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이 서로 만나 정신적 교감 및 육체적 결합을 해온 것은 계속 있어온 일이다. 하지만 ‘그 과정을 어떻게 인식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특히 전근대사회에서는 비록 애정이 있을지언정, 그것은 도덕과 결혼이라는 틀에서 별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점에서 근대의 ‘연애’ 관념은 특색을 가진다. 도덕과 결혼과 연애라는 것이 별개의 가치로 독립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실천-향유하는 ‘개인’자체가 중시되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연애’ 자체는 개인이 가진 감정, 자유 등의 문제와 결합하여 그 자체가 ‘근대성’을 가진 기제로서 작동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서구문물을 수용하여 근대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것이 지상과제였던 식민지 조선에서는 더욱 특별한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
연애, 불안한 출발과 과한 의미부여
서구에서 도입되어 일본에서 ‘연애’라는 말로 완성된 단어 자체는 이인직의 소설 등에서 이미 소개되었지만, 그것이 번역어 혹은 도입개념 이상으로서의 수용에 급급했을 따름이었다. 그러나 1910년대에 들어서 점차 ‘개혁’과 ‘개조’의 담론과 결합됨으로서 파급력을 가지게 되고, 또한 지식인들 사이에서 단순한 호색(好色)의 개념을 넘어선 독립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인식되어 갔다.
특히 연애를 결혼과 연계하여 사회발전의 기조로 인식하는 엘렌 케이(Ellen. K. S. Key)의 사고는 1915~1920년대 일본과 조선에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는 다음과 같은 논리를 따른다.
1. 사회-민족-인종의 개량은 우수하고도 정서적으로 안정된 인간을 만듦으로 가능하다.
2. 그것은 사랑으로 인해 감정적 충만이 가득한 가정의 상태에서 가능하다.
3. 따라서 사랑과 감정적 충만을 개개인이 느낄 수 있도록 하려면, 그것은 연애에 근거한 결혼에 의해 성립된다.
4. 그 연애는 육체적인 열정과 함께 정신적인 숭고함이 함께하는 영육일치(靈肉一致)적이어야 한다.
이러한 논리는 건전한 가정에서 건전한 인간-사회가 나온다는 전제를 공유한다는 점에서 결혼-가정을 중시하던 전통적인 사유와 ‘접합’되면서도 새로운 의미를 부여할 수 있었다. 즉 개인 단위의 주체적인 행동과 감정적 만족이 중시되면서도, 그 자체가 독립적인 가치를 가진다는 근대적인 ‘연애’가 저항을 최소화하며 합리화될 수 있는 공간이 주어진 것이다.
또한 연애 자체를 단순한 연애가 아니라 사회개혁의 프로그램이자 개인 해방의 중요성을 가진 것으로 해석하였기에, ‘사회의 근대화’와 ‘개인의 해방’을 동시에 의도해야 했던 식민지 조선 사회에서는 양자를 충족시켜주는 것으로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근대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연애의 의미
이에 송진우(1915), 노자영(1921) 등에 의해 ‘연애’ 자체가 숭고한 성격의 것으로 해석되며 결혼과 사회의 주요한 전제로 강조되었다. 이광수의 작품(「윤광호」,『청춘』13, 1918)에서는 ‘연애’를 ‘영육일치’의 성격으로 해석하면서 연애의 시작이 곧 개인의 자각으로 해석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기인했다.
1910년대 말~1920년대에는, 연애를 반드시 사회발전의 수단으로만 여기지는 않고 개인의 행복을 더 강조하여 바라보는 조류 역시 상당했다. 그러나 종래의 담론에서 연애 자체를 하나의 숭고함을 가진 것으로 보면서 영육일치의 것으로 간주하는 사고가 완전히 불식되지는 않았다.
오히려 연애가 가지는 열정은 ‘참 자아’를 내면으로부터 꺼내는 기제이자, 그렇게 꺼내진 참 자아는 연애라는 숭고한 과정을 위해 헌신함으로서 자신에게 강요된 외적 기제와 맞서기도 하며, 그런 자기 자신의 능동성을 발견해가는 ‘자기 실천’의 장으로 간주되었다.
