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인가 너무 잔인한 영화, 드라마들이 보기 싫어졌다. 묘사의 잔인함 뿐만 아니라 설정의 잔인함도 그러하다. 관객/시청자의 말초적 감각을 자극하는 것만이 목적인 슬래셔무비류는 더더욱 극혐한다. 아무 정보 없이 보다가도 그런 식의 전개가 예상되면 그 다음이 보기 싫어 화면을 꺼버리게 된다.
〈오징어 게임〉도 보지 않다가 넷플릭스 시청 세계 1위에 해외 각국에서 신드롬 현상을 일으킨다며 여러 매체와 SNS에서 호오가 극명히 갈리는 비평이 봇물을 이루길래 드디어 나도 보고야 말았다.
나의 감상을 한마디로 줄인다면, 이것은 ‘데스게임의 외피를 쓴 사회성 드라마’라는 거다. 〈남한산성〉을 잘 봤지만, 김훈의 원작이 워낙 명작이기에 황동혁이라는 감독의 이름을 유념해서 보지는 못했다. 그런데 〈오징어 게임〉은 이 이름을 다시 보게 만들었다. 영화/드라마란 게 원래 그렇긴 하나, 이 드라마는 전체가 엄청난 전략적 설계로 이루어져 있기 때문이다. 게임 참여자의 인적 구성, 게임의 설계, 비주얼의 설계, 음악의 선택 등이 다 그렇다.
국내외 일반적인 데스게임물은 게임 자체와 그 승패에 몰입하는 경향이 있다. 그렇다고해서 참여자들 개인의 서사가 완전히 배제되지 않는다. 캐릭터의 설정에 이미 그 서사가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징어 게임〉에서 개인의 서사는 그 캐릭터뿐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의 축도처럼 느껴지게 구성되었다.
남성, 여성, 노인이 고루 들어있을 뿐 아니라 사회계층적으로 개업의, 증권회사 사원 등 중산층으로 생각되는 인물군에다 해고 노동자, 이주노동자, 폭력배, 탈북민(이자 소매치기), 사기범, 성폭력 피해자(이며 살인자) 등 우리 사회 밑바닥의 문제적 존재들이 모두 망라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은 좋은 대학 나와 전문직에 종사하는 머리 좋은 이들의 그럴듯한 사회적 얼굴을 까뒤집어 이들의 이기심과 비열한 자기합리화를 여지없이 드러낸다.
이들은 좋은 머리와 기술을 활용하여 밑바닥 사람들보다 더 강력하게 남을 등친다. 네가 죽어야 내가 사는 처절한 생존경쟁의 장에서 겉으로 분식하던 체면 따위는 개나 줘버려!인 것이다. 극한적인 상황에서는 계층과 상관없이 모두가 이기적이다. 오히려 그 와중에서도 일말의 인간적 감정과 죄책감을 느끼는 존재는 우리 사회의 변방에 있던 하잘 것 없는 인물들이다.
그런데 이들 참여자 중에 최상위 계층은 없다. 결국 이것은 우리 사회 ‘을들의 전쟁’일 뿐인 것이다. 최상위 계층은 이 처절한 생존경쟁의 방관자일 뿐 아니라 적극적 관객이며, 소비자이며, 나아가 게임의 설계자들이다.
감독의 시각을 가장 잘 드러내주는 장면은 참여자 중 한 사람 의사의 처형 장면이다(라고 생각한다). 게임을 진행하는 일꾼들 중 일부는 게임에서 탈락한 사람들의 시신을 일부 빼돌려 장기 밀매를 하는데, 의사는 다음 게임 종목을 미리 아는 조건으로 이들을 도와 장기를 추출해왔다.
어떤 사달로 현장이 발각되었을 때 주최측은 이들 일꾼들과 의사를 한꺼번에 사살한다. 그들이 처형당하는 것은 장기 밀매 때문이 아니다. 주최측에서는 그 사실을 ‘이미 알았고, 장기를 팔아먹든 말든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라고 말한다. 주최측은 처형된 자들을 참여자들 앞에 전시하며 대략 다음과 같은 말로 엄숙하게 사과한다.
