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히 다들 알지 않나. 세상에는 표준형 인간과 비표준형 인간이 존재한다는 걸. 사회가 전면에 내세우며 ‘봐봐, 너도 이렇게 돼야 한단다 알지?’라고 말하고 싶어 안달하는 부류와 표백하고 음소거해 그 존재를 지워버리고 싶어 하는 부류가 있다는 걸.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 개개인은 자신의 ‘주제’를 슬플 만큼 정확히 인지한다는 것도.
이를테면 20대와 30대의 경계를 지나는 여성인 나에게 주어진 미션은 대충 다음과 같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해서 대기업에 취직하거나 혹은 교사가 될 것. 165cm에 45kg의 몸무게를 유지할 것. 돈은 8,000만 원 정도를 모아 32세 언저리에 결혼해 아이를 낳을 것. 무례하게 시비를 거는 사람에게도 언성을 높이지 않고 여자답게 상냥하게 대처할 것.
나는 목격했다. 인생의 어느 기점마다 달성해야 하는 목표가 주어졌고 이를 달성하지 못한 인간들은 무대에서 가차 없이 끌어 내려지는 광경을. 4년제 대학을 졸업하지 못한 친구와 마흔의 나이에도 결혼하지 않은 여자의 이야기는 철저히 지워졌고 그런 것들에 대해 들어본 적이 없는 나는 단 하나의 인생만이 존재한다고 착각했다. 사회가 권장하는 표준형 인간의 삶. 그것만이 유일한 선택지라고 생각했다.
고백하자면 나는 언뜻 보기에 표준형 인간처럼 보인다. 아니, 실상은 표준형 인간을 연기하는 거겠지. 왜냐면 실로 표준형 인간이란 환상이니까. 당신도 아마 그럴 것이다. 아파도 꾸역꾸역 학교에 나오는 착실한 학생. 부당한 일을 당해도 의문을 품지 않는 근면 성실한 노동자. 시어머니의 구박과 남편의 외도에 이혼장을 들이밀기보다는 ‘현명하게’ 대처하는 여성.
세상에 동일한 인간이란 없다
하지만 개개인의 특성을 모두 인정하기에 사회 시스템적으로 많은 비용과 에너지가 소모되며, 대부분의 경우에 사회는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가 있다. 그래서 시스템 효율화를 위해 사회는 가장 기본의 인간상을 만들고 개인이 이 스탠더드에서 벗어나려고 하면 압력과 협박을 가해 통제하려 드는 것이다. 반항아, 사회 부적응자, 좌빨, 꼴페미 같은 주홍글씨를 낙인찍으며.
슬픈 건 개개인이 서로에게 훌륭한 감시자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는 것이다.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너만 유난이냐며, 예민하냐며 라벨링을 한다. 그런 분위기 속에 당신은 스스로를 저 깊은 곳에 봉인해두고 ‘가장 보통의 인간의 탈’을 쓴 채 어설픈 흉내를 낼 수밖에 없다.
진짜 당신은 누구인가. 나로 예를 들자면, 1호선 할아버지가 시비를 걸면 맞서서 이기지 않고서는 잠을 잘 수 없는 사람이고, 아이를 낳는 것은 내 미래 계획에 없다. 학창 시절엔 미대에 진학을 위해 학원을 다닌다는 핑계로 야자를 빼먹어 본 적도 있다. 자유롭고 싶어 하며, 도대체 어느 나라에서 굴러먹다 온 애인지 모르겠는 경계인이다. 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나는 보통의 국민으로 위장한다.
보통에서 벗어나는 건 큰 용기가 따르며 어떤 경우엔 심지어 밥벌이를 위협하기도 한다. 게다가 보통만큼 하는 것 자체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따라서 우리 모두가 당장에 목소리를 내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런 목소리를 조용히 지지해줄 수는 있을 것이다.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당신과 사회가 원하는 표준형 인간 그 어딘가를 살아내는 균형감각을 기르되 사회적 기준에서 벗어나는 나의 다양한 면모를 인정하고 이해하는 게 필요하다.
난 내가 되는 것 외엔 별 관심이 없는데?
남들이 당신에게 뭘 그렇게 예민하냐고 말할 때 화들짝 놀라 내가 정말 예민한 사람인지 스스로를 검열하지 말고 ‘나는 내가 되는 것 외엔 별 관심이 없는데?’라고 무시할 것. 당신이 좀 별나다며 누군가 손가락질할 때 ‘그래서 뭐? 이게 난데’라며 뻔뻔하게 나올 것. 주류가 아닌 당신의 삶을 누군가 부정할 때 ‘나도 여기 있는데?’라고 당당히 목소리를 낼 것.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뿐임을 상기할 것.
나는 듣고 싶다. 비표준형 인간들의 삶이. 결코 친절하지 않으며 야망으로 드글거리는 여자에 대해. 사회가 ‘진짜 직업’으로 인정하지 않는 무언가를 하는 당신과 노년의 사랑에 대해. 다양한 내러티브가 자유롭게 거론될 때 사람들은 그제야 자신에게 다양한 옵션이 있음을 깨닫게 된다. 누군가는 어차피 모든 인생의 디폴트 값은 고난이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같은 고난이라고 해도 남이 밀어 넣은 지옥과 내가 선택한 지옥의 온도는 다르다.
