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관찰하는 시간
간혹 나 자신을 한 발짝 물러나 관찰하는 시간을 갖는다. 내가 보는 것, 내가 먹는 것, 내가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 유심히 본다. 거리를 두고 바라보는 나는 참으로 모순덩어리다. 머리로는 저기로 가자고 가리키지만 마음은 여기에 머물러 있다. 해야 할 건 산더미인데 정작 하지 않아도 될 일들만 늘어놓는다.
세상이나 물질은 기를 쓰고 무질서가 증가하는 쪽으로 변하려 한다는 엔트로피 법칙을 나는 스스로 명확하게 규명하는 것이다. 서면 앉고 싶고, 앉으면 눕고 싶고, 누우면 자고 싶은 생활이 어느새 고착화되고 만다. 그러나 다행인 건, 어찌 되었건 나는 이러한 모순을 알아차리고는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자기비하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용감하게 인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일단 그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행복의 실마리를 잡을 수 있다.
- 랠프 에머슨
미국의 시인이자 사상가인 랠프 에머슨의 말을 돌아보면, 그 또한 분명 나와 같은 경험을 하지 않았을까를 추측해본다. 그도 자기 비하에 빠졌으며, 결국 그것을 알아차리고 인정해 다시 일어나는 모습이 내 머릿속에 그려지기 때문이다. 그의 말에 흔쾌히 동의한다. 나는 ‘자기비하’가 꽤 익숙하고, 그것을 제법 잘 해내기도 한다. 나를 스스로 짓누르며 ‘너는 할 수 없어’ ‘너는 이것밖에 안 돼’라고 소리친 날들이 무수하다.
그 목소리에 주저앉아 아무것도 하지 못했을 때를 돌아보면, 나는 그러한 스스로의 상황을 인정하려 들지 않았던 마음이 컸다는 걸 깨닫게 된다. 다시 일어날 수 있던 원동력은 한 발짝 떨어져 있는 그대로의 나를 인정하고, 내가 나에게 스스로 내민 손으로부터 나왔다.
내가 나에게 내민 손에는 희망과 행복이 있었다. 주저앉은 나를 힐난하던 내가, 나를 포용할 때 변화는 시작된 것이다. 나를 관찰하는 습관이 생긴 것도 그즈음이었다. 현실을 마주하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용기가 생긴 때라 말해도 좋다.
‘자기 효능감’이라는 행복
자기비하의 시간이 두려운 건, 바로 나 자신이 불행하다는 마음이 들어서다. 사람은 누구나 행복을 바란다. 그 행복은 외부로부터도 오지만, 이미 많은 사람은 내부로부터 나오는 행복이 더 크고 더 오래간다는 걸 잘 안다. 이것은 ‘자기 효능감’과 관련이 되어 있다.
‘자기 효능감’은 ‘어떤 상황에서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다는 기대와 신념’으로 캐나다 심리학자인 앨버트 밴듀라(Albert Bandura)가 제시한 개념이다. 이를 통해 사람은 ‘자신의 쓸모’를 가늠한다. 이것이 넘쳐나면 자신감을 얻게 되고, 반대의 상황이라면 자기비하에 빠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좋을 것이다. 내가 해야 하는 일, 하고 싶은 일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그것을 하나하나 빠짐없이 실천해 목표를 달성한다면? 그 달성한 목표를 바탕으로 내가 이루고 싶은 것들을 지속적으로 성취해낸다면? 그래서 나는 뭘 해도 되고, 뭘 해도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이 든다면? 이것을 ‘행복’이라는 말 외에 다른 것으로 달리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싶다.
내 행복은 소비적인가, 생산적인가?
앞서 언급했지만, 행복은 외부에서 오기도 하고 내부에서 발현되기도 한다. 사실 행복은 철저히 ‘순간’이다. 눈 깜짝할 새 지나가는 것이 행복이다. 그래서 잘 알아차려야 한다. 여기에 하나 더. 행복의 흐름과 방향을 알아야 한다. 외부에서 오는지 내부에서 오는지. 무엇으로부터 주어진 것인지, 내가 만들어낸 것인지.
이것에 따라 소비적인 행복과, 생산적인 행복이 나뉜다. 어떤 것이 더 좋고 나쁘다는 것을 말하자는 건 아니다. 나는 그것들을 ‘알아차리고 인정’하는 것에 더 초점을 두고자 한다. 그래야 행복의 실마리를 찾아낼 수 있다. 분명한 건, ‘소비적인 행복’이 일회성이라면 ‘생산적인 행복’은 조금 더 강한 지속성을 갖는다는 것이다.
