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스타트업으로 이직하려는데 조언을 듣고 싶어요”라는 대기업 인사담당자들의 연락을 많이 받는다. 작년에도 종종 있었지만 특히 최근 더더욱. SNS로 링크드인으로, 지인을 통해서 등 다양한 경로로 지난 1개월만 스무 건 이상의 문의를 받았다.
내가 처음 이직을 할 때도 내게 기꺼이 시간을 내어 진심을 다해 도와주려던 분들이 계셨기에 나도 기꺼이 내 시간을 나눈다. 하지만 묻는 사람 입장에서는 자기 고민이나 듣고 말하는 입장에서 보면 대동소이한 게 대부분이다. 그래서 공통적인 부분을 모아 써보기로 했다.
직접 대화를 한다 해도 그러나 뭔가 ‘그러니까 이렇게 하고 저렇게 하면 돼’ 같은 길잡이성 조언을 요구하는 분들이라면 생각이 복잡해질 수 있다. How To에 대한 답은 하나 없이 계속 묻고, 그저 나는 이런 시행착오를 했고, 이런 생각을 한다는 말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일반화할 수도 없을뿐더러 백날 백방으로 조언을 구해봐야 한껏 의욕에 찼다가도 머뭇대고 잔류하거나 말려도 이직하는 등 결국 자기 맘대로 할 것 아닌가.
그래서 나는 이들에게 주로 ‘욕망의 구체성과 그 농도’를 묻고 확인해 본다. 알아서들 판단하면 되는 거고, 그저 스스로 생각하도록 ‘선명하게 만들어주는’ 질문을 던질 뿐이다. 어쨌든 지난 1년 넘는 시간 동안 이런 류의 대화가 무수히 오고 가는 가운데 대체적으로 비슷한 내용이 있어 정리해 보려 한다. 특히 이번 글은 대기업 차/부장 이상의 고직급 중 스타트업을 두드리는 인사담당자가 주 대상이다. (그 이하도 별반 다르진 않다.)
이제부터 쓸 내용은 모두 내가 직접 경험했거나 주변에서 많이 보아온 이야기 중 공통적으로 말하는 걸 정리한 내용이다. 읽다 보면 스타트업은 대체 어떤 곳인가 싶을 수도 있으나 “스타트업에 오지 마세요!”가 아니다. 최소한 이 정도는 감안하고 선택해야 한다는 거, 주도적, 자율성, 도전이란 말을 좀 더 구체화해보고 오면 좋겠다는 거다.
1. 가장 많이 묻는 사람은 누구였나?
HR이라 해도 크게는 HRM, HRD, 조직문화, 노무, 채용으로 나눌 수 있다. 이걸 또 나누면 조직, 육성, 교육, 조직문화, 채용, 인원인건비, C&B, 현장직/사무직 노무, 급여, 평가 등으로 세분화 가능하다. 대기업은 각 업무별로 뾰족한 커리어를 쌓는 게 일반적이다. 이번 글은 주니어는 열외로 하고 고직급자 중심으로 쓰는 것이니 그들 중 내게 문의를 하는 직무는 이 중에서도 HRD 담당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분명 HR의 중요한 영역임에도 교육이나 조직문화 담당자들은 인사전문가라 부르진 않는다. 교육 전문가, 조직문화 전문가라 하지. 좋게 보면 이들의 전문영역이 있다는 거지만 알게 모르게 HRM을 해야 인사전문가라는 인식이 있음을 부정하기 어렵다. 그럼에도 HR에서 어쩌면 가장 재량 있게 일할 수 있는 직무이기도 하다. 어떤 프로그램을 만들지 주제나 기획의도는 위에서 떨어질지 몰라도 그 콘텐츠를 어떻게 만들지, 뭘로 채울지에 대한 선택권이 다른 직무보다는 많기 때문이다. 교육장, 워크숍, 세미나 등에서 잘 전달하고 강의도 하면서 직무 만족도도 높은 편.
