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여러 매체와 페이스북 타임라인에 FIRE 관련 글이 올라옵니다. 저도 관심이 많은 주제이기에 읽어 보았습니다. FIRE는 ‘Financially Independent Retire Early’의 약자입니다. ‘경제적으로 독립한 조기 은퇴’로 번역할 수 있겠습니다. 여러 매체에서 많이 화자하는 이유는 ‘경제적 독립’에 대한 정의와 ‘조기 은퇴’에 대한 시각 차이에서 주로 발생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우선 ‘경제적 독립’에 관해서는 ‘지속 가능성’이 화두입니다. ‘지금 괜찮다고 해서 나중까지 괜찮을까?’라는 의문을 제기하시는 것 같아요. 당연한 반응이기도 합니다. 5년 전만 해도 주거 비용은 별도로 해 현금성 자산 10억 초중반이 있다면 큰 문제 없이 FIRE할 수 있겠다고 많이들 생각하셨습니다. 10억 기준으로 연 평균 4%의 배당을 받을 수 있다면 연간 4,000만 원의 수입이니, 그럭저럭 가능하겠다고 생각하셨던 거죠.
패시브 ETF(Passive ETF)를 넣어도 연 평균 6% 이상을 기대할 수 있었으니, 현금성 자산 10억 초중반이 그리 터무니 없는 숫자도 아니긴 했습니다. ‘연간 지출액의 25배를 모아라’는 FIRE 매뉴얼(?)과도 유사한 구조이고요. 여기에 5년 전 당시의 주거비용은 강남 주요지를 제외하면 서울 30평형대 구축이 6억, 신축이 8억이면 됐습니다. 그래서 순자산 20억 정도면 검소하게 생활한다는 가정 하에 FIRE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종종 있었습니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러한 금액 기준에 동의하는 사람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부동산 가격 상승으로 인한 주거비용의 증가와 코로나19로 인한 화폐 발행량 증가로 경제적 독립의 기준도 함께 높아진 것 같습니다. 5년 전만 해도 순자산 20억 원이면 살짝 빠듯해도 독립이 가능했지만, 지금은 순자산 20억 원으로는 경제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이루었다고 말하기 어려워지는 것 같습니다.
당장에야 지내는 데는 문제가 없지만, 현재의 구매력을 확장시키거나 유지하기 어려울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즉 ‘지속 가능성’의 문제에 도달합니다. 경제에서 ‘지속 가능성’은 매우 중요한 가치인데, 순자산 20억으로는 경제적 독립의 지속 가능성에 의문을 갖게 만드는 게 요즈음의 상황이죠. 코로나19로 풀린 돈이 중장기적으로 어떠한 영향을 줄지도 모를 일이고요.
5년 전 20억은 2개의 타워팰리스였지만, 현재의 20억은 0.8 헬리오시티입니다. 지난 몇 년 사이에 화폐 가치가 너무나도 급속히 떨어졌고, 이러한 경험으로 ‘지금은 괜찮아 보이는 돈도 머지 않아 위태로워질 수 있다.’는 시각이 있습니다. 그러니 ‘얼마가 있어야 경제적 독립이 가능하냐’에 대해서도 많은 이견이 생겼습니다.
그 다음은 ‘은퇴(retire)’에 관한 부분입니다. 저는 금액의 기준보다는 이 부분을 더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콜린스 영어사전에서는 ‘retire’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RETIRE
When older people retire, they leave their job and usually stop working completely.
‘직업(job)을 그만두고 일하기(working)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죠. 여기서 ‘직업’은 무엇이고, ‘일하기’는 무엇일까요? 우선 ‘job’부터 찾아 보았습니다.
JOB
A job is the work that someone does to earn money.
‘돈을 벌기 위해 일하는 행동’이 직업이라고 합니다. ‘work’도 찾아봅시다.
WORK
People who work have a job, usually one which they are paid to do.
일은 ‘일반적으로(usually)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동’이라고 하네요. 정리하자면, ‘은퇴’는 직업을 그만두고 일하기를 완전히 중단하는 것이라고 합니다. ‘일’과 ‘직업’은 일반적으로 돈을 벌기 위해 하는 행동이고요. (즉 일과 직업은 돈을 버는 게 목적이 되지 않아도 됩니다.)
FIRE를 다시 보면요, Financially Independent Retire Early입니다. 조기 은퇴, 좋습니다. 그런데 은퇴한 다음 남는 시간에 무엇을 해야 좋을지는 (생각 외로) 많은 고민이 필요합니다. “아무 일도 안 하면 좋지, 무슨 말이냐”라고 하실 수 있습니다. 회사 일이 너무 힘들고 고단하면 아무 일도 하기 싫어질 수 있습니다. 그냥 회사 일 안하고 매일 놀고 싶은 게 사람 마음이고요.
