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 같은 국제 경기가 펼쳐지는 시즌이 되면 평소에는 있는지도 몰랐던 애국심이 총출동한다. 시상식 맨 위에 올라 금메달을 목에 건 선수들의 감격에 찬 얼굴 안에서 피땀 어린 훈련과 연습의 시간이 슬쩍 비친다. 물론 수상대 위에 올라간 선수에게만 해당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나 같은 평범한 사람은 감히 가늠할 수조차 없을 노력이 모여 결실을 볼 그 찰나를 위해 선수들은 자신의 호흡대로 경기에 임한다.
여러 종목 가운데 특히 양궁 경기를 볼 땐 세탁기 안에 들어앉은 빨래가 된 기분이다. 경기가 진행되는 내내 영혼과 육체가 동시에 조여졌다 풀어지기를 반복한다. 그저 눈으로 보기만 하는데도 몸 안의 수분이 다 빠져나간다. 나라면 팔다리가 떨려서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할 그 긴장되는 순간, 선수들은 심장을 한국에라도 놓고 온 듯 대담하게 화살을 쏜다. 숨이 멎을 듯한 긴장감을 꽉 채우고 두 손을 꼭 쥐고 응원하게 된다.
활시위를 당기는 선수들의 표정에는 이렇다 할 변화가 없다. 상대 팀 선수가 몇 점을 기록했는지, 자신이 직전에 쏜 화살이 어디에 박혔는지 중요하지 않다. 그저 당장 쏴야 할 화살에만 집중한다. 줄을 힘껏 당겨 손을 턱 부근에 고정한다. 이때 활시위가 입술과 코를 누른다. ‘저렇게 누르면 아프지 않을까? 선크림 다 지워지겠는데? 계속 저 자리에 활이 닿으면 굳은살 생기는 거 아니야?’ 같은 양알못다운 하찮은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런데 이 행동에는 과학적인 이유가 있었다. 선수들이 화살의 정확성을 높이는 방법이었다. 화살을 조준할 때 선수들은 항상 같은 위치에 활시위를 고정하는 연습을 한다. 1㎜만 바뀌어도 화살이 날아가는 방향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코와 입술은 감각이 예민하고, 얼굴 중심에 위치해 화살을 정확하게 조준할 수 있다. 감각이 기억하는 ‘명중’의 순간을 그대로 재생하는 거다.
머리로 기억하는 건 시간이 흐르거나 주변 환경에 영향을 받아 흐릿해지거나 오염되기 마련이다. 하지만 몸이 기억하는 습관은 무의식이 만드는 행동이다. 양궁 선수들이 시위를 당겨 연습할 때 줄이 늘 닿던 자리에 놓는 모습을 지켜보며 궁금해졌다.
내 몸의 감각이 기억하는 습관은 뭘까?
양궁 선수들이 코와 입에 새겨진 승리의 감각이 있다면, 내게는 상대방이 가진 마음의 온도를 느끼는 감각이 있다. 줄이 코와 입에 닿았을 때의 감각을 통해 명중의 확률을 높이는 것처럼, 마음의 온도가 닿았을 때의 감각을 통해 상대방의 마음을 느낀다. 남들은 별 의미 없이 지나치는 미세한 차이가 오감으로 느껴진다.
그중에서도 부정적인 감정이 더 잘 느껴지는 편이다. 말 한마디에 싸늘해지는 표정이 눈에 보인다. 얼음송곳처럼 마음 깊은 곳을 찌르는 말투가 아프게 귀에 박힌다. 관심을 회피하는 냉정한 몸의 각도가 인식된다. 호의를 외면하는 차가운 시선까지 고스란히 느껴진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 믿지 않고 감정의 온도가 몇 도쯤인지 마음의 온도계를 들이댄다. 한여름 태양보다 더 환하고 뜨겁게 웃어도 그 사람의 마음속에는 0℃의 얼음이 차곡차곡 쌓여 있을 때도 있고, 영하 78.5℃의 드라이아이스가 가득할 때도 있다. ‘아, 이 사람에게 나는 몇 도쯤으로 받아들여지는구나.’ 파악하고 딱 그만큼의 온도로만 대한다.
상대방의 온도가 몇 도인지도 모르고 무작정 뜨겁게 달려든 적도 있다. 세상 모든 일이 그렇듯 내 마음 같을 수 없다. 내가 100을 주면 상대방에게 100은 아니어도 80은 기대하게 마련. 하지만 현실은 그 공식이 성립될 가능성이 거의 없다. 모든 걸 다 쏟아부어 놓고 돌아오는 게 없어 허탈한 적도 많았다. 그건 내 선택이고, 후회하지 않을 만큼 줬다고 자신을 다독여 보지만 본전 생각을 피할 수 없는 건 인간의 본능이다. 초탈의 경지에 오른 부처님이 아닌 욕심 많고 나약한 인간이기에 계산기를 두드리게 된다.
마음속에서는 수년째 ‘덜 주고, 덜 받기 운동’이 진행 중이다. 기대하지도 말고, 실망하지도 말자. 바라지도 말고, 후회하지도 말자. 원하지도 말고, 아쉬워하지도 말자. 받은 만큼 돌려주자. 표현하는 만큼 표현해 주자. 건네는 만큼 보답하자. 이거면 충분하다. 더 많이 주려고도, 더 열심히 하려고도, 더 마음에 들려고도, 더 애쓰려고도 하지 말자. 그냥 있는 그대로 자연스럽게. 몸의 감각이 기억하는 그대로 모자람 없는 딱 그만큼만.
원문: 호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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