때문에 종래의 ‘영육일치’라는 관점은 ‘자기 발견-실천’이라는 정신적인 숭고함과 결합되어 그것이 더 중시되는 양상으로 나아가게 된다. 때문에 1920년대 김동인, 나도향, 전형택 등의 조선 지식인들에게 있어서 ‘연애’는 단순한 남녀지사가 아니라 ‘참사랑’ 혹은 ‘영의 융합’을 통해, 자신의 개성과 자유 그리고 능력을 표출하는 장으로 ‘예술’의 영역과 동렬에 놓였다.
이러한 연애관은 조선사회가 아직 보수적이라는 현실과 맞물려, 연애를 추구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보수적인 사회와 맞서 해방을 추구해 나가는 것이며, 또한 그러한 보수적인 사회의 거대한 압력과 싸워나가는 자신을 발견하고 스스로 도취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주기도 했다.
즉 연애를 통해서 자신을 해방하면서도 동시에 사회를 개량-변혁해 나갈 수 있다는 생각은 일관된 흐름으로 존재하면서, 개인이 중심이 된다는 것은 오히려 더 증폭된 면이 있었다. 이러한 조선 지식인들의 꿈은 과연 이루어졌는가?
시작된 연애, 터지는 타자와의 갈등
근대라는 시공간은 ‘개인’ 혹은 ‘자아’가 드러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자신이 수많은 다른 자아, 즉 타자를 마주하고 관계를 맺어나가는 시공간이기도 했다. 즉 자기 못지않게 개성과 권리를 추구하는 타자와는 물론, 자신이 겪지 못한 수많은 사람들이 만들어나가는 외부적 세계와도 대면하게 됐다. 근대적 기술-제도의 발전과 도시생활은 그러한 타자와의 마주침을 가속화시키켰으며, ‘연애’의 성립도 이 가운데에서 가능했다.
그런데 독자 여러분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이 시기의 연애담론이란 것은 철저하게 ‘자기중심적인 사유’에 근거하고 있는 성격을 가졌다. 즉 연애하는 상대방에 대한 탐구와 존중, 연애환경을 둘러싼 사회적 구조와 환경의 문제보다는, ‘연애를 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선망과 도취의 시각이 보다 우세했다. 이는 ‘영육일치’담론과 결합되어 자기자신의 발견-실천이라는 ‘정신적 숭고함’에 보다 더 비중이 주어짐과 비례했다.
막상 1920년대 중반에 들어서 연애란 것을 해보니, 정작 자기실천이라는 정신적 가치-숭고함 따위와는 거리가 있었다. 우선 향유자 자신이 과연 정신적 가치를 우선시할 수만은 없었다. 또 그것을 연애의 주요한 전제로서 유지할 수 있는지에 대한 확신도 상실되었다. 여기에 기존의 사회가 가지는 무게는 강고한 성격의 것이었으며, 단순히 연애를 하는 자기 자신의 실현만으로 바뀔 수 있는 성격의 것도 아니었다.
그러한 가운데에서 자신(특히 남성 지식인이 주를 이룬)의 숭고함과 정신적인 가치 구현을 위협하는 존재는 단순한 세상의 억압뿐만이 아니라 그의 파트너의 문제, 즉 자신이 아닌 타자로서의 여성의 문제로 인식되기에 이른다. 즉 여성들도 연애를 자기해방의 통로로 간주하여 ‘자기표현’이 육체적 요구와도 불가결한 관계를 맺게 됐다.
이에 따라 여성들의 자기표현이 남성 지식인들의 우월성에 도전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동시에, ‘연애’와 그를 통한 자신들의 영적-정신적 실천과 숭고함-순수성도 해치는 것으로 간주됐다. 김동인은 『약한 자의 슬픔』에서 ‘강엘리자벳’이라는 여성 인물을 등장시켜 ‘연애’가 육체적 쾌락에 이끌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꼬집으면서도, 그 육체적 쾌락에 지배되는 것은 여성으로 설정하는데. 이는 이러한 당시 시대 인식을 잘 보여준다.
