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지도교수님을 잠깐 뵙고 대화할 일이 있었다.
직장을 지방 전문대 쪽으로라도 옮겨보지 그래?
나는 대학원 졸업 후 3년 차인 동시에 아직까지 졸업 전과 다름없는 무능한 모습으로 비쳤다. 안정적이면서도 나태하게 3년을 흘려보낸 것 같았다. 잠깐의 대화였지만 순간 내 모습이 너무나도 한심스럽고 초라하게 보였다. 물론 내가 어떻게 지내왔는지, 어떻게 해나가는지 잘 모르고 하시는 말이었지만 온몸에 힘이 빠져나가는 것 같았다. 매일 성장을 위해 뭔가 열심히 해온 것 같은데 정작 현실의 나는 너무나도 조그맣다.
당신은 용기 있는 사람입니까?
진정한 용기란 어떤 것일까? 나는 더 큰 발걸음을 위한 변화를 수용하고 실행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내 안의 어둠과 치부, 약함 등을 외면하지 않고 바로 바라보고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변화하고 성장하기 위한 한 걸음을 내딛는 데는 용기가 필요하다. 그리고 그 발걸음을 지속해 주어진 매일과 나의 모습을 어제보다 더 발전해 나가는 끈기를 위해서도 용기가 필요하다. 그런 면에서 볼 때 나는 변화를 시도하긴 하지만 지속할만한 끈기가 부족하다. 여전히 변화는 너무 멀고, 어렵게 느껴진다.
평생 심각한 정신질환을 겪고 삶의 피폐함이 극으로 치닫는 사람에게도 변화의 희망이 있을까.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의 저자 벨라 마키는 어려서부터 평생을 정신질환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급기야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질 지경에 이르며 이혼까지 당한다. 그녀에겐 혼자서 바깥공기, 거리, 사람들을 대하는 것조차 힘겹고 두렵다. 이러한 그녀가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배운 건, 바로 달리기를 통해서다.
아, 이 이야기가 뻔한 해피엔딩은 아니다. 오히려 누구에게나 있는 ‘게으름 관성’과 ‘변화의 어려움, 두려움’에 대한 지극히 현실적인 이야기를 다룬다. 하지만 누구에게나 어려운 ‘변화’를 수용하고, 한걸음 내디뎌 지속하는 힘을 기를 수 있다면, 이것이 인생의 기울기를 바꾸는 계기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모두가 겉으로 아무렇지 않은 척 할 수 있다. 하지만 고통받는다.
나는 주기적으로 불안하다. 나의 생존뇌는 스트레스에 민감했고 어떨 때는 모든 걸 포기하고 싶은 무기력의 수렁에 빠지기도 한다. 교수란 권위자의 힘 빠지는 몇 마디 말만 듣고도 온몸에 힘이 쭉쭉 빠지고, 미래의 불안정함이 두렵다. 실제로 많은 사람이 산더미 같은 불안, 부채, 박탈감을 끌어안고 많은 귀한 시간을 근심과 공포 속에서 보낸다.
원래 ‘완전함’과 ‘완벽함’은 사람에게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고 하지만 사람은 너무 불완전하고도 불완전하다! 계속해서 흔들리고 상처받고 고통받는다. 겉으로는 알 수 없어도 우리의 대부분이 불안을 경험한다.
불안은 복잡하고 어지럽고 암울한 것이다. 이는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칠 줄 모르는 강박 사고, 기력을 고갈시키는 강박 행동, 끔찍한 생각, 육체적 불쾌감, 깊은 슬픔을 동반한다. 불안은 끈질기게 따라붙어 인생을 쥐고 흔든다. 파티장에서도, 직장에서도,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간 휴가지에서도, 안전한 침대에서도 항상 곁을 맴돈다.
- 벨라 마키,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하지만 정신질환자가 경험하는 불안의 수준은 보통 사람의 것과는 다르다. 이들의 뇌의 신경전달물질이나 호르몬, 유전자 등의 문제로 인해 뇌 신경계의 메커니즘이 보통 사람의 것과는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인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거나 휴식을 잘 취하면 ‘회복탄력성’을 발휘해 원래의 정서 상태로 되돌아간다. 누구나 불안하다고 종일 반복된 강박 행동을 하거나 집 밖을 한 발짝도 못 나가거나 하진 않는다. 하지만 정신질환자들이 경험하는 불안의 깊이, 길이(시간), 영향은 이들의 인생을 통째로 쥐고 흔들어버린다.
