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100년 전인 1920년의 9월 18일,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지에 실린 소설가 스콧 피츠제럴드의 에세이 「Who’s Who—and Why」를 번역해 소개합니다. 특별한 이유 없이 문득 피 선생님의 에세이를 번역하고 싶었습니다.
사실 제 생각이 차근히 잘 정리가 안 되는 시기라서 남의 생각을, 기왕이면 좋아하는 작가의 생각을 하나하나 졸졸 따라가며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요. 영어 사전을 내 마음대로 뒤지며 열심히 선생님의 에세이를 의역해보았는데, 틀린 부분이 몇 군데쯤 있을 것이라 확신합니다. 번역가 선생님들이 새삼 존경스러운 오늘이네요.
해당 에세이가 발표되던 해, 피츠제럴드는 한국 나이로 스물다섯이었습니다. 그를 빛나는 소설가로 데뷔시켜준 첫 장편 소설 『낙원의 이편』이 출간되고 나서 6개월이 지나던 시점입니다. 한 마디로 인생의 자신감이 최고로 터지던 시기라고 할 수 있겠죠. 그래서인지 피 선생님의 글로부터 지나친 자의식과 치기, 어떤 흥분감이 고스란히 전달됩니다.
미국, 나아가 세계를 평정한 위대한 작가가 20대 중반에 자신의 과거를 돌아보며 쓴 에세이 「Who’s Who-and Why」, 이것은 대문호의 자기소개서인 셈인데요, 어떤 기업의 인사담당자님들이 피츠제럴드 선생님의 이 자기소개서를 받아본다면 아마 좌절을 극복하고, 꿈을 위해 몰입하고, 끈기 있게 실행하는 그의 인간적 매력에 푹 빠졌으리라 생각합니다. 물론 면접장에서 각 잡힌 명품 수트를 입고 다리를 꼰 채 고자세로 뻗대다가 끝내 탈탈 털렸겠지만요.
자, 아래에 번역본을 옮깁니다. 즐겁게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Who’s Who—and Why
내 인생은 글쓰기를 향한 강렬한 충동과 그걸 방해하도록 혈안이 된 환경 사이 투쟁의 역사였다.
내가 세인트 폴에 살던 12살 무렵, 나는 수업 시간마다 지리 교과서의 뒷면이나 초급 라틴어 문법책, 수학 문제집의 가장자리 등 어디든 가리지 않고 줄곧 글을 썼다. 2년 후 소집된 가족회의에서는 학업을 위해 나를 기숙학교에 보내는 결정을 내렸는데, 그건 실수였다. 나의 글쓰기에 관한 관심이 사라져버린 것이다. 나는 축구를 했고, 담배를 피웠고, 대학에 놀러 갔으며, 인생에 하등 쓸모없는 짓들은 다 하고 돌아다녔다. 물론 그것들은 단편 소설에 괜찮은 표현과 대화 소재가 되어주었다.
기숙 학교에서는 새로운 일을 벌였다. 이라는 뮤지컬 코미디를 본 날 이후로 내 책상은 길버트와 설리번의 대본과 뮤지컬 코미디의 초본이 담긴 노트로 가득 메워졌다.
기숙 학교가 거의 끝나갈 무렵, 나는 피아노 위에 놓여있던 새 뮤지컬 코미디의 악보를 우연히 발견했다. 이라는 작품이었는데, 프린스턴대학교의 ‘트라이앵글 클럽’에서 공연한다는 정보가 담겨있었다. 그거면 충분했다. 대학에 대한 고민이 해결된 것이다. 가자, 프린스턴으로.
신입생 때는 ‘트라이앵글 클럽’을 위한 오페레타를 쓰는 데 시간을 다 썼다. 이 때문에 대수학, 삼각법, 해석기하학, 위생학 등에 낙제했다. 하지만 ‘트라이앵글 클럽’은 나의 작품을 받아주었다. 후덥지근한 8월 내내 개인 지도를 해주며 나는 간신히 2학년이 되었고 작품 속 코러스 걸로도 출연했다.
그런데 얼마 후 공백기가 찾아왔다. 12월의 어느 날, 나는 건강이 악화하였고, 건강을 되찾기 위해 학교를 떠나 서부로 갔다. 학교를 떠나기 전의 마지막 기억은 고열이 나는 상태로 양호실에 누워 그 해 ‘트라이앵글 클럽’ 공연의 마지막 가사를 쓰던 일이었다.
다음 해, 1916년과 1917년에는 대학으로 돌아갔는데, 당시의 내겐 ‘시’가 유일하게 가치 있는 것이었다. 스윈번의 운율과 루퍼트 부르크의 제재만이 머릿속에 가득했고, 밤새 소네트와 발라드 그리고 론델체를 쓰며 봄을 지냈다. 어디선가 읽었는데 모든 위대한 시인들은 스물한 살이 되기 전에 위대한 시를 썼다는 이야기였다. 내겐 오직 한 해만이 남은 셈이었고 전쟁은 임박해오고 있었다. 나는 잡아 먹히기 전에 반드시 놀랄 만한 작품을 발표해야만 했다.
