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없이 많은 기업에 자기소개서를 보냈다. 그리고 불합격했다. 그래서 자기소개서를 계속 고치고 새로 썼다. 쓰다 보니 합격한 기업이 몇 곳 생겼다. 그렇게 자기소개서를 더 쓰고 정리하다 보니 ‘마스터 자소서’라는 게 생겼다. 그 후 나에게 ‘서류 전형’에 응시한다는 건(특별한 문항이 있지 않은 한) 마스터 자소서에 있는 내용을 복사해서 붙여넣는 행위가 됐다.
기업 이름을 바꿨고, 직무라든가 아주 미세한 수정작업이 있었지만, 글의 큰 틀, 경험은 전혀 바꾸지 않았다. 그 이유는 딱 하나였다. ‘잘 쓴 자기소개서’란 녀석이 내가 자기소개서를 쓰는 데 들인 시간과 꼭 비례해서 탄생하진 않았기 때문이다.
취업 관련 유튜브, 강의, 프로그램을 경험할 때마다 ‘지원자’가 아닌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하라는 조언을 들었다. 취준생 입장에서 칼을 쥔 건 기업이니 당연한 말인데도 나는 정작 취업 전형에 응할 때마다 ‘내 입장’에서 생각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나는 ‘기업의 입장’에서 생각했고 스펙을 쌓았고 자기소개서를 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사실 그게 ‘내 입장’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이랬다. 사실 처음 보는 기업인데도 아는 척을 해야 했으니 기업 소개 영상을 봤다. 하나만 본 것도 아니고 여러 편을 봤다. 그 기업이 속한 사업 리포트도 보고(리포트는 몇 개만 봤다) 그 기업의 산업을 열심히 예측했다. 그러니까 내 마음대로 이렇게 생각했다.
이 기업은 이 기업의 비전, 인재상, 핵심사업, 핵심사업이 속한 산업의 전망 그 산업 안에서의 ‘우리 기업’의 위치(이미 우리 기업이 되어 있다) 등을 아는 사람을 좋아할 거야.
그래서 자소서에 열심히 이런 내용을 집어넣었지만 불합격했다. 마스터 자소서를 복사해서 붙여넣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은 시간을 들였다.
위 두 글은 내가 한 학기 경영학과 수업에서 ppt 만점을 받기 위해 한 조사가 아니었다. AJ네트웍스라는 기업에 들어가기 위해 썼던 글이었다. AJ네트웍스라는 회사나 렌탈시장에 내가 미쳐있던 것도 아니었다. 그냥 어느 날 채용공고에 AJ네트웍스가 있었고 AJ네트웍스가 주로 하는 일은 B2B렌탈이었다. 자소서 문항에서 ‘렌탈시장’이나 ‘기업’ 혹은 ‘산업’에 관해 물었느냐? 그것도 아니었다. 그냥, 내가 혼자 해버린 일이었다.
기업은 내가 그 기업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궁금해한 적이 없었다. 그저, 우리 기업 인사팀에서 당신이 일을 잘 할 수 있을까? 그게 제일 궁금했을 것이다(당시 인사직무 직원을 뽑았을 테니까). 가능하면 오래, 일을 잘할 수 있는 사람이 필요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내 대답은 간단해야 했다. 명확해야 했다. 저는 이러이러한 경험과 스펙이 있으니 인사과에서 일 잘할 겁니다. 그런데 내가 쓴 자소서를 보면 증권사 직원이 매수 리포트를 쓴 것처럼 써놨다. 경영 컨설턴트 업자가 기업에 경영방식을 조언하듯 글을 썼다.
위의 두 글을 잘 썼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어쩌면 내 글을 읽은 인사과 직원도 ‘글’은 꽤 잘 썼다고 꽤 괜찮은 분석이었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하지만 절대 합격시킬 수 없는 ‘자기소개서’였다. 인사직무에 대한 글은 거의 없다시피 했으니 나는 인사 직무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이라고 글을 쓴 것과 다름없었다.
마스터 자소서는 아마 우리가 우리 평생에 가장 잘 쓴 글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쓴 글 중에 가장 ‘목적에 부합하는’ 글은 맞다. 그래야 한다. 좋은 자기소개서란 자기소개서 문항이 묻는 말에 깔끔하고 담백한 답변을 쓴 글이다. 마스터 자소서는 취업준비생의 경험과 퇴고에 의해 ‘좋은 자기소개서’가 될 확률이 높다.
문항을 분석한다는 건 거창한 의미가 아니다. 문항을 분석한다는 건 ‘무엇을 묻는지 명확하게 알기 위한 모든 행위’일 뿐이다. 출제자의 의도 파악? 수능은 끝났다. 채용은 수능이 아니다. 인사팀은 자신의 의도를 숨겨 취준생을 힘들게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렇게 의도를 숨기면 자신들이 더 힘들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꽤 명확하게 묻는 편인데도 동문서답을 하는 취업준비생들이 많다. 해당 직무를 잘 모를수록. 해당 직무를 잘 할 수 있는 스펙이나 경험이 없을수록. 우리는 추상적으로 자기소개서를 쓸 가능성이 크다. 대충 내가 이러이러하니 잘 할 수 있다는 식의 횡설수설하는 자소서가 나올 확률이 높다.
내 경험이 얼마나 힘든 경험이었는지, 내 스펙이 얼마나 대단한 스펙인지 자기소개서에 쓰지 말자. 자기소개서는 내 자서전이나 평론이 아니다. 그리고 이 경험과 스펙이 얼마나 희귀하고 어려운지보다 기업이 나를 채용하고자 묻는 이 문항에 적합한 경험인지 스펙인지 생각하자.
어디 가서 남들이 못할(그리고 취업에 도움이 될) 진귀한 경험을 할까? 취업에 도움이 되면서 남들이 없는 스펙은 뭘까? 고민하고 자기소개서에 녹여 넣는 건 시간과 품이 너무 많이 드는 일이다. 그 전에, 내가 자기소개서 문항이 묻는 말에 제대로 답변을 했나? 내 강점을 잘 서술했나? 횡설수설하지 않고 필요한 답변만 자기소개서에 깔끔하게 적었나? 자문해보고 고쳐나간다면 충분히 더 빨리 서류전형에서 합격할 수 있다고 확신한다.
원문: The Critics의 브런치
함께 보면 좋은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