 전개되려 한다. 이 빛나는 역할의 한몫을 맡은 우리의 자랑도 소리 높여 부르짖자.
- 「신일본권(新日本圈)」, 『半島の光』(1942년 3월호)
일제의 징병제 시행에 반가이 화답하는 것도 여느 친일 문인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1944년 1월 20일 조선인 학병이 첫 입영을 하게 되자 1월 19일부터 1월 28일에 걸쳐 《매일신보》에 「반도 민중의 황민화―징병제 실시 수감(隨感)」을 연재했다.
조선에도 드디어 징병제가 실시됐다. 우리나라 헌법은 병역을 국민의 의무로 잡았다.(…) 병역이란 자는 단지 국민의 의무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국민의 특권인 증좌이다. 조선인의 사상이 과연 황국신민 되기에 충분한가, 아국(我國)의 국방군은 그 사상까지 완전한 일본인적 사상을 가진 자가 아니면 안 된다. (…) 우리나라의 국체에 대하여 충분한 이해를 가지고 이런 국체를 가진 국가의 우수한 병사가 되기를 명하는 바이다. 내 몸은 이제부터는 내 것이 아니요 또는 가족의 것도 아니요 황공하옵게도 폐하의 것이며, 지금 폐하의 어(御)분부로 완적(頑敵, 완강하게 버티는 적)을 멸하려는 성검(聖劍)을 잡고 일어선 바라는 자각을 가지고 나서야 할 것이다.
그는 학병제와 관련하여 강제가 아닌 자율 지원의 이 학병제야말로 “조선인의 황민화의 정도, 조선인의 일본인적 애국심의 강도를 다루어 보는 저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는 국책문학으로서 ‘국민문학’을 선전하면서 문학인의 ‘문필보국(文筆報國)’에 앞장섰다.
이데올로기로서의 국민문학에서 오히려 감정으로서의 애국열과 보국 정신을 붓의 힘을 빌어서 국민에게 환기시켜 천황폐하의 은혜와 나라의 은혜에 대해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고 싶은 것이다. 여생을 어봉공(御奉公)으로서 말이다.
- 「조선 문단과 내가 걸었던 길(朝鮮文壇と私のんだ步道)」, 『국민문학』(창간호)
(지원병제·징병제·특별지원병제 등) 이 모든 행사가 일시 뇌동적 흥분이 아니고 진정한 황민화의 고양인 점을 천하에 알리는 동시에 후계자의 육속(陸續)을 효과 있게 부르기에는 문학의 선동력과 흥분력의 힘을 빌 필요가 많다고 본다. 이러한 의미로 우리 반도의 문학인의 책무는 크고 또 중하다.(……) 국가 성쇠의 열쇠가 우리 반도 문학인의 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닐 것
- 「총동원 태세로」, 《매일신보》(1944.1.1., 1.4.)
문학의 선동력으로 동포를 일제의 전쟁에 나아가게 하여야 한다고 주장함으로써 김동인은 마침내 작가의 책무를 선전·선동으로 규정하는 윤리적 파탄에 이른 것이었다.
김동인, 해방 당일에도 친일을 모색하다
1942년 1월 김동인은 한 잡지사에서 소설가 박계주 등과 잡담을 나누던 중 ‘법률상 천황의 권한은 개인인 천황 자신에게 있는 것이 아니고 천황이라는 국가기관에 속한다’는 ‘천황기관설’을 언급하면서 천황을 ‘그 같은 자’라고 호칭하는 치명적(!) 실수를 저지른다. 그는 동석한 정보원의 제보로 체포되어 그해 7월 ‘천황불경죄’로 징역 8월을 선고받고 복역했다. 이 부분은 발가벗고 친일의 길로 매진하던 히가시 후미히토(東文仁)에겐 ‘옥에 티’가 되었을 것이다.
친일 작가 김동인의 비극은 1945년 8월 15일, 해방되는 날까지도 일본의 패망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당일 오전 10시, 그는 조선총독부 정보과장 겸 검열과장 아베 다쓰이치(阿部達一)를 만나 ‘시국에 공헌할 새로운 작가단’을 만들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했다. 물론 정오에 일본이 항복 선언을 할 것이라는 걸 알고 있었던 아베는 이를 거절했다.
해방의 날까지 친일에 골몰했던 김동인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였을까. 친일을 비호하는 전형적 논리는 ‘정황론’이다. 일제의 강요와 탄압 때문에 피할 수 없었던 행위라는 정황론도 해방되는 날까지 친일의 길을 모색했던 김동인을 피해갈 수밖에 없는 이유다.
해방 이후, 자신의 친일 행적에 대한 동인의 태도 역시 여느 문인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는 「망국인기(亡國人記)」, 「속 망국인기」 등을 통해 자신의 행적에 대해 변명했다. 그는 일제 말기의 친일 행위를 민족해방을 위한 결단이자 고육책, ‘조선어와 조선 소설’을 지키기 위한 체제 내적 저항행위라고 주장한 것이다.
김동인은 1949년 중풍으로 쓰러졌다. 이듬해, 한국전쟁이 발발했으니 피난을 떠나지 못한 그는 서울을 점령한 북한군에게 심문을 받았다. 김동인은 1951년 1월, 자택에서 사망했고 이웃 사람들이 묻어주었다. 적극적 친일 행위에도 그는 해방된 조국에서 5년밖에 살지 못한 셈이다.
