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 행복, 또는 불행하세요?
직장인이 하루 중 느끼는 행복과 불행은 감정이 널뛰느라 종잡을 수 없다. 하루를 마감하는 시점에 감정에 대한 물리적, 화학적 합의 평균이 자신의 만족 기준보다 높을 때 우리는 행복한 하루를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스로 정한 평균도, 행복과 불행을 가르는 기준도 남에게 있다. 이 사실을 깨우치지 못한 보통의 직장인은 자신만의 행복을 영원히 찾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만 느끼는 행복’을 찾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
남들처럼, 남들만큼, 남들 이상, 남들 미만
우리는 (어쩔 수 없이) ‘비교하거나 당하는 환경’ 속에 노출되어 있다. 경제적·사회적 여러 기준에 맞춰 나와 남을 비교하게 되고, 그 결과로 어느 정도의 수준에 있는지를 파악하며 살아간다.
집단이 함께 하는 사회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 더 나아지기 위한 모험적 선택을 하려고 해도, 사회의 큰 흐름이 획일화 또는 표준화된 교육 과정을 밟다 보니 남과 다른 선택을 하기란 보통 용기를 가지고는 어렵다.
그렇게 직장인이 되면 학교가 곧 직장이 된다. 그래서, 학교에서 적용된 프레임이 직장에서도 그대로 이어진다. 같은 레벨인 줄 알았던 누군가가 나보다 더 빠른 승진을 하거나, 뒤처져 있던 누군가가 돈을 벌어 먼저 집을 구하는 등 눈에 보이는 것들에 대한 손쉬운 비교로 다소 조급해지기도 한다. 오래도록 자리 잡았던 비교의 프레임 속에 ‘남들’이라는 기준점이 피부로 쉽게 와 닿는 때가 온 것이다.
안타깝지만, ‘행복과 불행의 기준이 모두 ‘남들’이 되기도 한다. 각자가 판단한 것을 바탕으로 비교하고, 그들보다 앞서거나 뒤쳐진 것을 눈으로 확인하며 스스로의 행복과 불행을 판단한다. 안타깝지만 하고 싶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그중 일부는 ‘거울효과(상대방을 묘하게 따라 하는)’를 불러오거나, 우월감을 가져온다. 비교의 프레임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은 여전히 쉽지 않다.
직장에서는 서로를 비교의 관점으로 바라본다. 철저하게 내부 경쟁이 당연시되는 조직들이 많다. 사람vs사람을 비교하는 것을 일반화한다. 심지어 다른 직무에 다른 목표를 위해 일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모두 공통된 기준으로 평가하려는 시선이 존재한다. 예컨대 근면성실 같은 것 말이다. 마치 학교처럼, 지각하지 않는 것을 공통의 가치(당연한 것을 강조하는 것)로 지나치게 강조하는 일들이 있다.
이 과정에서 지나치게 타인의 시선을 의식한 ‘나 답지 못한 생각과 행동’이 훈련(숙련)된다. 비교군으로부터 뒤처지지 않기 위해, 때로는 그들을 압도하고 싶어 한다. 나를 평가하는 시선에 맞춰 스스로를 개조 및 개발하려 한다. 누군가에게 잘 보이기 위해 하는 여러 시도는 내 의도와 관계없이 나를 변하게 만든다. 최종적으로는 비교 우위에 따른 행복과 불행이 결정되는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비교 우위에 의한 우월감으로 행복을 느낀다면, 진짜 행복을 찾지 못한 것이다. 오래도록 경험한 ‘자연스러운 남과의 비교’는 남과 나의 수준 차이를 결정짓는다. 그 결과로 스스로를 그들보다는 위 또는 아래로 보며 다양한 감정적 소회를 느낀다. 이는 결국, 행복과 불행을 판정하는 기준으로, 나 또는 타인의 수준을 판단하는 기준이 된다. 심하면 사람을 서열화 또는 무리를 구분하는 등으로 발전한다. 물론 일종의 편 가르기는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본의 아니게 타인에 해를 입힐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부분이 남보다 뛰어나다고 하면, 유독 우월감을 느끼는 이들이 있다. 심지어 그 우월감이 스스로가 느끼는 최대의 행복이라 여기며 살아간다. 이런 사람들에게 불행은 간단하다. 어떻게 해서든지 ‘남들 이상의 무언가’를 갖기 위해 노력하고, 이를 달성되지 못하면 그게 최대의 불행이다. 그래서 더더욱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지향하고, 달성하려고 애쓴다. 그 노력은 철저히 압도하기 위한 것이 된다.
‘남보다 우월하기 위한 노력’은 때론 스스로를 망가뜨릴 수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 ‘결과 중심의 행복’을 전부라고 여길 수 있다. 그래서 코칭할 때 진정한 행복을 느끼고 싶거나, 발견하고 싶다고 하면 우선 ‘자신보다 못한 사람을 보세요’라고 이야기하는 편이다. 거기서 만약 다른 곳에서 느껴보지 못한 우월감을 느낀다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서는 절대 행복을 누릴 수 없도록 학습된 것이다. 거꾸로 말하면, 우월감을 느끼지 못할 때는 결국 불행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그러나 과정이 행복해야 오랫동안 지속할 수 있다. 이처럼 한쪽으로 치우친 행복과 불행의 인식은 일과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해, 스스로 지치게 만든다. 나의 미래 또는 함께 하는 이들(조직)의 미래까지 고려하지 않은 채 다소 이기적인 태도를 취하게 되기도 한다. 그 결과 균형이 무너진 목적과 목표를 만들고, 실제로 목표 달성을 위하여 일을 할 때도 오로지 자신만을 보게 만드는 것이다.
