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업 준비할 때 내 일과는 이랬다. 아침 8–9시 사이에 일어나 독서실에 갔다. 커피를 무료로 내릴 수 있는 독서실이라 커피를 내린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을 들고 자리에 돌아온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잡코리아에 들어가 새로 채용하는 기업을 찾는 일이다. ‘괜찮은’ 기업이 있으면 달력에 기업이 채용을 시작하는 기간과 끝내는 날짜를 기록했다. 나에게 ‘괜찮은’ 기업이란 세 가지 조건을 충족하는 기업이었다.
먼저 나는 괜찮은 기업이라면 잡플래닛 평점 2.5점은 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누군가는 잡플래닛 평점 3은 넘어야 한다고 했지만 나는 2.5를 기준으로 삼았다. 내 경험으로 잡플래닛 평점 3은 ‘호불호 거의 없이 좋은 기업’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2.5’는 누군가에게는 좋지만, 누군가에게는 좋지 않은 ‘호불호가 있지만 그래도 좋은 기업’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나는 취업 스펙이 좋지 않았고 최대한 빨리 취업하고 싶었기 때문에 평점 2.5를 기준으로 삼았다.
그다음 기준은 초봉으로 세전 연봉 3,000만 원을 주는가였다. 연봉으로 3,000만 원이면 월 250만 원이고, 월 250이면 세후 220–230쯤 될 거로 생각했다. 이성적인 이유가 있진 않았다. 다만 취업하고 직장을 다녀보며 얻은 ‘연봉’의 의미는 단순히 내 소득, 내 생활의 풍족함만을 의미하지 않았다. 현재 회사의 크기와 분위기, 인건비에 대한 경영진의 생각, 성과금/상여금/야간, 휴일수당 지급 여부 등 당연한 얘기지만 평균 연봉이 높을수록 취준생들에게 좋은 회사가 될 확률이 높다.
매년 연봉이 오르고 승진을 하면 직급별로 연봉이 오르게 될 텐데 연봉 협상은 보통 ‘비율’로 산정한다. 그냥 대리는 10만 원, 과장은 20만 원 이렇게 연봉을 인상하는 게 아니라 작년 대비 N% 인상이 보통이다. 따라서 같은 10% 인상이라고 하더라도 초봉이 얼마냐 직급별 연봉이 얼마냐에 따라 실제로 오르는 연봉 금액이 다를 수 있다. 취업 준비를 할 때만 해도 목표를 그렇게 높게 잡으면 안 된다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적어도 연봉 3,000만 원은 받겠다고 다짐한 내 기준이 취업한 지금 나빠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연봉 3,000만 원은 그렇게 높은 기준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마지막 기준은 워라밸이었다. 주말 이틀(공휴일)은 잘 쉬는가, 야근은 적당한가, 휴일 근무와 야근을 한다면 수당은 주는가 등등. 이런 건 각종 커뮤니티와 잡플래닛을 이용해서 대략적으로만 파악했다.
이런 기준으로 기업을 결정하면 기업에 대해서 알아봤다. 웹사이트에도 들어가 보고 전자 공시 시스템에 들어가 사업보고서를 읽기도 했다. 그때는 기업이 유튜브로 채용 홍보, 기업 홍보를 많이 했기에 기업 홍보 영상도 봤다. 그리고 자소서를 썼다. 하루에 한 곳 정도 자소서를 쓰고 지원했던 것 같다. 두 곳에 지원하면 많이 하는 거였다. 취업 첫 시즌이라 자소서를 쓰는 방법도 기업에 대한 정보도 없었다.
하지만 8월 말에 세종문화회관에 서류 합격을 한 이후로 10월 중순까지 단 한 곳에도 서류합격을 하지 못했다. JYP, 광주은행, AZ 네트웍스, 빙그레, 나이스정보통신, 도로교통공단, 에듀윌, 오리온, 이마트, 충남테크노마트, LF 몰, 머니투데이, 한국 서부발전소, 한국어촌어항공단…… 2019년 가을, 나는 그보다 수없이 많은 기업에 지원했고 떨어졌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이렇게 많이 불합격할 수 있는 걸까. 8월 말부터 10월 중순까지 나는 40곳의 기업에 서류를 썼지만, 결과는 모두 불합격이었다.
10곳 정도 떨어질 땐 의연한 척이라도 했지 20곳, 30곳 40곳이 넘어가자 인생이 우울했다. 기업이 어렵다, 채용을 줄인다, 실업자 수가 늘고 있다. 등등 부정적인 뉴스와 기사만 보다 보니 마음은 더 힘들었다. 서류 합격률이 10%도 안 된다는 기사가 맞구나. 나도 별수 없는 표본이구나. 좌절했다.
