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한 관계란 서로의 기복을 견디는 관계가 아닐까 싶다. 사실 모든 사람에게는 일정한 기복이 있다. 대개 사회생활에서는 그런 감정적 기복, 컨디션 기복, 기분이나 마음의 기복 같은 것들을 가능한 한 감추어야 한다. 웬만해서는 짜증이 나더라도 참아야 하고, 울고 싶다고 운다든지, 기쁘다고 너무 깔깔대며 웃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적정한 선에서 스스로를 감추어서, 기복이 너무 드러나지 않게 애써야만 한다. 기복은 어떤 의미에서는 수치스러운 것이고, 유아적인 것이고, 관계를 박살 내 버리는 것이란 통념이 있기 때문이다.
물론 가까운 사이야말로 예의를 지키기 위해 애쓰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기 위해 노력해야 하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가까운 관계일수록, 혹은 진정한 관계일수록, 그런 서로에 대한 기복을 알아차리고, 이해하고, 배려하는 일들이 더 중요해지는 것 같다.
서로의 기복을 견뎌내지 않고, 회피하며, 방치하고, 이해하거나 받아들여 주지 않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관계의 깊이를 거절하는 일이기도 하다. 관계라는 것이 스스로 견뎌내기 쉽지 않은 삶을 서로 더 견뎌낼 수 있게 도와주는 것이라 본다면, 그 핵심에 ‘기복’이 있기도 한 것이다.
이런 ‘기복’을 견디는 관계의 절정은 육아인 것 같기도 하다. 아이의 사소한 감정변화까지 모두 알고 이해하고 견뎌내야 하는 게 육아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진정한 관계는 당연히 ‘어려운’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나아가 아이가 커나갈수록, 아이도 부모의 기복을 알아간다.
어느 날은 부모가 침울하거나 축 처져있고 기분이 좋지 않다. 그러면 아이도 가장 가까운 존재인 부모를 조금씩 이해하고, 달래고, 견뎌내는 방법을 알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보면, 사실 최초의 관계 맺기란 기복을 견딜 줄 알게 되어가는 일이기도 한 셈이다.
나아가 이런 ‘기복’에 대한 이해는 점점 모든 사람에게로 확대될 필요도 있지 않나 싶다. 모든 사람에게 기복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면, 누구에게나 다소 관대해질 수 있는 것 같다. 이런 이해심은 점점 더 우리 사회에 필요해지고 있기도 할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누군가 완벽하지 못한 발언을 했거나, 실수를 했거나, 기복이 있는 행위나 말을 했을 때, 그것을 이 잡듯이 찾아내어 마녀사냥하고, 낙인찍고, 비난하는 것이 일상화되었다. 그러나 사실 기복 없는 사람은 없고, 완벽한 사람도 없다. 그 지점을 끊임없이 확인하는 것은 아무리 해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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