‘소비적인 행복‘은 외부로부터 오는 경우가 많다. TV를 볼 때, 쇼핑을 할 때, 맛있는 것을 먹었을 때. 그때 느끼는 희열과 행복감은 분명한 만족감이다. 내가 만들어 내지 않았지만, 그것은 나에게 긍정적인 경험과 감정을 선사한다. 아니, 어쩌면 내가 만들어낸 것이 아니므로 자발적이지 않은 것에서 오는 기대치 못한 그 어떤 것으로 인해 내 오감은 만족을 얻고 행복감을 느꼈을지 모른다. 다만, 그 만족감 이후에 오는 공허함은 누구나 느껴봤을 것이다.
반면 ‘생산적인 행복‘은 내가 만들어낸, 내면으로부터 나오는 만족감이다. 나는 이것밖에 안 된다는 나에게 넌지시 내민 손을 잡고 일어나 보면, 나는 생각보다 대단한 사람이란 걸 깨닫게 된다. 다시 일어나 가던 길을 가자고 마음먹으면, 행복감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게다가 그 길에 맞이하는 크고 작은 성과는 내 마음을 다시 설레게 한다.
그 가슴 벅참은 말과 글로 표현하기가 어렵다. 갑자기 세상 모든 것이 내 것 같고, 나는 무엇이라도 이루어낼 수 있는 슈퍼히어로가 된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다. 외부로부터 온 행복감은 어느 순간 그 한계를 드러낸다. 그러나 내면으로부터 오는 행복감엔 역치가 없다.
생산을 위한 소비, 소비를 위한 생산
내가 생산과 소비를 선과 악 같은 이분법으로 보지 않는 데는 이유가 있다. 그 둘은 공생관계이기 때문이다. 마치 유가 있어야 무가 있고, 무가 있어야 유가 있을 수 있는 ‘유무상생’의 개념과도 같다. 소비 없는 생산은 있을 수 없고, 생산이 없는 소비는 행해질 수 없다.
주의해야 할 것은 무조건적 ‘생산’이나 무조건적 ‘소비’로 쏠리는 생활 패턴이다. 생산으로 너무 치우치면 공급과잉이 일어나 강박이 생기고, 소비에 너무 치우치면 주체성을 잃어 자기 비하에 빠질 수 있다. 그 둘의 관계가 공생이니, 우리는 이것을 잘 활용해야 한다. 소비를 하더라도 생산을 위한 소비를 하고, 생산을 할 때 양질의 소비가 일어날 수 있도록 심혈을 기울이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이제 나는 TV를 보더라도 그냥 보지 않는다. 재밌는 부분은 재밌게 즐기되, 이 프로그램의 목적이 무엇인지 그리고 이 사람들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무엇인지를 곱씹으려 노력한다. 영화와 독서 또한 마찬가지. 그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것이다. 그 의미는 내 생각이 되고, 사색이 되며, 글이 되고 또 다른 콘텐츠가 된다.
자극은 외부로부터 왔지만, 그것을 해석해 생산물로 만들어내는 노력은 내부로부터 나오게 된 것이다. 예전엔 일방적이었던 소비가 이제는 한 방향에 머물지 않는다. 말 그대로 ‘생산을 위한 소비’의 면모를 갖추게 된다. 이것이 누군가에게 가치 있게 소비되길 바라며 만드는 생산물은 질이 다르다.
스스로를 관찰해 도통 부지런하지 않고, 실망스러운 모습이 연이어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때. 생산적인 행복을 추구하려 노력한다. 그러면 그 행복을 외부가 아닌 내면에서 찾으려 노력하고, 외부에서 오는 행복감이라도 어떻게 내면화할 것인지 고민하게 된다.
해야 할 일들은 산더미이고 하기 귀찮은 것투성이지만, 뭐 하나라도 생산을 해내 보자고 마음먹으면 기어이 움직이게 된다. 생산과 소비 그 어느 쪽으로 쏠리기보다는, 그 대척점에 있는 것을 고려하며 균형을 맞춰 나가야 한다. 그 쏠림과 균형 맞추기의 사이에서. 내가 해내고자 하는 것들은 생각보다 더 많이, 그리고 빠르게 이루어진다.
지금 나는 어떤 행복을 추구하는가? 소비와 생산 중, 나는 어느 쪽에 더 쏠려 있는가? 나는 나 자신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가? 생산적인 소비와, 소비를 위한 생산의 관계를 구분하고 통합할 수 있는 관점을 지녔는가? 그래서 나는 오늘 무엇을 생산해낼 수 있는가?
오늘도 나는 수많은 질문을 던지며, 주저앉은 나에게 다시금 손을 내민다. 더 많은 것에 도전할 수 있도록, 더 많은 것을 해낼 수 있도록!
원문: 스테르담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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