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19가 확산되던 작년 8월, 코로나 거리두기 2.5단계를 발표하겠다는 뉴스가 나오는 화요일 오후였다. 거리두기가 단계가 격상되면 회사 내 필수인원은 제외하고 재택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오는 셈. 회사 분위기는 각자의 직책에 따라 뒤숭숭했다. 매니지먼트는 어떻게 이 사람들을 이 상황에서 효율적으로 일하게 할 수 있을까 고민했을 것이고, 나머지는… 아마도 이런 생각을 했을 것이다.
코로나는 진짜 싫은데, 재택근무는 하고 싶다…
단계가 올라가면 내일부터 당장 재택으로 전환되기에 나는 돌덩이 같은 회사 노트북을 어깨에 지고 퇴근을 한다. 그렇지만 괜찮다. 노트북이 무겁더라도 그저 재택만 되면 좋겠다는 기도를 하며 집으로 향한다.
집으로 가면서도 내가 왜 재택을 바라는지 진짜 속마음을 들춰보진 않았다. 점심시간에 동기들과 밀폐된 회의실에서 점심을 먹으며 “지금 코로나가 얼마나 심한데, 재택 당연히 해야지! 코로나 진짜 너무 무섭다고!”라며 침 튀기며 말하는 내 모습을 떠올려보면 그저 웃길 뿐.
그래. 재택을 바라는 것이 순전히 코로나 감염의 위험성 때문만은 아니라는 것쯤은 나도 안다. 근데 왜일까. 우리는 왜 회사에 나가서 일하고 싶지 않은 걸까. ‘제발 입사만 시켜주세요’ 하고 왔던 곳인데 말이다.
1. 출퇴근의 늪
일을 하기 싫은 것은 아니다. 나는 일을 선택할 때 내가 좋아하고, 재밌어야만 잘할 수 있는 인간 부류에 속한다. 말은 번지르르하지만 ‘일의 재미’를 따지며 사는 것은 꽤나 피곤하고 고된 일이다. 그냥 ‘일은 일이지 뭐’라고 생각했다면, 내가 지금 회사 밖을 나와 이렇게 자유노동 실험을 하진 않았을 거니까.
하고 싶은 말은 그저 재택을 바라는 게 ‘일하기 싫어’라는 단순한 생각 때문은 아니라는 것이다. 재택은 ‘일을 안 할게요’가 아니라 ‘집에서 일할게요’지 않나. 그중에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게 바로 ‘출퇴근길에 다 써버리는 에너지’이다.
이런 기사까지 인용하고 싶진 않았지만, 영국과 스웨덴에서는 ‘출퇴근 시간과 행복지수-건강-사망률과의 상관관계’를 꾸준히 연구하고 밝혀왔다. 결과는 당신이 예상하는 그대로다. 집과의 거리가 먼 것이 회사의 잘못은 아니겠지만 일에 쓸 에너지가 출퇴근 길에 낭비되는 것은 사실이다.
출퇴근길에 여유롭게 음악을 들으며 하루를 설계하고, 하루를 마무리하며 사색에 잠기는 드라마 주인공 같은 느낌은 첫 출근 후 2주 만에 다 사라진다. 5년 반을 때로는 야근에, 때로는 집에서까지 아이디어를 내며 광고회사와 스타트업에서 일했던 나에게는 출퇴근은 전쟁이었다. 특히 지옥철에 탈 때면 옆 사람과 부딪히며 닿는 살의 느낌, 실수로 누군가의 발을 밟을까 조심하는 것도, 이제는 감염의 위험성까지 곁들여 그야말로 진 빠지는 시간들이다.
이렇게 겨우겨우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는 아 이제 좀 쉬어볼까 하면 한숨 나오는 아침이 찾아온다. 직장인들이 충분한 휴식을 누리지 못한다는 증거다. 충분한 리프레시가 된다면 맑고 깨끗하고 상쾌하게 일의 기쁨을 누리며 지낼 수 있을 텐데.