단눈치오 作 ‘죽음의 승리’에서 읽는 연애의 참극
이러한 가운데에서 조선의 지식계에 소개되었던 것은, 파시즘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던 단눈치오(Gabriele D’Annunzio)의 작품이었다. 특히 그 가운데서 『죽음의 승리(Frionfo Dolli Morte)』는 조선 지식인들에게 열광적인 호응을 얻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매력적인 유부녀 이폴리타와 관계를 맺고 있는 이지적인 청년 조르지오는 보수적인 가정 분위기와 이혼이 허용되지 않아 이폴리타와 궁극적으로 맺어질 수 없는 한계 속에서 절망하고 고뇌한다. 이러한 고민하는 자아를 안고 이폴리타와 여행을 떠나기도 하고 여러 시도를 해보지만 이폴리타는 자신의 정신적 고뇌보다는 육체적 요구를 더 우선시한다.
이에 그는 육체적 욕구에 휩싸이면서도, 갈수록 처음에 사랑했던 이폴리타의 모습과 그녀와의 정신적인 교감이라는 점에서 멀어져가고 있다고 느끼며. 결국은 사랑하는 그녀의 모습을 영원히 간직하기 위해 그녀의 저항에도 불구하고 그녀와 함께 절벽에서 동반자살한다.
한명의 남성 청년이 파트너가 왜 자신에게 그것을 요구하는지에 대해서도 묻기보다는, 상대방이 점차 자신이 생각하던 정신적 연애 및 이상형과 멀어지는 그러한 상황을 견디지 못해 아름다운 순간을 영원히 간직하겠다며 지 혼자 죽지 못하고 남까지 끌어다 죽는다는 이런 병맛스런(…) 설정이 1920년대 중반 이후 조선 사회에서 왜 인기를 끌었던 것일까?
이는 월탄 박종화의 감상문(「영원한 승방몽」, 『백조』, 1921)에서 구체화된다. 여성들의 육체적 요구로 대표되는 ‘자기표현’에 시달리면서(?) 자신들이 생각하던 정신적 숭고함이란 점차 찾아가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와중에. ‘죽음을 통한 자기표현’ 자체는 개인이 가진 용기의 소산으로 간주된 것이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과 그녀를 사랑한 자기 자신의 모습을 간직하기 위해 죽음을 택한 것은 종래 연애담론이 가지고 있던 영적 사랑, 즉 ‘참된 사랑’을 지키려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던 것이다.
다시 말하면 계속해서 연애를 타자와의 대화-존중보다는 자기실천과 표현의 장으로 인식하는 사고는 ‘타자와의 충돌-세계와의 불화’를 적극적으로 대응하며 스스로를 변화하기보다는, 극단적인 선택인 ‘죽음’을 통해 자신의 육체 자체를 소멸시킴으로 자기가 생각하고 도취하는 정신의 성취를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는 정신주의 중시정신승리의 극치를 달리면서도, 자기소멸의 타나토스적 쾌락을 실천함과 동시에, 사랑하는 상대방 역시 자신의 기준-기억 속에 박제해버리겠다는 변태적인 애정(?)으로 변모한 것을 보여준다. 끝까지 연애는 자신의 관념과 실천을 투사하는 장으로 남는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사랑 때문에 죽는다는 ‘정사(情死)’가 낭만화 되고 저항적 관점에서 다루어지던 면은 있었다. 다만 단눈치오 이후의 그것은 종래의 관점을 이용하면서도 ‘완전한 연애’ 및 ‘참된 사랑’을 구현하거나 지키기 위한 것으로 ‘죽음’이 이용된다.)
조선 지식인들이 받아들인 환멸과 도피의 연애관
이러한 단눈치오의 소설은 염상섭, 김동인 등에게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기도 했다. ‘죽음의 메시지’는 박종화의 소설(「죽음보다 압흐다」,『백조』,1923)에서는 애인이 몹쓸 병을 가진 기생이라 완전한 애인관계를 가질 수 없어 내세에서의 결합을 위해 자살한다는 설정으로, 나도향의 소설(『청춘』,1922)에서는 자살한 연적과 가족에 대한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신을 죽여달라는 여성을 사랑하기에 그녀를 죽였다는 설정 등으로 변형되어 나타난다.