하지만 코로나라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 질병의 창궐로 이들의 입지가 좁아지고 차근차근 쌓아오던 ‘전문성’에 의구심이 들기 시작했다. 콘텐츠 개발에서 큐레이터로서의 정체성이 옮겨가고 교육 자체가 줄어드는 상황에서 고참 교육담당자들은 이직도 어려운 상황. 조직 내에서도 HRD만 했을 때 국내 손꼽히는 규모의 기업이 아니면 HRM 경력 없이 포지션을 달기도 어렵다. 외국계나 가지 않는 한 어떻게 팀장까지는 간다 해도 임원은 요원하다. 한계를 느껴 이직하려니 역시 HRD 경력만으로는 저직급도 아닌 상황에서 녹록지 않다.
전문가로 인정받아 왔고, 연봉도 좋으며 일 잘한다 얘기도 많이 들었지만 온갖 한계를 느낀다. 기회만 주면 나도 다른 인사업무 배워가며 잘할 자신이 있건만 이미 차/부장쯤 된 사람의 사내 로테이션도 어렵고 이직도 어렵고… 눈을 돌리니 ‘조직문화’ 키워드가 눈에 띄는 스타트업에 흥미가 간다.
대기업 출신들이 아주 많지는 않으니 내가 다른 직무 경력이 없어도 쉽게 갈 수 있을 것 같고 최소 ‘팀장’ 정도는 달고 옮길 수 있겠다 싶고. 주도적으로 일하고 싶은데 대기업에서는 어려우니 그 주도성을 발휘하고 싶기도 하다. 더 늦기 전에 도전해봐야겠다는 마음이 굴뚝이다.
그 다음은 HRM을 하지만 포지션은 없는 경우. 평가보상제도 담당을 하긴 했는데 그것만 깊이 파기 보다는 HRM 영역에서 주로 채용을 많이 한 경우다. 스타트업 채용이 핫하다 하니 채용경력을 어필할 수 있을 것 같고, 채용하면서 보상도 했다 하는데 사실 대기업에서 채용담당자가 할 수 있는 보상은 무척 한계가 있다. 보상제도 자체의 설계보단 채용을 진행하면서 정해진 테이블 안에서 그걸 전달하고 채용 완료까지 하는 정도.
또한 대기업 채용업무는 정기 혹은 수시 공채를 공고하고 알아서 지원하는 사람들을 분류해 누구를 면접에 올릴 건지, 면접 일정은 어떻게 잡을 것인지, 면접 진행 기간 동안 운영하고 때론 채용 운영 아웃소싱과 함께 한다.
가뭄에 콩 나듯 나도 핵심인재 접촉해 꼬셔봤지만 사실상 CHO나 팀장, 임원급이 직접 나서서 그들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지 순수 아웃바운드 채용은 아닐 가능성이 높다. 채용담당자의 개인기 영향도가 거의 없을 가능성이 높단 얘기. 차부장도 팀장이 아닌 이상 면접관으로 들어가는 일은 많지 않다. 운영에 절대적으로 경력이 편중되는 게 일반적. HRD나 조직문화보다는 좀 더 무난하지만 기본적으로 연봉이나 포지션에 대한 무게감을 생각하면 큰 차이는 없다.
2. 왜 스타트업에 오고 싶어 하던가?
정말 내가 만난 모든 사람이 “좀 더 주도적으로 일하고 싶어서, 도전해보고 싶어서”라는 말을 가장 먼저 했다. 조직 분위기나 구조상 여러 한계를 느낀다며, 그에 대해 답답함이 쭉 있었다며. (그런데 쭉 답답했다기엔 너무 오래 다녔….) 정확히 어떤 점이 답답했는가를 서너 번 더 묻다 보면 속내가 나온다. 보통은 1번에서 느낀 성장의 한계가 답답했고, 더 권한을 가지고 주도해 보고 싶고 더 큰 성취도 누려보고 싶다 한다.