좌절과 자기 비하의 끝은 어디일까? 나 같은 경우에는 그 끝이 깊었다. 보통 이런 식이다. 처음에는 ‘정신승리’를 하고자 한다. 불합격 통보를 읽으며 불합격을 시련으로 생각하는 것이다. ‘신은 극복할 수 있을 만한 시련만 준다.’라는 격언이라든지 ‘역경을 반대로 하면 경력이 된다.’라는 명언을 떠올리는 것이다. 그리고 더 나은 미래를 희망차게 바라보기 시작한다.
그래, 나는 이런 시련과 역경도 극복했으니 이제 잘 될 거야.
하지만 시련이 많다고 역경을 최근에 겪었다고 꼭 다음 기회가 성공으로 이어지진 않는다. 하한가를 기록한 주식이 다시 한번 더 떨어질 수 있듯 주가 조정의 끝이 어디인지 모르듯 나는 또 불합격 통보를 받는다. 그러면 더는 정신승리가 불가능하다.
사실 ‘정신승리’는 내 실패에 대한 반성과 대처를 전혀 하지 않겠다는 의지 표명에 불과하다. 마치 수학 공식에 숫자를 대입하듯 실패한 방식에 내 시간을 투입하면 결과는 실패일 뿐이다. ‘운이 나빴다.’고 생각하는 건 ‘정신 승리’보다 차라리 더 낫다. 적어도 ‘운이 나쁘다.’는 분석은 내 방식에는 문제가 없다는 생각이 투영된 말 아닌가? 아무튼 정신승리에 실패한 나는 구체적인 ‘실패의 사유’를 찾기 시작한다.
문제는 여기서 또 발생한다. 헌법 제 27조에서는 ‘형사 피고인’에 대해서도 ‘무죄 추정의 원칙’을 적용하는데 ‘실패의 사유’를 찾는 나는 대놓고 나 자체를 유죄라고 받아둔다. 물론 내 학점, 내 경험, 내 자격증, 내 자소서를 쓴 주체가 나니까 내 잘못은 맞다. 하지만 나의 본성 자체, 나의 인생 전체를 죄악시하며 죄를 뉘우치라고 추궁하는 건 정말 상식과 도덕적으로 심각한 죄를 지었을 경우나 법을 어겼을 때나 하는 것이지 고작 서류 불합격 한 건 아무 죄가 아니다.
그런데도 불합격할 때마다 엄격한 기준으로 정말 깊게 나 자신을 비난하고 죄악시했던 적이 많았다. 차라리 그 죄악감이 내 취업 준비에 조금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좋았을 테다. 하지만 근거 없는 유죄추정, 지나친 죄악감은 나를 위축시킬 뿐 내 취업 준비 아니, 내 모든 인생 전반에 아무 도움도 안 된다.
그냥, 내가 기업에 불합격한 일일 뿐이다. 물론 나도 하반기에만 100곳이 넘는 기업에 서류도 합격하지 못하고 실패했다. 하지만 살아보니 그게 내 인생을 의미하진 않는다. 결코 내 인생의 하자를 의미하진 않는다. 하자로 바라보고 싶다면 사회 구조적인 하자일 뿐 개인의 하자는 절대, 결코 아니다.
드라마 〈미생〉에서 “성공과 실패는 없다”고,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실패와 성공은 문 하나를 여는 행동일 뿐”이라고. “우리가 실패하건 성공을 하건 어차피 문을 열고 들어가 다음 문을 맞이하는 건 똑같다”는 대사가 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저 한 기업에 조금 자주 불합격했을 뿐이다. 어차피 한 기업에는 어떻게든 들어가게 돼 있고 그 기업이 대기업이건 중소기업이건 우리는 다시 문 앞에 서게 된다. 그리고 그 문을 열어나갈 뿐이다.
돈을 벌어보니 내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은 그저 돈이 없었기 때문임을 알게 됐다. 취업에 성공하니 내 부정적인 감정과 상황은 그저 취업을 못 했기 때문임을 알게 됐다. 내 부정적인 감정, 내 지금 부정적인 상황은 결코 내 인생 전체, 내 인성 전체가 잘못됐기 때문에 일어나지 않았다. 인문학과 철학을 겉으로 배운 나는 거인의 격언과 명언을 잘못 이해하고 ‘깨어 있는 듯’ 나를 비난했다. 하지만 내 인생에는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성공과 실패를 하는 게 아니라, 그저 내 앞에 놓인 문을 열고 들어가 다시 문을 마주치고 다시 문을 여는 삶을 산다면, 꼭 지금, 이번에 취업하지 못해도 자격증을 취득하지 못해도 좌절할 일이 없다. 당신은 이미 최선을 다하고 있다. 최선을 다한 인생이 지금 내 현실이라면 그 현실이 설사 불안해 보여도, 실패처럼 보여도 그 현실은 절대 잘못되지 않았다. 떳떳해도 좋다.
원문: The Critics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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