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잔과 함께 우아하게 자판을 두드린다
재택근무에 대한 로망이 있습니다. 매일 아침 반갑지 않은 알람 소리와 함께 미처 풀지 못한 어제의 피로를 어깨에 이고, 지옥철에 몸을 실어 사무실로 발걸음을 옮겨야만 하는 삶이 고단하면서도 지루합니다. 점심시간에 커피 한잔하기 위해 들른 카페에서 노트북을 펴놓고 무언가를 하고 있는 사람들을 보며 동료들과 함께 “아 사무실 들어가기 싫다.”, “나도 이런 데서 일하고 싶다”는 푸념을 늘어놓곤 합니다.
그래서 재택근무를 해보았습니다
사무직 직장인이 재택근무를 하기 위해서는 회사 차원에서 제도가 마련되거나 상사의 동의를 얻어야 가능합니다. 직장인이 단지 하고 싶다는 마음만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많지 않지 않습니다. 재택근무는 더욱 그렇고요. 특히 사무직 직장인은 사무실 자리에 앉아있는 것만으로도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습니다.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있듯이 직장인에게는 ‘출근이 반’입니다.
다행히 저는 상사님의 동의를 얻어 재택근무의 기회를 얻었습니다. 작년 연초에 사업 제안서를 쓰게 되었고, 제안서는 어차피 혼자 작성하는 것이니 편한 시간에 편한 곳에서 일하라고 상사분께서 먼저 말씀해주시더군요. 이렇게 재택근무의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일주일 동안은 근무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말고 원하는 대로 일하라는 지시 아닌 지시가 있었고, 저는 출근을 하지 않아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제 앞에 툭 던져진 ‘일하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큰 선물처럼 느껴졌습니다. 그렇게 저는 ‘재택근무’라는 것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재택근무 1일 차
평소 같았으면 아침 6시 수영 강습을 받고 나면 출근하기 바빴을 텐데 나는 이미 출근하는 시간 1시간을 벌었다. 집에 와서 머리를 말리고, 평소에는 생각하지도 못했던 아침 식사를 느긋하게 챙겨 먹어도 근무시간이 시작되는 9시가 되려면 30분이나 남았다. 나는 휴가를 낸 것이 아니라 엄연히 재택’근무’를 하는 것이기에 노트북을 켜고 일할 준비를 했고, 9시에 근무를 시작했다.
그런데 일이 손에 잡히지 않는다.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인기 게시물들이 내 시선을 사로잡는다. 그렇게 나는 오전 시간을 ‘딴짓’을 하며 보내버렸다.
움직이지 않았던 탓인지 사무실에서는 시도 때도 없이 고팠던 배가 점심시간이 훌쩍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신호가 없다. 그런데 괜히 냉장고 문을 열어보고 싶다. 그 이후에도 여러 차례 냉장고 문을 열었다가 다시 닫았다가… 냉장고, 소파, TV, 침대. 모두가 유혹의 수단이 된다. 시간은 어찌나 빠르게 지나는지, 결국 별다른 성과 없이 하루가 지나버렸다.
재택근무 2일 차
어제 일을 많이 못 했기에 마음이 다소 조급해졌다. 역시나 아침 수영을 다녀와서 느긋하게 아침밥을 먹으며 하루를 시작했다. 오늘은 집이 아닌 나를 좀 더 통제할 수 있는 곳으로 장소를 옮겨 일을 해보기로 했다.
노트북을 싸 들고 집 근처 스터디 카페로 출근했다. 구석진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일을 하기 시작했으나 역시 진도가 팍팍 나가지는 않는다. 하루 종일 입을 다물고 있자니 심심하기도 했다.
동네에서 나름 맛있는 밥집을 찾아갔으나 혼자 때우는 점심밥도 그리 맛있지는 않다. 하루 종일 스터디 카페에 앉아있긴 했지만, 오늘도 역시 계획했던 분량을 채우지 못한 채 하루를 마무리한다.
재택근무 3일 차
일이 자꾸 밀린다. 이제 점점 마음이 조급해진다.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는 법. 슬슬 걱정이 되기 시작한다. 상사는 나를 믿고 이렇게 일하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자유를 주었는데 제안서 퀄리티가 잘 나올까? 이번 제안이 잘 안 되면 어떡하지?
자유는 나에게 느긋함과 여유를 주었지만 압박감과 부담감은 내 발등에 불을 질렀고, 나를 움직이게 했다. 나는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해 열심히 달리기 시작했다.