비슷한 빈도로 많이 나오는 다른 답변으로는 ‘업무 범위를 확장해 보고 싶고, 좀 더 성장하고 싶다’이다. 이 역시 현 조직에서는 로테이션이 어려운 한계를 전제로 한다. 그다음이 조직문화나 조직에 더 직접적인 기여를 하고 싶다는 거.
3. 그럼 나는 어떤 질문을 하는가?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느낀 공통점 중 하나는 ‘모호하다’였다. 다들 많이 고민하고 어느 정도는 마음이 기울어 왔을 것이며, HR 담당자가 그 정도 조직생활을 했을 정도면 그간 많은 커리어 고민을 들어주고 조언도 하며 살았을 거다. (인사담당자 역시 자기 커리어에 관해서는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데 인사담당자에게 물으면 답이 나오는 거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스터디니 세미나니, 각종 SNS만 봐도 인사담당자들이야 말로 자기 전문성을 어떻게 높일 것인지, 어떻게 커리어를 설계할지 가장 많은 고민을 하는 사람들인데 말이다.
그런데 재밌는 건 ‘그놈의 전문성’이 뭐냐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나만의 정의’를 딱 부러지게 얘기하는 사람을 거의 보진 못했다는 거다. 마찬가지로 ‘업무 확장성’이 정확히 뭐냐 묻는다. 그럼 “제가 한쪽 경험만 있어서 물론 잘은 모르지만, 열심히 할 자신은 있다”고 한다. 일부는 옆 부서에서 혹은 업무 관련해 조금 해본 일을 “HRM 업무도 좀 관여했고…”를 붙인다. 스스로 내심 위축되는 걸 이런 식으로 커버하며 어필한다.
그럼 다시 묻는다. “주도적으로 일한다는 건 뭔가?” 여기에서부터 더더욱 모호해진다. 경영에 참여하고 싶다든가 의사결정권을 가지고 싶다든가… 정말 극히 일부분에 국한된 경험으로 스타트업에 오면 인사 전반을 관할하며 사업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포지션을 기대한다는 게 놀라울 정도. 그러나 그 내용은 굉장히 포괄적이다. 그런데 그렇게 주도적이고 도전을 하고 싶으면 창업을 해야 하지 않나….
4. 좀 더 질문을 해본다
주도적이고 영향력을 가지고 싶다면 그게 꼭 스타트업이어야 하는가?
이 질문을 하면 생각보다 많은 이들이 “꼭 스타트업이어야 하는 건 아니다”라고 한다. (응?) “스타트업이냐 아니냐, 이직이냐 아니냐를 다 떠나 당신은 뭘 하고 싶은 건가?”란 질문을 해본다. 스페셜리스트를 지향하는 사람들은 꼭 스타트업으로 올 필요가 없다는 게 개인적 생각이다. 스페셜리티와는 거리가 먼 환경이다. 무엇보다 정말 전문성이 명확하면 오지도 않더라.
내가 그간 보아온 바로는 이것저것 하며 넓지만 얕은 경험을 주로 한 사람들은 전문성에 대한 열망이, 뾰족하게 심화된 경력을 쌓아온 이들은 확장성에 대한 욕구가 컸다. 본인이 부족하다 느끼거나 해보지 않은 것에 대한 열망일 수도 있다. 그런데 더 들어가 보면 “꼭 스타트업일 필요는 없다”는 이들은 현재 처우나 기타 조건들을 중소/중견기업이 충족시키기 어렵고 네임밸류나 여러 ‘폼’에서 아쉬움을 토로한다. 처우를 깎기는 싫다가 전제.
그럴 바엔 ‘스타트업’이라는 게 뭔가 도전해 나가는 거 같고, 요즘 스타트업들 처우나 복지도 좋다 하고, 자기 정도의 경력과 스펙이면 팀장 정도는 당연히 달고 더 나아가 C-level로 시작할 수 있다는 기대도 크다.
처우의 마지노선은 어디까지 생각하세요?