그해 가을까지 나는 ‘시 쓰기’는 포기한 채 포트 리븐워드에 있는 보병 장교 훈련소에 있었는데, 당시 내겐 완전히 새로운 열망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곧 불멸의 소설 작품을 쓰는 일이었다. 매일 밤, 나는 보병 교본 뒤에 수첩을 숨겨놓고 어느 정도 내 인생을 편집하고 거기에 상상의 이야기를 더해 한줄 한줄 소설을 써 내려갔다. 스물두 개 챕터의 아웃라인을 잡고(네 개는 운문으로) 그중 두 개의 챕터는 완결까지 했는데, 몰래 글 쓰는 게 발각되면서 게임은 끝나버렸다. 나는 학습 시간에도 더는 글쓰기를 할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건 심각한 문제였다. 내겐 오직 3개월의 시간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고(당시 보병들은 모두 살날이 3개월밖에 안 남았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 세상에 그 어떤 흔적도 남기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이러한 강렬한 열망이 한낱 전쟁으로 좌절되진 않았다. 매주 토요일 오후 1시, 주중 훈련이 모두 끝났을 때, 나는 장교회관으로 달려가 담배 연기와 잡담, 중얼거리며 신문 읽는 소리 등으로 가득한 구석에서 3개월에 걸쳐 주말마다 12만 자 분량의 소설을 썼다. 퇴고는 없었다, 그럴 시간도 없었으니. 각 챕터를 끝내면 나는 프린스턴에 있는 타이피스트에게 송고했다.
그사이 나는 연필 자국으로 가득한 종이 위에 살았다. 훈련이나 행군 그리고 보병 교본은 텅 빈 꿈이었고, 내 마음은 온통 소설에 가 있었다.
소설을 완성한 나는 보병 연대로 행복하게 돌아갔다. 전쟁은 계속될 것이었고, 나는 문장 단락이며 5보격, 직유법, 삼단논법 등을 잊어버렸다. 나는 중위가 되어야 했고 해외의 지령도 받았다. 출판사는 소설 「낭만적 에고이스트」는 지난 몇 년간 받은 원고 중 가장 독창적이나 출간할 순 없겠다는 메시지를 보내왔다. 무례하고 대책도 없이.
6개월 후, 나는 뉴욕에 도착해 7명의 편집 국장들에게 나를 기자로 써달라며 서류를 내밀었다. 나는 막 22살이 되었고 전쟁은 종료되었으며, 낮에는 살인자들을 추적하고 밤에는 단편을 쓸 생각이었다. 하지만 신문사는 날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나를 거절하기 위해 사환을 보냈다. 그들의 결정은 분명하고 여지가 없었다. 기자 명함 위에 내 이름은 어울리지 않는다는 듯이.
대신에 나는 월급 90달러의 광고인이 되었고, 교외 전차 안에서 지루하게 시간을 낭비하며 슬로건을 썼다. 3월부터 6월까지는 퇴근 후에 소설을 썼는데, 전부 합쳐 19편이었다. 가장 빠른 건 1시간 30분 만에 또 가장 느린 건 3일 만에 써냈지만, 그 누구도 그것들을 사주지 않았고 개인적인 편지도 보내오지 않았다. 122개 출판사의 원고 거절 쪽지를 내 방의 종이띠에 모두 꽂아두었다. 나는 영화 대본을 썼고, 노래 가사, 복잡한 광고 기획서, 시, 소품, 우스개 이야기도 썼다. 6월의 끝 무렵, 나는 30달러에 이야기 하나를 팔았다.
7월 4일, 나는 나 자신과 모든 편집자에 대해 극도의 넌더리를 내며 세인트폴의 집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족과 친구들에게 광고 일은 관뒀으며 소설을 쓰기 위해 돌아왔음을 알렸다. 그들은 정중하게 끄덕여주었고 화제를 바꾸어 내게 부드럽게 말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나도 내가 해야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내겐 끝을 봐야 하는 소설이 있었다. 무더운 두 달에 걸쳐 나는 소설을 쓰고, 고치고, 편집하고 추려냈다. 9월 15일, 속달 우편으로 소설 『낙원의 이편』이 출간 허락을 받았다.
이후 두 달 동안 나는 8개의 단편을 썼고 9개를 팔았다. 9번째는 4개월 전 나의 작품을 거절했던 잡지사였다. 그리고 11월이 되어 나는 처음으로 ‘새터데이 이브닝 포스트’ 지에 작품을 팔았으며 다음 해 2월까지 6개를 더 팔았다. 그리고 『낙원의 이편』이 출간되었고 나는 결혼에 성공했다. 그리고 지금 나는 이 모든 일이 어떻게 일어난 건지 신기해하고 있다.
불멸의 줄리어스 시저의 말을 빌려보자면,
그게 다야, 다른 건 없어.
원문: 스눕피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