불안이란 놈은 영악하게도 어떤 증상에 좀 익숙해졌다 싶으면 또 다른 증상을 던져 놓는다. 그것도 이전보다 더 지독한 놈으로. 해리는 느닷없이 온 세상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지는 증상이다. 아니, 이 정도로는 그 무시무시함을 다 표현할 수 없다. 단순히 주변 세상이 비현실적으로만 느껴지는 게 아니라,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전부 가짜로 보이고, 내가 사는 집이 영화 세트로 느껴지며, 반려견이 무생물 같고 내 얼굴이 남의 얼굴 같다. 모든 게 연극의 한 장면 같고 잘못된 것 같고 나와 동떨어진 기분이 든다.
- 벨라 마키,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정신질환이 얼마나 사람을 피폐하게 만들고 삶을 좀먹는지 텍스트를 통해 간접적으로 접한 나에게도 꽤나 충격적이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이들은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어 살아간다. 정신이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을 내가 털끝만큼이라도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다고 말하는 건 오만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의 크기는 타인의 것과 비교 불가하지만 가끔 우울하고 불안한 감정에 불평한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정신병 환자는 끔찍한 증상에 시달린다. 환각이 끊이지 않고 가파른 계단과 타오르는 불길이 나오는 꿈으로 만신창이가 된다. 이들은 이와 같은 상태로 세상과 단절되어 살아간다. 나는 조현병의 공포를 상상했다. 죽을 때까지 학대당하는 기분을, 너무나도 강렬하고 선명해 정신을 갈기갈기 찢었던 피해망상을 떠올려봤다. 언제나처럼 오싹한 상상이었다.
- 로렌 슬레이터, 『블루 드림스』
이들에게 스스로의 상황을 벗어나기 위한 의지나 노력의 문제를 논할 수 있을까? 조절되지 않은 뇌 신경계를 탓하고 운이 좋으면 좀 나아질 때를 무기력하게 기다리며 살아야 할까?
육체적 활동이 주는 혜택
일반적인 정신질환의 치료에는 전문가와의 상담, 약물, 명상 등이 있다. 실제로 많은 치료가 약물을 통해 이루어진다. 하지만 정신질환치료제로 불리는 약물은 현재까지 효과와 부작용이 함께 보고되며, 치료 기전에 대한 명확한 보고가 되지 않은 실정이다. 물론 효과를 보는 사람도 있지만 복용자의 뇌의 화학적 불균형을 더욱 유발하고 약물 내성으로 결국엔 더 헤어나오기 힘든 악순환으로 내모는 사례도 대다수 관찰된다.
달리기. 저자는 이미 수십 년간 정신질환으로 삶이 온전하지 않았다. 아마 치료를 위해 어떤 방법도 마다하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질환의 증세는 점점 극으로 치닫았고 갈수록 삶은 고통과 슬픔의 깊고 깊은 수렁 그 자체였다. 그러던 저자가 우연히 달리는 동안에는 별로 슬프지 않고, 불안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었다.
육체적 활동을 통한 정신질환의 치료가 가능할까? 실제로 뇌는 움직임을 좋아한다. 우리의 모든 사고와 정신 작용을 지배하는 뇌 신경계는 놀랍도록 신체와 연결되어있어서 ‘신체의 움직임’에 반응한다. 멀티테스킹이 어려운 뇌의 구조로 인해 신체적 활동에 집중했을 때 정서적 불안이나 장애가 줄어들 수 있다.