사람들은 그런 당신에게 또다시 별나다며, 나댄다며, 너만 조용하면 다 평화로울 거라며 협박할 것이다. 하지만 세상은 언제나 예민한 사람들과 자기 자신이 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에 의해 변해왔다. 다행히도 이 땅에서 역시 그런 작은 균열이 감지됐으며 그건 내 유일한 희망이 된다.
그런 꿈을 꾸었다
초등학교 시절, 나와 내 친구들은 운동장의 달리기 출발선에 서 있었다. 발밑에 지나가는 풍뎅이 한 마리에 호들갑을 떨며 그저 오늘은 뭐 하고 놀지 고민하던 천진난만한 우리였다. 그런데 저만치에서 선생님이 트랙에 허들을 하나씩 놓으며 우리에게 말했다. 명심해. 달리기를 할 땐 옆을 봐서는 안 돼. 전력을 다해야 하는 거야.
하지만 우리 중 누군가는 분명 달리기에서 일등을 하는데 별 관심이 없었다. 난 저 트랙 밖에 있는 숲속에 뭐가 있는지 궁금해. 뒤를 돌아보니 문득 내 친구 중 한 명은 발이 다쳐 목발을 짚고 있었고 누군가는 롤러 블레이드를 타고 있었다. 선생님은 그런 건 별 중요한 게 아니라는 듯 말을 이어갔다. 달리기가 체육 성적의 20%를 차지하니 모두 열심히 해야 한다고.
친구 중 한 명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나는 운동장 오른쪽의 정글짐으로 달려갈게. 그럼 나는 그네로 달려갈 거야. 지은이 너는? 나는 시소. 우리는 작당 모의를 하는 악당처럼 씩 웃었다. 그리곤 생각했다. 선생님이 정해준 트랙에서 달릴 필요는 없지. 우리는 우리가 정한 길로, 각자의 속도로 달리면 되지. 잠깐 한눈팔면 어때. 벤치에 쉬었다가 가도 괜찮아. 그렇게 출발을 알리는 신호음이 울렸다.
몇 가지 단상들
1. 세상이 예민하다고 손가락질하는 당신의 특성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자. 세상은 예민한 사람들에 의해 변화해왔다.
2. 당신이 세상에 태어날 확률은 400조 분의 1이다. 당신과 같은 인간은 세상에 존재한 적도, 존재할 일도 없다. 그런 우리 모두가 단 한 개의 표본에 저마다를 끼워 맞추려고 하니 잡음이 생길 수밖에. 남들은 다 괜찮아 보이는데 나만 왜 이럴까? 하는 고민은 생각보다 보편적이다.
3. 어떤 이들은 당신의 인생 위에 ‘표준형 삶’이라는 자를 대고 바깥으로 삐져나온 모든 것들을 오려 내려고 한다. 좋은 대학을 나와야지, ‘진짜 직업’을 가져야지, 30대에는 결혼을 해야지. 그들 딴에는 당신을 위한다며 하는 말일 수도 있겠지만 그 아무도 남의 삶을 재단할 권리는 없다. 그리고 당신도 그런 말을 들어줄 의무는 없기에 그저 귀를 닫으면 된다. 건성으로 듣는 척하면서 속으론 내일 점심 메뉴나 생각하자.
4. 우리 사회는 비표준형 인간의 삶에 유독 참을성이 없다. 그런 비표준형 인간의 삶이 가끔 주목을 받을 때가 있는데 바로 그들이 성공했을 때뿐이다. 이를테면 고졸의 사장님이 억대 성공을 이루었을 때. 그저 평범한 고졸의 삶, 40대의 기혼녀, 70대에 이혼한 노인에 대한 이야기는 쉽게 찾아볼 수 없다.
넷플릭스 드라마 〈그레이스 앤 프랭키〉는 비즈니스 파트너였던 두 여성의 남편이 서로 사랑하는 사이였음을 고백하면서 시작된다. 이미 70대가 되어버린 그녀들은 충격을 받지만 이내 서로를 의지하며 삶을 이어나간다. 드라마가 그녀들의 삶을 그리는 방식은 우리가 흔히 ‘노년의 삶’이라고 하면 떠올리는 우울함과는 정반대이다. 그녀들은 매우 유쾌하며 70대가 되었지만 여전히 유치하게 싸우기도 한다. 이렇듯 우리 사회는 표준에서 벗어나는 삶을 더욱 전면에 보여줘야 할 의무가 있다.
5. 나 역시 가끔은 표준에서 벗어난 누군가의 삶에 대해 판단하려는 마음이 불쑥 올라올 때도 있다. 너무도 오랫동안 표준의 삶만이 정상의 삶이라는 메시지를 받아들여 왔기 때문일 것이다. 중요한 것은 내가 지금 누군가의 삶을 내 멋대로 판단하고 있구나라고 인식하고 그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다.
원문: 최지미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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