이것이 현실에서는 어떻게 나타났는가? 대표적인 것이 1923년에 있었던 강명화의 정사(情死)였다. 원래 자살 전의 강명화는 장병천과 내연의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그 관계는 세상사람들에게 적대받고 있었다. 특히 장병천의 생활이 문란하기 그지없었음에도 오히려 당시의 담론은 강명화에게 ‘매음녀’라면서 학생들이 그녀를 집단폭행한 일도 있었다.
그런데 오히려 자살 이후 그녀를 둘러싼 반응은 “신성한 연애에 희생된 절대 가인”으로 변모했다. 즉 죽음으로써 그들의 사랑이 단순한 육욕이 아닌 정신적 숭고함을 실천하였음을 보여주었다는 것을 강조하는 동시에, 그녀를 탄압하던 사회와 대중담론은 자신들의 가해의 기억을 잊어버린 채 자신들의 연애 모델로서 그녀를 소비하게 됐다.
한편 1928년 2월 19일자 『동아일보』에서는 역시 자살한 정주 오산고보생 길 모군의 모습이 부각됐다. 자살자는 “나는 당신을 위하야 죽는다.”라며 연정 때문에 자살한 것으로 추정되면서도, 미리 사진관에서 유서와 함께 사진까지 찍어 친우들에게 이를 송부하고, 심지어는 자신의 무덤에 쓸 비문과 신문기자들을 위해 준비한 유서까지 있었다. 즉 정사-죽음은 이제 단순한 자기소멸을 통한 숭고의 성취뿐만이 아니라, 도취된 자신을 새롭게 세상에 알리는 장으로까지 인식된 것이었다.
이처럼 사회현실과의 괴리, 상대방의 요구 등을 직면한 ‘자기중심적 연애담론’은, 타자와 대화하고 소통하며 자신을 변화하고 그들과 함께했다. 그러면서 주변을 둘러싼 상황에 능동적으로 맞서기보다는, 극단적인 선택을 감행해서라도 스스로를 도피-보존하려는 것으로 바뀌어나간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나도 극단적이기에 도피라는 진실을 은폐하고, 오히려 용기로 포장되며 낭만화되기에 이른다. 즉 연애는 말 그대로 ‘죽음에 이르는 병’이 된 것이다.
마치며
1930년대의 연애관은 또 이전시대와는 달라졌고, 또한 현재의 연애관은 1910~1920년대와는 당연히 많이 달라지고 다변화됐다. 하지만 연애 자체를 개인적인 개성과 능력을 표현하는 장으로 생각하는 담론은 여전히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 또 연애 자체에 자신의 이상형과 형태-관념을 투영하는 것을 더 중시하여, 파트너와의 관계가 파국에 이르거나 혹은 불행한 관계로 바뀌어가는 모습도 간혹 목격되곤 한다.
물론 요즘 사람들이 당시 지식인들처럼 자기도취를 성취하기 위한 극단적 선택으로 나아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연애를 자기의 능력을 보여주는 장으로 혹은 자신이 바라던 이상형 혹은 형태-관념을 구현하는 장으로만 생각한다면, 굳이 ‘물리적인 죽음’이 아니더라도 스스로 상처와 실망만을 받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의 기억과 관념만을 그대로 안은 채 스스로의 영역으로 침잠하는 ‘사회적인 죽음’에 이를 뿐이 아니겠는가?
그러니 솔로들이어, 크리스마스 하루를 못견뎌 당장 연애해야겠다며. 타자와의 대화와 소통, 그리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에의 고민을 실천할 각오가 없이, 자신이 바라는대로만 하고 싶을 요량이라면. 엉뚱한 타자들을 고생시키고 스스로의 사랑을 불행한 형태로 만들어가느니. 차라리 집에서 케빈과 정겨운 시간을 보내기를 권유하는 바이다. (도주)
참고자료
권보드레, 「1920년대 초반의 사회와 연애」,『근대를 다시 읽는다』2
김지영, 『연애라는 표상』
정혜영, 『식민지기 문학과 근대성』
한성철, 「단눈치오의『死의_勝利』와 김동인의 『마음이옅은者여』의 비교연구」
한성철, 『1920년대 한국문학에 끼친 이탈리아 데카당스 영향 연구』
『東亞日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