어쩌면 우리는 하루 평균 2시간 반씩 이동에 에너지를 다 써가며 일의 능률을 낮추는 것은 아닐까. 인류에게 출퇴근 시간이 생긴 지 100년이 채 되지 않은 것처럼, 근시일 내에 사람에게도 회사에도 더 좋은 쪽으로 가는 노동의 새로운 형태가 나와야 하지 않을까.
2. 업무시간을 조절할 자유
나는 점심을 먹고 나면 오후 2–3시에는 좀 졸리다. 아니 사실 모두 다 졸린다. 이때는 일에 집중이 안 된다. 차라리 커피 한 잔 내려 마시며 편안한 의자에 기대 조금 쉬고 싶다. 정—말 잠을 자고 싶다. 수평적이고 참신한 조직문화를 꿈꾸는 회사들은 대부분 쉬는 방, 안마실, 소파 등 편안한 자리를 제공하지만, 그 방에서 편안하게 한 시간씩 잠을 자는 사람은 많지 않다. 눈치가 조금 보이기 때문.
하지만 나는 일에 집중이 안 될 때, 두 시간씩 점심시간을 갖는다. 졸리면 낮잠도 편히 때린 후 일어나 오후에 집중하여 그날의 일을 마친다. 왜? 난 프리랜서니까. 퇴사한 지 4개월 차가 된 프리랜서는 이렇게 시간을 갖는 것만으로도 하루하루 짜릿하다. 여전히 회사 일을 받아서 일하는 건 마찬가지인데, 프리랜서나 직장인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할당량을 마친다면 이렇게 자유도를 주고 일할 수 있다면 좋겠다.
물론 업직종에 따라 편차는 있다. 개발자인 내 남편은 프리랜서인 나보다도 근무시간이 자유롭다. 머신러닝 쪽의 개발자라면 알겠지만 코딩을 마치고 나서 기계가 그것을 학습하고 가동하는 시간이 있기 때문에 그 시간은 강제적으로 붕 뜨기도 하고, 할 일 다 하면 터치하지 않는 문화가 그들 사이에서는 이미 자리를 잡은 듯싶다.
나는 마케팅과 광고를 하면서 아이디어를 내는 조직에 있었으니 팀 단위의 미팅이 많았다. 쉬운 구조는 아닐지라도, 충분히 크리에이티브 조직에서도 이런 형태의 업무가 가능하다고 본다. 회사가 조직원을 믿고, 팀원의 능력을 신뢰하기만 한다면 말이다.
3. 빌런이 없어진 환경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좋은 환경은 뭘까. 멋진 데스크, 해상도 높은 커다란 모니터, 쾌적한 회의실, 회사 내 스낵 바, 다 좋지만… 가장 좋은 환경은 존중과 신뢰가 기반이 된 동료와 리더의 존재다. 복지가 좋은 것도 좋지만, 나에겐 그것이 가장 큰 복지였다. 하지만 늘 기억해야 하는 건 인간은 한 명 한 명 참 다르게 사고하고 행동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화법도 생각도 성향도 참 달라서 스리슬쩍 하는 농담에도 서로에게 생채기를 낼 수 있다. 특히 직급과 권한이 주어진 자리에 있는 사람은 이 부분을 조심해야 하는데, 인지조차 하지 않고 던지는 말들에 아파하는 사람들이 많다. 팀원의 의견을 자신의 의견으로 누른다거나, 자신의 감정을 참지 못하고 다 큰 성인인 아래 직원에게 혼내듯 화를 낸다거나 하는 일들로 우리는 회사에서 갈등을 겪는다.
일을 잘하는 사람이 대화를 꼭 잘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 말들로 인해 자질구레한 감정이 섞이고, 불편감이 발생하고, 일해야 할 시간에 저 인간을 이해하고 해석하는 데 에너지가 분산되어 버리는 것이다. 나의 에너지를 분산시키는 어떤 사람을 빌런이라고 칭한다면, 재택을 할 때는 그 사람과 필요한 업무와 일정 체크만 주고받으면 되니 불필요한 감정 낭비가 일어날 일이 줄어든다.