“이 게임 안에서는 모두가 평등하며 모든 과정에 불평등이 없어야 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즉 이 게임은 실로 ‘공정’하다는 얘기다. 게임 종목은 시작 전까지 누구도 모르며, 어느 편 어느 순서가 될 것인지는 아무 정보 없이 제비뽑기로 스스로가 선택한 것이니 승패는 당사자 책임일 뿐이라는 뜻이다. 체력이 강하든 약하든, 해당 게임에 대한 경험이 있든 없든, 함께 한 파트너가 유리하든 불리하든 말이다.
그러나 이런 선언에도 주최측은 참여자들이 경쟁자들을 줄이기 위해 한밤에 서로 죽이는 걸 방관 내지 조장하고, 가장 친한 사람들끼리 짝을 지워놓고 이들끼리 게임을 붙여 한쪽을 죽게 함으로써 그 죽음의 죄책감을 참여자 개인들에게 전가한다.
이것은 현재 우리 사회에 만연한 ‘공정성’의 욕구에 대한 강력한 은유,라고 나는 느낀다. 고작 ‘시험’이 공정성의 잣대가 되어 시험 만능주의가 ‘기회의 평등’과 ‘과정의 공정’을 대변한다고 강변하는 사회. 그리하여 사회 구조 전체를 보지 못하게 하고 ‘을’들끼리 아귀다툼을 벌이게 하는 사회, 제 발 밑의 이익에 눈이 어두워 눈앞의 상대만을 증오하게 하는 사회. 경쟁이 공정으로 포장되는 사회.
주인공 해고노동자 성기훈이 그 경쟁의 와중에서도 ‘기댈 데가 인간 밖에 없어’ 인간에 대한 믿음을 끝내 놓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에 대한 저항이며, 이것은 드라마 전체를 통해 전하고 싶은 감독의 세계관이다.
이 끔찍한 인간 지옥도를 대중 접근성 높은 콘텐츠로 바꾸어낸 키워드는 ‘의외성’이다. 기존의 데스게임물들이 가진 요소들을 가장 극적으로 배신하는 방식으로 요소들을 설계했다. 하드고어한 피칠갑 처형이 예사로 자행되는 게임임에도 세트의 색감은 너무나 경쾌하게 화사하고 의상의 설정은 만화적이다. 게임의 내용은 복잡하고 어렵다기보다 어린 시절의 단순한 놀이를 그대로 가지고 왔는데, 이의 비주얼적 설계가 실로 언캐니(uncanny)한 것이다.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게임의 거대한 여자아이 마네킹 술래 같은 것이 대표적이다. 줄다리기, 달고나 뽑기, 구슬치기, 징검다리게임, 오징어 게임 등 친숙한 놀이인데 비일상적 거대한 구조물과 게임 규칙이 기괴한 느낌과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심지어 시신을 소각장까지 담아나르는 관도 선물상자처럼 분홍색 리본으로 장식하는 전복적 상상력을 발휘한다.
음악도 이에 상승작용을 한다. 참여자들이 눈을 떴을 때 들리는 음악은 장학퀴즈 시그널 곡(하이든 트럼펫협주곡 3악장)이고, 게임장으로 이동할 때 들리는 것은 백화점 등에서 BGM으로 흔히 쓰이는 음악(아름답고 푸른 도나우강)이다. 몹시도 친숙한 음악이지만 드라마틱한 멜로디를 최대한 자제한, 반복되는 이 음악은 일상성을 비일상성으로 환치하는 데 막강한 위력을 발휘한다.
내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이 드라마 최대의 공신은 미술과 음악에 있지 않을까 싶을 정도다. 늘 보아왔던 음침한 공간과 공포를 예감케 하는 무시무시한 OST에 〈오징어 게임〉 스토리를 배치해서 상상해보면, 이들의 역할이 얼마만 한 것인지 짐작이 갈 것이다.
원문: 김옥영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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