그런데 마냥 놀기만 하다 보면 현타가 오는 시점이 분명 옵니다. 사고가 굳어가는 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저는 ‘일찍 은퇴한다 한들, 사고가 굳어지면 그게 과연 바람직한 행동인가’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습니다. 인간과 동물은 사고의 깊이에서 구분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저는 책 읽기를 좋아합니다. 회사 안 가고 매일매일 책만 읽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했습니다. 회사 그만두고 읽고 싶은 책 잔뜩 쌓아두고 평생 책만 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꽤 길게 휴가를 내어 차에 책을 가득 싣고 인터넷도 안 되는 시골에 가서 한참을 책만 읽다 온 적도 여러 차례 있었습니다.
그런데요, 사람의 생각은 발전하고 환경이 변화하며 바뀌기 마련입니다. 책을 정말 원없이 읽었더니 ‘행동하지 않음’에서 답답함을 느꼈습니다. 책으로 쌓은 기반을 통해 행동하며 사회에 가치를 더할 수 있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 때 부터는 독서보다 ‘사회에 가치를 더함’이라는 게 더 중요하게 느껴졌습니다. “평생 책만 읽어도 여한이 없겠다”는 오랜 소망이 “사회에 가치를 더하는 삶을 살자”로 바뀐 것입니다.
사회에 가치를 더하기 위해서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일의 효율을 높이는 데에는 ‘직업’이 긍정적인 영향을 주기도 하고요. 제가 종사하고 있는 IT 분야에서는 특히 그렇습니다. 저는 ‘조기 은퇴’보다 ‘자아 실현과 사회에 가치를 더하기 위해 일하는 생활’에 더 매력을 느꼈습니다. 반면 경제적 독립은 확보하고 싶었습니다. 직업을 갖고 일을 하는 이유가 ‘사회에 가치를 더하기 위함’이 되고 싶었습니다.
FIRE라는 단어는 돈에 지나치게 많은 가치를 부여한다고 생각합니다. 경제적 독립, 좋습니다. 돈, 매우 중요합니다. 저도 돈 벌기 위해 인생을 건 배팅을 여러 차례 했습니다. 배팅이 실패했다면 한강 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그러고도 더 벌자고 자산시장 분석을 계속해 나가고 있습니다. 돈, 정말 중요합니다.
돈이 중요하지 않다는 말이 아닙니다. FIRE 중 ‘조기 은퇴’가 불편합니다. FIRE는 ‘돈이 있으면 인생의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이다’는 의미를 내포하는 것 같아 찝찝한 구석이 있습니다. 은퇴하면 필연적으로 여유 시간이 많아집니다. 나이가 충분히 많다면 여유 시간에 큰 활동 없이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조기’ 은퇴잖아요.
어떤 일을 하기에 체력도, 지력도 충분한 나이일 겁니다. 조기 은퇴 이후, 하루 24시간이라는 짧고도 긴 시간을 어떻게 채워나갈 것인가요? 일하지 않으면 인생이 행복하기만 할까요? 시간을 무엇으로 채우고, 그 시간으로부터 내가 ‘살아있음’을 느끼는 데는 정말로 치열한 고민이 필요합니다.
은퇴에 앞서 스스로 어떤 일을 좋아하는지, 인생이라는 스토리를 어떤 이야기로 채워나갈지도 함께 생각해 보는 게 필요한 것 같습니다. 저는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가만히 있는 것은 정답이 아니라 생각했습니다. 일을 통해 스스로의 전문성을 기르고, 보람도 느끼고, 사회에 가치를 더하는 게 행복한 인생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더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여담으로, 저는 경제적으로 충분한 여력을 마련한 이후에도 열정적인 생활을 하는 사람들을 더욱 깊이 존경하게 되었습니다. 생활이 절박하지 않음에도 스스로의 기준점을 통해 열정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점이 멋지고 대단하게 느껴졌습니다. ‘회사가 부당하게 느껴질 때 언제든 퇴사할 수 있는 돈’이 확보된 뒤에도 열정적인 생활을 하는 분을 보면 대단하시다는 생각이 저절로 듭니다.
사람의 본성은 먹고 사는 데 지장이 없어지면 나태해지는 것 같습니다. 이기문 님의 책 『크래프톤 웨이』에서 장병규 님이 언급하신 ‘인간은 기본적으로 게으르다.’는 말씀에 특히 공감하기도 했습니다.
경제적 독립, 소위 F머니(F-money)의 확보는 직업과 일 선택의 자유도를 높여줍니다. 저는 일을 통해 자아를 실현하고 더 행복한 생활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FIRE도 좋지만, F머니를 마련한 뒤 자기가 사회에서 어떤 역할을 할 수 있는지 계속해서 찾아나가는 것도 가치 있는 일이라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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