갈등뿐 아니라 나에게 자주 말을 거는 친한 동료도 때로는 빌런이 될 수 있다. 나는 지금 집중해서 이 일을 끝내고 빨리 집에 가고 싶은데, 저 동료는 지금 편의점에 가서 핫바를 하나 사 먹자고 한다든가 커피를 마시자든가 하는 일들 말이다. 특히 리더가 이런 경우라면 따라가서 오후 시간을 다 날린 후 야근하는 사람은 내가 당첨된다.
재택할 때는 이런 일이 없다. 사람에 의한 스트레스가 현저히 줄어든다. 물론 같이 열 띄게 회의할 때가 필요하면 그때는 출근 미팅을 하면 되는 것이다.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가 하는 일이 정말 매일 아침과 오후 시간에 항상 얼굴을 보며 해야 하는 일들은 아니라는 것이다.
4. 마크스 없이, 편안한 복장으로
집에서도 회사 출근할 때처럼 차려입어야 일이 잘되고, 능률이 올라간다는 기사를 접한 적이 있다. 하지만 차려입는 과정이 많이 생략된 채로 재택을 하는 것만큼 효율적이고 편안한 업무 환경은 없을 것이다. 특히, 마스크 착용 없이 일을 할 수 있다는 것부터가 아주 크니까.
프리가 된 후 미팅이 많아져 여전히 회사에 나갈 때는 차려입지만, 집에서 집중해서 일해야 하는 순간에 나는 갑갑한 속옷 없이 일을 한다. 기초화장만 하고 머리를 질끈 묶고 오전 시간에 내게 주어진 그 날의 일을 모두 쳐낼 수 있다. 이후에는 운동을 가거나, 프리랜서 모임에 가서 낮 와인을 한잔한다. 내가 이렇게 일을 하면서 월급을 벌 수 있다는 사실이 그저 놀랍다. 이전과는 아주 다른 삶의 질이 많이 올라간 노동 생활이다.
프리의 단점도 아주 많지만, 업무 환경만 놓고 봤을 땐 직장 생활에 비해 말도 안 되게 좋다. 다시 회사를 가고 싶어지는 시기가 온다면 꼭 주 1회 이상 재택을 하는 회사에 가고 싶다. 누군가의 일을 수행하는 역할을 하며 돈을 버는 입장이라면, 프리랜서뿐 아니라 조직 내에서도 이런 장점을 극대화하는 환경을 충분히 만들어 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더 빠르게 이 형태의 환경을 실험하고 피봇팅 하는 조직이 아마도 더 길고, 빠르고, 오래, 잘 갈 수 있지 않을까.
그래서 만든 나의 홈 워커 커뮤니티 메시지
회사를 나와 8개월의 프리 실험을 한다고 했을 때, 내가 가장 먼저 만들었던 홈오피스 아이템은 이 메세지를 담은 텍스트 포스터였다. 재택과 프리를 하는 모든 일하는 사람을 위한 홈 워커 커뮤니티에 관련 콘텐츠를 올려두었다.
No mask
No dress-up
No rush hour
No hate villain
이 네 가지가 적용된 환경은 나를 더 짧은 시간 일에 집중하게 만들었고, 회사를 나와 내 일을 만드는 것과 여전히 마케팅 외주, 브랜디드 콘텐츠를 제작해주는 일을 하면서도 여유로운 시간을 갖게 만들어주었다.
완벽한 조직과 환경이란 존재하긴 어렵지만, 자기 일을 사랑하는 사람들의 능력이 필요한 조직이라면 반드시 이 새로운 형태의 노동 실험은 필요해 보인다. 일과 사람, 노동과 환경, 우리의 안전과 편안함을 둘러싸고 오늘도 고군분투하는 이 시대의 모든 워커와 나에게 안녕을 빌며.
원문: 앤가은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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