바로 답변하는 경우가 거의 없다. 구구절절 기본 연봉은 어느 정도고 기타 인센티브나 성과급, 복리후생 등이 어떻고 하며 총보상은 어느 정도인지를 얘기한 후 “스타트업에 가면서 나도 각오했다”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한다. 현 연봉 슬라이딩이나 +500만 원 정도를 말하며 대단한 희생을 하는 듯 말한다. 자기는 깎고 올 생각이다 하는 이들도 일부 있는데 그 결심은 대단하나 그 깎은 금액도 대단하다. 보통의 스타트업에서는 맞춰주기 어려운 수준. 그러면서 연봉은 감안했으니 스톡옵션을 받는 쪽으로 생각한다는 말도 덧붙인다.
나도 1년 정도 스타트업으로 나올 준비를 하며 많은 조언을 받고 다녔다. 그러면서도 내게 묻는 이들과 다를 바 없이 “성과급은 나와봐야 아는 거니 포함할 생각 없고, 인센티브 같은 것도 됐고 그냥 연봉 슬라이딩하는 수준으로 하겠어요”라 했다. 지금 생각하면 회사에겐 고맙고 나는 천지분간을 못했다.
물론 유니콘급 스타트업, 혹은 그 수준은 아니어도 시리즈 C 이상의 스타트업에서 정비를 하기 위해 큰맘 먹고 시니어급 인사담당자를 데리고 올 때엔 상당한 보상으로 영입하는 경우가 있기는 하다. 그러나 수많은 회사 중 정말 소수의 회사. 누가 어떻게 이직했다더란 소식도 제법 되기에 기대는 당연하다.
하지만 대기업의 처우와 복지, ‘뽀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업무 확장도 하고 싶고 스톡옵션 대박도 나고 싶고, 주도권도 가지고 싶다? 결국 뭐하나 포기하는 건 없이 아쉬운 걸 마저 채우기 위해 스타트업을 두드리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적지 않다.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보자. 대체 뭘 포기했다는 거여…)
워낙 인사가 중요하다 하고 이 조건들을 맞춰주는 회사들도 있으니 이직이 허황된 건 아니다. 인사가 중요하다면서도 정작 인사업무를 정확히 모르는 경영진이나 실무자들도 많기에 특정 업무만 해봤다 해서 그걸 꼬집는 회사보다는 대기업에서 오랜 경력을 가진 인사 전문가로 인식하며 ‘모셔’가는 회사도 널렸다.
다만 잘 생각해봐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 뭘 미리 들어보든 간에 막상 닥쳐 겪는 혼란과 그걸 넘겨내지 못했을 때엔 주니어보다 시니어들의 데미지가 훨씬 큰 것도 많이 보았다. 나 역시 비슷한 멘탈붕괴의 시기를 겪어 다음의 이야기를 해준다.
해보진 않았지만 기회만 주면 잘할 자신 있다는 건 신입이나 하는 말이다.
물론 닥치면 다 하게 되어 있다. 직장 짬이 있으니 생신입보다는 나을 거고. 하지만 모르는 업무도 해야 하고, 그걸 다 감내할 생각으로 도전하는 거라면 어떤 준비를 했는지. 어차피 공부하고 와봐야 막상 와서 부딪히면 간단한 업무도 정신없이 헤매는 시기가 있지만 아무것도 안 하다가 와서 배워가며 하겠다?
그 시간 본인의 성장과 시행착오에 조직이 지불하는 시간적, 비용적 부담은? 무려 리드 혹은 헤드 포지션에 적잖은 페이를 받으면서? 내 경우는 배워가는 게, 성장하고 관점이 변화하는 게 좋았다. 그러나 배우고 또 배우고, 계속 배우기만 하는 게 어느 순간 민망해졌다. 언제까지 배우냐며…
시리즈 C 이상이면 그냥 대기업 이직이나 다름없다.
다만 커도 체계가 여전히 없을 뿐 그게 무슨 초기부터 일구는 곳인가. 그리고 정말 스카우트되어 모심 당해 가는 게 아니면 스톡옵션은 주지 않을 가능성도 높고 받아도 초창기 스톡옵션 대박과는 거리가 꽤 멀거다. 원래 이직이란 건, 고참일수록 이직 자체가 그냥 용기가 필요한 일이다. 스타트업으로 와서가 아니라 대기업 간 수평 이동을 해도 그렇단 거다.