친일 문인 문학상의 원죄, 동인문학상
김동인의 문학적 업적을 기리는 동인문학상은 1955년 월간 『사상계(思想界)』에서 제정하고 이듬해부터 시상을 시작했다. 그러나 이 상은 박정희 정권의 탄압으로 인한 『사상계』의 경영난으로 1968년 중단되었다. 이후 동서문화사(1979∼1985)를 거쳐 1987년부터는 조선일보사가 이 상을 주관하고 있다.
1970년 김지하의 「오적」을 실어 폐간된, 장준하가 창간한 진보 잡지 『사상계』가 ‘동인문학상’을 제정한 속내는 쉽게 이해하기 어렵다. 일제의 학병으로 끌려갔다 탈출하여 광복군 장교로 싸웠던 민족주의자 장준하가 하필이면 친일 문인 ‘김동인’을 기리는 문학상을 제정한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작가의 면면은 눈부시다. 손창섭, 이호철, 김승옥, 이청준, 최인훈, 조세희, 이문열, 박완서, 이문구 등이 각각 이 상을 받았다. 모르긴 해도 오랫동안 이 상은 우리 문학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문학상이었던 듯하다.
친일 문인의 이름을 딴 문학상은 이 밖에도 조연현문학상, 육당시조문학상, 소천비평문학상, 팔봉비평문학상, 이무영문학상, 미당문학상 등 무려 7개나 운영되고 있다. 이 중 동인문학상은 가장 먼저 제정되어 친일 문인 문학상의 ‘원죄’로 지목된다. 제1회 동인문학상 심사위원 9명 가운데 김팔봉, 백철, 최정희, 이무영, 정비석, 이헌구가 친일 문인 42인에 포함된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문학평론가 오창은은 친일 문인 문학상은 수상자와 심사위원에게 “친일 행적에 관대한 입장을 취하겠다는 ‘암묵적 계약서’에 도장을 찍”게 한다는 점에서 위험하다고 지적했다. 특히 조선일보(동인문학상), 중앙일보(미당문학상), 한국일보(팔봉비평문학상) 등 중앙 일간지들이 친일문인 문학상 운영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다는 점은 경계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언론사가 ‘친일 문인 문학상’ 운영에 자신의 조직력을 동원함으로써 마치 문인들에 대한 사회적 승인 기구인 양 행세하는 것은 더 큰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보작을 거부한 황석영, 공선옥, 고종석
그러나 우리에겐 작가들의 수상 거부의 전례가 많지 않다. 지난해 친일 음악가로 알려진 홍난파를 기려 제정한 ‘난파음악상’이 제정 46년 만에 두 음악가에 의해 수상이 거부되는 일이 있었지만, 이는 매우 특수한 예다.
동인문학상의 경우 2000년과 2001년에 걸쳐 작가 황석영과 공선옥이 각각 후보작이 되는 걸 거부했다. 2003년에는 소설가 고종석이 같은 방식으로 수상 후보작을 거부했다. 그러나 이 거부는 현대문학에서의 동인의 위치뿐 아니라, 문화 권력으로서의 《조선일보》에 대한 반대가 강했던 것으로 보인다.
최근 다시 동인문학상 폐지를 요구하는 시민사회의 요구가 거세어지고 있다. 2018년 10월, 한국작가회의와 민족문제연구소는 ‘문단의 적폐, 친일 문인 기념문학상 이대로 둘 것인가’라는 제목으로 세미나를 열고 동인문학상 폐지를 촉구하면서, 폐지 이전에라도 개별 문인들이 이 상의 심사와 수상을 거부할 것을 주문한 것이다.
문학은 모국어를 통해 민족의 고유한 정서와 사상, 세계관을 드러내는 예술이다. 내로라하는 시인, 작가들이 일제의 식민지배를 추인하고 거기 직간접적으로 협력한 것은 피치 못할 정황을 고려하더라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에서 김동인이 친일 반민족행위를 했다고 결정하자 그의 아들이 이에 불복하는 소송을 냈다. 그러나 재판부는 김동인이 《매일신보》에 글을 게재한 횟수가 11회에 이르러 ‘전국적 차원에서 징용을 주도적으로 선전, 선동했다’라고 판시했다. 또 소설 『백마강』의 내용도 친일 행위의 직접적 증거로 보았다.
김동인은 어쨌든 한 시대의 우리 현대소설 문학을 이끌어온 이다. 그의 작품 가운데 단편 「감자」는 만만찮은 성취를 자랑하는 작품이다. 그는 평론과 풍자에 능하였으며 한때 문인은 글만 써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기도 했다. 그런 작가를 소설 대신 낯간지러운 친일 부역의 글쓰기로 빠지게 한 역사는 얼마나 짓궂은가.
김동인은 단편 「붉은 산」(1932)의 삵, 회심한 망나니 정익호를 통해 원초적 민족주의를 그렸고 「세이간의 길」과 「백마강」을 통해 내선일체, 황민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이 김동인과 히가시 후미히토(東文仁) 사이의 간극, 그것이 우리 슬픈 비극의 현대사, 문학사라는 사실을 새삼 확인하는 시간은 참 씁쓸하기만 하다.
원문: 이 풍진 세상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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