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비석(鄭飛石, 1911~1991)은 40대 이하의 독자들에겐 좀 낯선 작가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1930년대에 단편소설 ‘졸곡제(卒哭祭)’와 ‘성황당’으로 정식 등단한 소설가다. 그는 이른바 미문(美文)으로 널리 알려진, 6·70년대 고등학교 국어교과서에 실린 금강산 기행수필 ‘산정무한’의 지은이이기도 하다.
정비석은 1911년 평안북도 의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하동, 본명은 서죽(瑞竹)이다. 필명으로 비석생(飛石生)·남촌(南村) 등을 썼는데 본명 대신 스승인 김동인이 지어주었다는 필명 ‘비석’으로 활동했다.
1929년 6월 신의주중학교 4학년 때 ‘신의주고등보통학교 생도 사건’으로 검거되어 1930년 12월 신의주 지방법원 형사법정에서 치안유지법 위반과 제령 위반 불경죄로 징역 10월 집행유예 5년을 선고받았다. 이때만 해도 자못 식민지 소년다운 패기가 넘쳤던 모양이다.
이후 일본 히로시마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한 후, 도쿄의 니혼(日本)대학 예과에 들어갔다. 니혼대학 재학 중에 <프롤레타리아신문>에 편지체 단편소설 ‘조선의 어린이로부터’를 응모해 당선됐다. 1932년 니혼대학 문과를 중퇴한 뒤 귀국했다.
그는 국내에서는 1935년 1월 <매일신보>에 콩트 ‘여자’를 발표하면서 등단했다. 같은 해 7월 <조선문단>에 시 ‘도회인에게’를 발표했다. 1936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졸곡제’가 가작으로 뽑혔고 이듬해에는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단편 ‘성황당’이 1등으로 당선됐다.
그의 친일 부역행위는 1940년에 <매일신보> 기자로 들어가면서부터 시작되었다. 같은 해 10월, 정비석은 조선문사부대(朝鮮文士部隊) 자격으로 조선문인협회가 주최하는 육군지원병훈련소 1일 입소 행사에 참가했다. 이 행사를 마치고 발표한 소감문에서 그는 육군지원병제와 훈련소 입소를 미화했다.
“지원병 제도야말로 성상이 반도 민초에 베푸신 일시동인의 결정”
군지원병 훈련소를 견학하고 나는 성덕(聖德)의 무궁함을 깨달으면서 다음과 같이 감상을 느끼었다.
1. 전 조선 청년들이 모두 한 번씩 훈련소 문을 거쳐 나오는 날이면 조선에는 새로운 광명이 비칠 것이다. 지원병 제도야말로 성상(聖上)이 반도 민초에게 베푸신 일시동인의 결정임이 틀림없다.
2. 스파르타식 교육이 없었던들 저 희랍문화가 그토록 찬란히 개화할 수 있었을까.
3. 고래로 문인은 약질인 것을 무슨 자랑거리처럼 삼아 오던 그릇된 인식을 우리는 하루바삐 시정해야 하겠다.” – ‘반도민초(半島民草)에 일시동인(一視同仁)’(<삼천리>1940. 12)
일시동인(一視同仁)이란 “멀고 가까운 사람을 친함에 관계없이 똑같이 대하여 준다는 뜻으로, 성인이 누구나 평등하게 똑같이 사랑함을 이르는 말.”이지만 그의 글에서 ‘성인’은 곧 일왕이다. 그는 조선인에게 지워진 병역의 의무를 일왕이 베푼 은혜로 인식하면서 전사한 조선인 지원병과 그 유가족의 애국심을 찬양했다.
“병역의 의무를 갖지 못한 사람들은 전몰 유가족이라는 명예를 차지할 자격이 없다. 한나라의 국민 된 자로 그 나라의 은혜 밑에서 살아가면서 제 나라를 위하여 정의의 칼을 뽑을 자격을 못 가졌다는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일까.
한번 주먹을 들어 내리 갈기면 무쇠라도 부숴버릴 만한 끓어오르는 정열과 억센 힘을 가진 청년으로서는 그것은 다시 없을 수치일 것…스물세 살로 국가를 위하여 목숨을 바쳤다는 것은 얼마나 숭고한 일인가.” – ‘영예의 유가족을 찾아서’(<매일신보> 1943. 1.15.)