말하는 대로 스톡옵션도 많이 받고 맨땅에서부터 주도적으로 회사의 성장에 기여해 만들어가고 싶다 한다면 pre-A나 A 정도는 가야 한다. 그러나 그 회사들은 내가 원하는 수준의 조건을 ‘포지션’을 제외하면 맞춰주기 어려울 가능성이 매우 높을 것이다.
물론 어느 이상의 처우를 보장받고 가는 건 당연히 바라는 거고 중요하지만…
스타트업은 3개월 수습이 국룰이다. 대기업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진짜 잘릴 수 있는 수습기간’이 실제 존재하고 꽤 활발히 운영된다. 높은 처우라는 건 일단 그걸 받고 그다음에 내가 시간과 체력을 갈아 넣어 열심히 하는 게 아니라, 처우 대비 가성비로 끊임없이 평가당할 거란 얘기다. 조직이 적응기간을 인내해준다 해도 내가 뭔가 증명해내려 조급해지고 밥값 못하는 건 아닌지 미안해지며 쪼그라들기도 한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대기업 출신’ 꼬리표가 줄기차게 따라다닌다.
기대와 가성비로 비교당하는 건 물론이고, ‘대기업 출신들이 스타트업에 오면 다들 헤맨다’는 직간접 경험치가 파다하게 퍼져있다. “스타트업을 몰라서 그러는데” “원래 대기업 출신들은 그래요”란 말이 줄기차게 당신을 따라다닐 거다.
요즘 내가 많이 듣는 얘기 중 하나가 “대기업 출신들 만나 봤는데요~”. 나도 바로 그 출신인데 1년 좀 겪어 봤단 걸로 내게 이렇게 말한다. 물론 좋은 평가는 아니다. 뭔가 이상적이거나 모호하고 추상적이거나 실질적이지 않다든가, 우리 회사에서 굳이 그 첫 시행착오를 겪고 싶진 않다는 거. 오히려 1–2개 스타트업을 거친 사람은 환영한다. 처음에 겪어야 할 시행착오를 다른 회사에서 겪고 왔기 때문에.
체계 없음에 혀를 내두르며 뭘 할라치면 “스타트업에선 그럼 안 돼요~” 같은 저항도 상당하다. 궁금해하고 배우고 싶어 하면서도, 체계 없어 문제라 하면서도 막상 뭔가 내가 그간 보고 배운 걸 적용할라치면 ‘꼰대’나 ‘구태의연한’ 걸로 평가절하 당할 수도 있다. 그 없는 체계 만들라고 당신을 뽑는 거다. 이런 상황에서 주도적이라는 건 주도(主導)가 아니라 ‘道’, 내가 하나씩 도장깨기 하듯 길 자체를 만들어 간다는 게 아닌가 한다. 위에서 지휘하는 게 아니라 쭈그려 앉아 흙, 먼지 만져가며.
평판 사이트에서 대놓고 까인다.
대기업에서도 인사는 원래 주구장창 털리는 부서다. 하지만 one of them으로 싸잡아 퉁쳐지는 것과 달리 스타트업으로 오는 순간 그냥 나를 저격한다. 팀장급 이상으로 온다면 그냥 인사 욕은 내 욕이다. 구성원들과의 거리도 가깝고 감정적 교류도 훨씬 크기에 생각보다 힘들 수 있다. 규모가 작은 만큼 내 앞에서 웃고 부대낀 이가 뒤에서 날 씹고 있을 수 있다는 거. 믿었던 사람에게 뒤통수 맞는 느낌을 생생히 경험할 수 있다.
조직문화가 중요하고, 인재가 중요하고, 그래서 인사가 중요하고… 하지만 정말 필요한 건 채용!