최근 연구는 인지기능에 장애를 가진 사람 또는 노인이 운동하면 뇌에서 집중력과 관련된 전두엽 영역 활발해짐을 보고했고, 동물 연구에서는 운동할 때 기억과 학습을 담당하는 해마 영역의 신경세포가 새로 형성됨을 보고했다. 일단 해마는 기억, 사리 판단, 감각을 종합해 주변 상황에 적절한 감정반응을 보이게 하는 부분이며, 특히 만성 스트레스에 시달리거나 정신질환이 있는 사람들의 경우 해마 영역의 활동이 크게 위축된다. 신체활동은 해마 영역을 비롯한 뇌 신경계의 회복에 영향을 미친다.
처음 달리기를 했을 때 너무 호흡이 가쁘고 심장이 튀어나올 것 같아 다른 생각은 할 겨를조차 없던 게 기억난다. 그러다 폐활량이 늘어나고 하지 근육이 어느 정도 달리기에 적응하면 노면을 탁탁 차는 두 발의 리듬, 호흡에 집중할 수 있고 다른 어떤 걸 별로 신경 쓰이지 않는다. 있던 걱정들도 머릿속에서 말끔히 사라져버린다.
그래서 기분이 좀 나아졌냐고? 아니.
달리는 게 재밌었냐고? 아니.
하지만 최소한 15분 동안 울지 않았다는 것만으로도 대단한 성과였다.
- 벨라 마키, 『시작하기엔 너무 늦지 않았을까?』
하지만 그때뿐이다. 달리기와 육체적 활동으로 인해 엔돌핀이 형성되는 등 달리기로 인한 쾌감인 러너스하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이것이 인생을 통째로 바꿀 만큼 강력하진 않다. 이것을 지속하고 삶의 긍정적인 습관으로 지속하고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의식적인 노력과 자신과의 싸움이 요구된다. 여기서 또 변화는 어렵다는 것을 한 번 더 깨닫는다.
한편으로 운동량이 부족했을 때 초래하는 것들은 꽤 심각하다. 대부분 남아와 여아의 운동량의 격차는 심각하며,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면 운동량의 40%이가 감소하고, 적당한 운동량의 14세 여학생의 비율은 12%에 그친다. 일반적으로 강박장애는 20살 이전에 발병하는데, 심각한 우울증과 불안증은 청소년기의 막바지, 청장년기의 초기에 나타나며 여성에게서 더 발생확률이 높다(미국 통계).
우리나라의 경우는 어떨까? 2018년도까지 통계를 봐도 남성에 비해 여성이 월등히 우울증 발병률이 높다. 물론 이 현상에는 수많은 요소가 관여하기에 ‘신체활동량 부족’과 정신질환 발병에 명확한 인과관계가 있다고 볼 수는 없다. 하지만 우리의 뇌는 분명 움직임을 좋아함을 많은 연구 결과의 근거가 뒷받침한다.
또한 육체적 활동은 우리들의 발전 가능성을 체험하는 가장 좋은 수단이기도 하다. 한 번 뛰는게 어렵지, 지속만 할 수 있다면 숨가쁨이 줄어들고, 주변 경치가 눈에 들어오고, 달릴 수 있는 거리가 늘어나고, 기록을 갱신하게 되며, 이것 하나만은 얻어갈 수 있다. ‘나도 할 수 있구나.’ 달리기를 비롯한 모든 신체활동은 꾸준히 한다면 조금씩 늘어간다. 그게 체력이든, 근력이든, 잃어버렸던 몸의 라인이든, 걱정 잊기 기술이든, 스트레스 해소든, 자기규율 능력이든. 삶의 희망이든.
결론적으로 저자는 운동이 모든 것을 해결하는 만병통치약은 아닐지언정, 고통에 대처하는 가장 좋은 기술 중 하나임을 이야기한다. 결국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변화를 시도하지 못하는 자신, 도전을 지속하지 못하는 인내심의 부족인 것이다.
마치며
여전히 누구에게나 변화는 어렵고 매 순간이 두려움과 불안의 연속이다. 하지만 모든 큰일들은 작은 움직임들로부터 비롯되었다. 이 의식적인 노력들을 지속할 힘이 있는 한, 삶의 기울기는 분명 달라질 수 있다. 이제는 지금 나의 위치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고 크게 불안해하지 않으려 한다. 그럴 시간에 나가서 좀 걷고 뛰어야겠다.
원문: Dandelion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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