정비석은 1942년부터 이듬해까지 채만식·이무영 등과 함께 만주국 간도성의 초청으로 조선문인협회가 파견한 재만 조선인 개척촌 시찰단에 참가했다. 시찰 후에 그는 ‘간도성 시찰 작가단 보고’를 통해 일제의 ‘지원병제’를 선전했다.
“젊은이는 후방은 물론 자진해서 군인이 되고 싶어 하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북쪽 변방의 수비는 자신들이 맡겠다는 기백에 불타고 있는 것입니다. 참으로 든든한 생각을 하게 됩니다.” – ‘간도성 시찰 작가단 보고’(<녹기>1943.2)
그는 일제의 침략전쟁과 전쟁동원을 긍정하는 데 그치지 않고 ‘모든 문학과 문화가 오직 전쟁 승리를 위한 도구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했다. 조선문인보국회 소속으로 제1회 조선군 보도연습(조선군이 전 조선의 출판·문예 등 문화계 전반에 걸친 문사를 동원해 이른바 ‘보도전사’로서의 자질을 닦도록 훈련시키는 과정)에 참가한 뒤에는 조선인의 군 입대를 독려했다.
“우리들이 지금 국력을 기울인 성전(聖戰)의 와중에서 생활하고 있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치면, 헛되이 휴머니티 따위를 외치고 있을 수 없게 된다. 일단 싸우기 시작했으면 무엇보다도 전쟁에 이겨야 한다.
전쟁의 의미는 승리에 있다. 오늘날 문화정책이 허용된다고 한다면 그것은 승리를 위한 무기로서의 문화이지 않으면 안 된다.……내가 살고 싶은 곳은……이 지구상의 단 한 곳 낙원 일본이 아니면 안 된다.” – ‘국경’(<국민문학>1943.4)
“지원병 출신 병사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는 동안에 나는 문득 ‘병영은 군대가 살고 있는 처소일 뿐만 아니라 진실로 인간 수업의 도량’이라는 것을 절실히 느끼었다. 지금까지 우리 반도인과 군대와는 너무나 인연이 멀었다.
그러나 명년부터는 우리 주위의 청년들에게도 군문에 들어갈 수 있는 광영이 베풀어졌다. 우리는 우리에게 베풀어진 지상 최고한 명예를 외람되게 함이 없도록 해야 할 것” – ‘군대생활’(<신시대>1943.7)
‘열렬한 국가의식’ 아래 시국에 눈을 뜬 지식인
그의 친일 행위는 당연히 문학 작품 활동으로도 이어진다. 그가 <국민문학>(1942.2)에 발표한 단편 ‘한월(寒月)’은 고장 난 버스를 타게 된 승객의 운명을 ‘대동아전쟁’에서 홍콩에 잔류한 일본인의 운명과 비교하면서 ‘대동아공영권 확립’을 위한 자세를 역설한 작품이다.
주인공 ‘나’가 딸을 데리고 고향에 다니러 가던 도중에 목탄 자동차가 고장이 난다. 운전수가 새 차를 가지러 평택으로 돌아간 동안 좁은 주막집에서 ‘나’는 승객들에게 이야기한다. 저번 홍콩이 함락할 때 일본인 잔류민들이 좁은 방에 모여서 침착히 영미인의 박해와 싸워 나간 사실을 실례로 들어가면서, 대동아공영권을 확립하려는 자신들에게는 이런 경험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것을.
단편 ‘순정(純情)’(<반도의 빛>1943.11)에서는 ‘총후’ 생산현장에서 열심히 일하며 사랑을 나누는 모범 청춘남녀의 모습을 형상화했다. 이 작품에는 일본 ‘내지’의 출정군인 가정으로 파견돼 그 군인을 대신해 농사일을 돌보는 임무를 맡은 ‘농촌청년보국대’(끔찍하게도 이런 방식의 노동력 수탈도 있었다.)가 나온다. 이들 조선 청년들은 ‘총후의 전사’로 칭송을 받았다.