대표님들을 만나다 보면 진심으로 인사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좋은 회사를 만들고 싶어 ‘좋은 HR 리더’를 필요로 한다. 그런데 좀 더 얘기하다 보면 결국 ‘채용’이다. ‘채용이 가장 중요하다’는 당연한 말을 하자는 건 아니고 당신이 입사했을 때 ‘채용’만 주구장창 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그 채용이 인재상을 만들고 프로세스를 만들고 핵심가치를 만들고 면접을 보고… 그걸 깊게 고민하며 만들 새도 없다. 만들 수는 있는데 가장 많은 시간을 뺏기는 건 종일 링크드인을 뒤지고 공고를 내고 면접 일정을 어레인지하고 면접을 들어가다 하루를 보낸다는 거.
대표님들과 이야기하다 보면 ‘아, 인사 전문가가 아니라 채용팀장이 필요하시네’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성장하는 회사에 올라타고 싶어 왔는데, 그런 회사는 미친 듯이 채용해야 할 시기일 가능성이 99%다. 물론 많은 걸 기대하고 요구할 거다. 경영진이 하고 싶어하는 건 넘치고 넘치니. 하지만 ‘제 때 좋은 사람 못 뽑는다’면 다른 건 하면 좋은 거고 다른 거에 집중하면 ‘스타트업 인사담당자의 책임’을 다하지 못하고 정신 팔린 양 취급당할 수 있다.
나 채용담당자 출신이다 해봐야 앉아서 공고 내면 물 밀듯이 지원한 사람들 중 고르던 것과는 상황이 다르다. 유명한 스타트업이 아니라면 지원 자체가 없거나 내가 찾아 다녀야 한다. 한껏 눈 높아진 개발자 연봉에 식겁하고 개발자만큼음 아니지만 역시나 당췌 이해 안 되는 다른 직군, 저연차 연봉들을 보며 울며겨자먹기식 협상(?)을 한다. 더 중요한 건 당신은 스타트업 네트워크가 없다는 거.
‘HR 전반을 다 경험할 수 있다’와 ‘짜치는 일을 계속해야 한다’는 전혀 다른 얘기다.
규모가 좀 있는 스타트업이 아니라면 1인 인사팀, 혹은 HR 관리자와 채용담당자 정도 두고 일할 텐데 대기업에서는 존재 자체가 없던 각종 정부지원금 신청, 급여, 원천세, 수시로 이직하는 이들에 대한 경력증명서 발급 대응, ‘뭐 이런 것까지’ 싶은 시시콜콜한 업무와 면담 지옥에 허덕인다.
물론 한 번은 해볼 만하고 또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기도 하다. 가끔 해도 해도 끝나지 않는 업무에 지쳐도 한편으로는 그것대로 재미를 느끼기도 한다. 하지만 해볼 필요가 있는 것과 그 일을 계속해야 하는 건 완전히 다른 얘기다. 어느 순간 HR 전반이 아니라 밑단의 일만 하는 게 지치고, 그나마 대기업에서 ‘전문가’로 쌓아온 경력마저 도태되는 느낌에 현타가 오기도 한다.
결국 선택은 자기가 한다
여기까지 읽고 애초에 옮길 의욕을 꺾는 건가 한다면 그건 아니다. 나 역시 똑같은 얘길 들었고 그럼에도 이직했으며 적응기를 그대로 겪었다. 생각보다 힘들기도 했고, 생각보다 괜찮기도 했고, 마음은 그랬는데 실제 부대끼며 해야 하는 일이나 좌절감이나 고민은 또 다른 얘기이기도 했다. 나보다 훨씬 잘 적응하는 사람도 있었기에 무조건 오지 마라 하는 얘기도 아니다. 내가 겪고 많이들 공감하는 걸 날것 그대로 이야기했을 뿐이다. 아무리 더한 얘기를 해도 자기가 듣고 싶은 걸 듣고 옮길 사람들은 적당히 미화해 결국 움직인다. 알아서 걸러 들으시길.