세상의 중심이 ‘나’라는 인식이 잘못되었다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타인도 그 중심에 충분히 설 수 있다. 게다가 함께 하면 더 많이, 더 멀리, 더 크게 무언가 성취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야 한다. 때로는 그 중심이 되지 못하더라도 충분히 행복할 수 있는 기회(세부적인 과정과 결과)가 있다는 것을 모른다면, 자신의 성장과 타인 및 조직의 성장을 리드할 기회를 갖지 못해 더 큰 일을 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하기 위해 ‘자기혐오’를 멈추고 자신만의 행복에 귀 기울이세요
살아있다면 혹은 현재 위치를 오랫동안 고수했다면, 행복할 가능성이 있다. 겉으로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전과 달라진 모습을 스스로만 발견하지 못할 뿐이다. 타인으로부터 인정과 존중의 시선을 더 많이 느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간과한 채 혼자서만 자기혐오를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할 것이 자기혐오이다. 자기혐오는 스스로를 더욱 조급하게 만들거나, 옥죄는 듯한 느낌을 갖게 한다. 또한, 그 비교군을 과거의 자신이 아니라, 비교의 대상이 되는 누군가의 일부분 혹은 전체로 두면서 ‘절대 갖지 못하는 것, 또는 할 수 없는 것’ 등을 나도 모르게 강요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 혐오는 강력한 열패감을 가져오기도 한다. 어떤 부분이 부족하다고 느끼면 패배감을 느끼며 좌절하고 낙담한다. 물론, 긍정적으로 이를 발산하는 승부욕이 다분한 타입은 ‘어떻게 해서든지 지금보다 더 나아진 자신의 모습을 위해 노력해야겠다’라고 다짐하고 실제로 노력을 실행에 옮긴다. 노력의 과정 중에 갖지 못했던 강점을 갖기도 하고, 더 크고 강력한 상대를 만나 좌절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가 가진 승부욕 때문에 발생한 일이지, 자신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새로운 행복 프레임 설정’을 한 것은 아니기에 그 한계는 분명히 존재한다. 따라서, ‘나만의 행복’을 찾기 위한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한다.
물론 쉽지 않은 일이다. 남들을 따라가기만 해도 바쁘고 벅찰 때가 많다. 하지만 이제는 세상이 다원화되었다. 누군가를 좇는다고 해도 그가 될 수 없는 세상이다. 내 행복을 찾고 싶다면, ‘나 다움’이 무엇인지를 알기 위한 노력을 일상 속에서 계속할 수 있어야 한다.
- 올바른 개인주의를 갖추는 것, 타인의 취향과 가치관을 존중하고 동시에 같은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이기주의가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한다)
- 조직에 속했다면 원리 원칙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가 해야 할 일에 대한 운신의 폭을 상의·협의·합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비즈니스 계획과 스스로가 그리는 커리어가 크게 동떨어지지 않도록 해야 한다. (커리어가 성장하고 지속하기 위해서는 조직과 상생할 수 있어야 한다)
- 일을 통해 만족시켜야 하는 대상에 나를 포함시킨다. 단순히 타인의 기대에 충족하기 위해 일하기보다는, 내 기대가 내 일에 심어질 수 있도록 한다(타인의 기준에 맞춰 일하는 것은 스스로를 소모한다고 느끼게 만드는 가장 큰 원인 중에 하나이다).
- 일에 대한 의미와 가치를 여러 방향으로 두고, 시의적절한 목표를 통해 성취감을 잃지 않도록 해야 한다. (대부분의 커리어에서 돈과 명예의 상관관계는 ‘상호 보완적’이다. 한쪽을 우위에 둔다고 해서 나머지를 포기하는 게 아니라, 뒤따라 나타나는 것이라 생각해야 한다.
- 비교 대상을 ‘과거의 나’에 두고, 어제보다 나아진 오늘과 내일의 나를 위해 어떤 전략적 투자를 지속할 것인지에 대해 꾸준히 시도가 필요하다(같은 일만 하는 것은 스스로의 발전을 저해하는 선택이다).
인간의 생존은 ‘행복의 욕구’로부터 나타났다. 물론 각자가 기대하는 실질적인 행복의 수준 및 상태는 천차만별일 것이다. “이렇게 살아서 뭐해…”라는 마음이 들다가도, 막상 작은 행복 덕분에 살아갈 수 있다. 단, 그때 마주친 행복을 스스로 기억하려고 하고, 이를 반복하려고 해야만 우리는 더 나은 생존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자신이 언제 행복하고, 그 행복을 위해 어떤 노력과 고난을 거쳐야 할지, 뛰어넘어야 하는지를 알 수 있다면 스스로의 행복과 불행을 정할 기준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 선택적 노력을 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원문: 이직스쿨 김영학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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