그는 또 농촌 생산현장의 ‘총후보국(统後報國)’을 독려하면서 지식인의 분발도 촉구했다. ‘지식인’(<동양지광>1942.7)에서 과거에는 ‘숨 쉬는 편리한 농기구’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농민이 ‘열렬한 국가의식’ 아래 새로 태어났다고 칭송했다. 그는 ‘놋쇠제품 헌납운동’에 참여하고, 쌀 절약을 위해 모내기 때에도 도시락을 싸 오고, 생산 확충을 위해 밤잠도 안 자며 가마니를 짜는 등의 모습을 보여 주는 농민과 견주어 이제 간신히 시국에 눈을 뜬 지식인이 부끄럽다고 자책하기도 했다.
단편소설 ‘산의 휴식’(<신시대>1943.4~5)에서 정비석은 침략전쟁 상대국인 미국과 영국의 사상을 비난하는 형식으로 스스로 ‘문필보국’을 실천했다. 이 소설에서는 미영 사상의 하나인 기독교적 내세관을 버리고 신체제와 동양정신에 눈떠 가는 기독교인을 그렸다.
미션스쿨에서 일하는 기독교인인 소설의 주인공은 “결국 미션 스쿨이란 것은 신체제가 아니잖아요. 예수교 같은 것은 양놈들의 위선의 껍데기예요.”라는 상대의 공격적 발언과 설득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는 “나는 갑자기 잠을 깬 느낌이었다. ……뒤돌아보건대 우리는 그런 것(내세에서 영원의 낙원을 구하는 일)을 위하여 얼마나 많은 생활을 희생하였고, 또 국민으로서의 의무를 얼마나 게을리 해 왔던 것일까.”하는 깨달음을 얻는다는 이야기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정비석이 <방송지우>(1944.2)에 발표한 ‘산본(山本) 원수’는 정비석 친일 부역 행위의 정점을 찍는 것이었다. 그는 1943년 4월 미드웨이 해전에서 전사한 일본 해군제독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五十六) 원수를 따라 침략전쟁에 목숨을 바칠 것을 선동했던 것이다.
“진두 지휘는 우리 제국 해군의 전통적 무사 정신이었거니와 태평양 상에서 호국의 꽃으로 떨어지게 된 것도, 산본 원수 자신으로서도 본망(本望)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산본 원수의 기상전사(機上戰死)를 헛되이 하여서는 아니 된다.
이제야말로 1억 군민은 야마모토 정신을 정신으로 하여 최후의 승리를 얻을 때까지 미국을 쳐 물려야 한다. 오직 그 길만이 야마모토 원수를 참마음으로 앙모(仰慕)하는 길인 것을 일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야마모토를 따르자는 그의 사자후에도 불구하고 일제는 패망했고 조국은 해방이 되었다. 동포 청년들을 침략전쟁에 목숨 바치라고 선동했던 식민지 지식인에게 해방은 어떤 의미로 다가왔을까.
해방 후 그는 신문 기자, 잡지사 주간 등을 맡으며 <소설작법> 등 몇 권의 책을 펴냈다. 한국전쟁 중에는 육군 종군 작가단으로 활동했다. 그때, 일찍이 조선문인보국회 소속으로 ‘조선군 보도연습’에 참여했던 ‘보도전사’의 기억은 그에게 부끄러움이었을까, 자랑이었을까.
해방 후에는 대중작가로
해방 후 그는 대중작가로 전신, <청춘산맥>, <장미의 계절>,<세기의 종(鐘)> 등 숱한 통속소설을 펴냈다. 특히 <서울신문>에 연재(1954.1~8)된 뒤 정음사에서 펴낸 <자유부인>은 한 대학교수 부인의 일탈을 통해 자유주의적이면서도 향락적인 서구 문화에 물든 당시 풍속을 파격적으로 묘사해 사회적으로 큰 논쟁을 불러일으켰다.
그는 <낭만열차>·<유혹의 강(江)>, <여인백경(女人百景)>, <명기열전>, <소설 손자병법>과 <소설 초한지> 등 정력적으로 작품활동을 하면서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부위원장, 방송윤리위원 등을 역임했다.
정비석은 1991년 10월에 향년 80세로 사망했다. 그는 2002년 공개된 친일 문학인 42인 명단에 올라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문학 부문에 수록되었다. 그는 또 친일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4인 명단에도 포함되었다.
일찌감치 대중작가로 전신해 버렸기 때문인지 그는 해방 후 문단의 주역은 되지 못했다. 그래서였든 아니든 친일행위에 대한 비판으로부터 얼마간 비켜 있었던 것은 그가 만년에 누린 행운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출처 : 이 풍진 세상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