내가 처음 스타트업으로 이직한다 했을 때, 초기 스타트업으로 가겠다 했을 때 선배들이 내게 이런 조언을 했다.”규모가 있고 멤버가 좀 갖춰져 분담할 수 있는 회사, 체계를 잡아가야 해서 네 경험을 바로 적용하고 싶어 하는 회사에서부터 시작하고 다음에 작은 회사로 가든 하는 걸 추천한다”고. 중소-중견-대기업으로의 이동은 더 큰 회사로 방향이 주로 향하나 스타트업으로 올 때엔 큰 회사에서 작은 회사로 가는 게 소프트랜딩 하기에 좀 더 나을 거라고.
내 경우는 애초에 스타트업으로 오면서 모가 아니면 도라 생각했기에 어차피 모험이라면 ‘모가 될 때 그 파이가 폭발적인 곳’으로 가리라 했다. 그래서 초기 회사를 찾았었고. 1인 인사담당자로 입사해 저 위의 모든 상황을 겪고, 그 과정에서 자존감이 바닥을 칠 정도로 헤매기도 했다. 그럼에도 다시 그 당시로 돌아가라 한들 나는 동일한 선택을 할 것 같다. 그러니 스타트업으로 옮기겠다 하면 말리는 건 아니다.
나 역시 첫 스타트업 생활을 정리한 후 다음 행선지를 정하지 않고 제로베이스에서 생각하며 어디에서 어떻게 일할지를 다각도로 고민하는 중이다. 가능하다면 좋은 조건을 마다할 리도 없다. 그러나 한번 경험해 본 상황에서 더 중요한 건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내가 기여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내가 가장 일을 잘할 수 있는 사이즈나 구조, 조건은 무엇인가”를 끊임없이 자문해 확인하고 선택하는 게 정말 중요하단 걸 안다.
그래서 내게 ‘조언’이란 걸 굳이 구하는 이들에겐 “당신이 원하는 조건을 맞춰줄 회사가 없지도 않다, 취업이 또 생각보다 어려운 것도 아니다”라 말한다. 그래서 큰 회사부터 시작해 가늠해 보기를 추천한다. 할 수 있으면 포지션 달고 스톡옵션 많이 받고 처우도 잘 받아 갈 수 있음 가라고. 엄청난 희생 각오를 하거나 이직의 이유가 또렷하지 않다면 이렇게 시작하는 게 아니면 회사 입장에서도 본인 입장에서도 이게 나을 것 같다고.
이직의 이유가 당장 주도적이고 싶어서, 어떤 회사에서 일하고 싶어서로는 좀 부족하니 다시 생각해 보시라 한다. 주니어도 아니고 나이도 있고(보통 40대이므로) 몸도 무거운데 짧게는 3년, 5년 후 나의 넥스트를 뭘로 생각하는지까지 충분히 생각해 보고 그 과정의 이직처를 다시 생각해 보라 한다.
여러 경우의 수를 보고 들은 대로 최대한 전달하되 결국 선택은 자기가 하는 거다. 정신없다면서도 대단히 만족하고 잘 적응하는 분들도 많다. 다만 도입부에서 언급했던 ‘내 욕망의 방향과 그 농도’를 좀 더 선명히 해보고 선택하길 바라는 마음. 아니면 스타트업 떠돌이가 되거나, 고민만 하다 이도 저도 아닌 채로 눌러앉거나 하게 되더라.
정리하면
내 욕망의 방향과 농도를 가늠하는 데 아래 질문을 해보자.
- 왜 스타트업인가?
- 내가 원하는 건 무엇인가?
- 주도성이란 무엇인가?
- 도전이란 무엇인가?
- 꼭 스타트업이어야 하는가?
- 무엇을, 얼만큼 내려놓을 것인가?
- 내가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 하는 건 무엇인가?
- 이 모든 질문 후 진짜 내가 원하고 잘할 수 있는 건 무엇인가, 그걸 할 수 있는 곳은 어디인가?
- 8번까지 왔다면 이제 뭘 해야 할까?
원문: Lotus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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