나에게 무엇을 요청하는 사람도 없었고, 회의 소집도 없었다. 물리적으로도 사무실보다 훨씬 일에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었고 지난 이틀간 밀렸던 일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을 만큼 생산성 있게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알 수 없는 적적함이 내 에너지를 조금씩 갉아먹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재택근무 4일 차
어제에 이어 일의 집중도는 높지만 사무실이 그립다. 정확히 말해 동료들도 보고 싶고, 그들과 하는 시시콜콜한 농담들도 고프다. 제안서를 쓰다가 막힐 때 아이디어를 나누고 조언을 구할 수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고 싶다. 그리 맛있지 않은 구내식당 밥조차도 그립다.
재택근무 5일 차
결국 사무실로 출근했다.
결론을 내리자면
4일간의 재택근무 체험 결과 햇살이 들어오는 창가에 앉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커피 한잔과 함께 우아하게 자판을 두드리는 낭만은 없었습니다. 오히려 자유와 함께 주어진 그에 따른 책임과 성과에 대한 부담감이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유로운 아침 시간은 정말 좋았습니다. 어찌 보면 고작 1시간 정도의 여유였음에도 지옥철에 몸을 싣는 대신, 서루르지 않고 느긋하게 아침밥을 먹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삶의 질이 훨씬 높아진 듯했습니다. 동일하게 퇴근 시간 1시간을 추가로 확보했다는 것도 큰 선물이었고요.
더불어, 일의 생산성도 훨씬 높아지는 것을 경험했습니다. 불필요한 에너지 소모를 줄일 수 있었죠. 출퇴근하는 에너지뿐 아니라 사무실에서 일할 때 생기는 잡음, 전화, 상사의 지시, 타 부서의 요청 등에 바로 응하면서 소모하게 되는 에너지를 챙길 수 있었습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지 않고 오로지 내 컨디션에 따라 주변 환경을 통제하며 일할 수 있고, 내 상태에 따라 일하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해서 일의 효율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이 참 좋았습니다. (다행히 재택근무하며 쓴 제안서로 사업도 수주하는 좋은 결과도 얻었고요)
다만, 저처럼 적당한 압박이 필요한 사람에게는 재택근무가 그리 긍정적으로만 작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절실히 깨달았습니다. 밀린 집안일, 게으름, 도처에서 내 시선과 마음을 빼앗고 있는 유혹거리들은 재택근무의 치명적인 단점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저는 동료가 필요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쁘게 일하다가도 시시콜콜하게나마 주고받는 농담이 내게 소중한 쉼이 되었으며, 커피를 마시며 나누는 대화들이 아이디어의 원천이 되기도 했고, 맛없는 밥도 함께할 때 더 맛있을 수 있으며, 함께 일하는 것이 큰 힘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 시간이었습니다.
또한, 재택근무 시 성과로만 평가받을 수 있다는 사실도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글의 서두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햇볕이 드는 분위기 있고 조용한 곳에서 우아하게 노트북 자판을 두드리며 일할 수 있으면 참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일은 우아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노트북을 얹어놓은 약 한 평의 공간은 사실은 치열한 싸움이 있는 곳입니다. 겉모습은 소위 말해 있어 보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한 편의 제안서를 써내기 위해서는 머리를 짜내야 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PPT를 만들어내는 막일 작업도 불가피하고요.
일부 전문가들은 재택근무가 기본적으로 인간의 심리를 변화시키지 못한다는 점을 재택근무의 문제로 삼기도 합니다. 사무실에서 생산성이 떨어지는 직원이라면 재택근무 시에도 마찬가지일 가능성이 높다는 의견이죠. 이 부분은 제 경험을 비추어봐도 십분 동의하는 바입니다.
재택근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룰’ 정하기
일하는 문화와 방식이 변하고 있는 시대입니다. 동시에 근무 형태도 다양해지고 있습니다. 원하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하고, 원하는 대로 입고, 출퇴근길에 시달리지 않는 재택근무자는 사무실에 묶여있는 근로자들에게는 부러움을 살 수밖에 없는 대상입니다.
재택근무자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만의 룰’을 정하는 것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재택근무자가 사무실에서 일할 때와 같은 생산성을 유지하고, 유지하는 것을 넘어 더 효율적이고 효과적으로 일하려면 오히려 하루를 더 조밀하게 구조화시켜야 합니다.
사무실에서 근무할 때처럼 시간과 장소에 얽매일 필요는 없지만 가장 생산적이고 업무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이 언제인지 분명히 파악하여 일하는 시간과 휴식 시간을 정확하게 정해놓고, 한 번에 한 가지 일에 집중할 수 있는 물리적 환경을 만들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그에 따른 마인드셋도 반드시 필요하고요.
일하는 시간과 장소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진 재택근무자에게 ‘룰’이 중요하다는 것이 어찌 보면 서로 어울리지 않는 듯하지만, 결국 재택근무도 ‘근무’이며 모든 일에는 ‘성과’가 담보되어야 할 테니까요.
원문: 낭만직딩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