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먹고 싶지 않은데 커피를 시켜야 할 때가 있습니다. 여럿이서 밥을 먹고 다 같이 후식을 먹으러 가거나, 할 일이 있어 카페에 앉아야 할 때 등이죠. 합리적 소비자인 저는 이럴 때 ‘제일 싼 거’를 시키는데요. 뉴욕에서 이런 경우가 생기면 뭘 시킬지에 대해 오늘은 알아보겠습니다.
나라마다 커피의 기본은 다릅니다. 프랑스나 이태리에서 커피의 기본은 에스프레소로, 설탕을 넣어 함께 먹죠. 한편 한국에서 커피의 기본은 아메리카노입니다. 고민하기 싫을 때 늘 안전한 선택, 카페 알바도 함께 행복한 선택. 그렇다면 미국 커피의 기본은 뭘까요. 당연히… 아메리카노? 라고 생각했던 저의 안일함을 반성하게 된 일화입니다.
뉴욕에 온 지 두 달 정도 됐을 때, 저는 콜럼비아 대학교 안에서 작은 매점을 발견했습니다. 한국의 대학교들에도 있는, 학관 한켠에 자리해 저렴한 가격에 커피와 베이글 등을 파는 카페 같은 곳이죠. 블랙커피를 먹고 싶어진 저는 가진 동전을 세며 아메리카노를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직원은 저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며 말하더군요.
야… 우리 아메리카노는 없어.
엥? 아니, 커피를 판다며. 저 표시(Coffee)는 뭐여? 라고 물어보니까 커피는 있답니다. 대관절 이것이 무슨 상황인지?
하릴없이 저는 “그럼 커피 줘보슈…” 하고 옆에 서서 침착하게 그의 동작을 관찰했습니다. 그는 종이컵을 꺼내 커피포트에서 따끈한 드립 커피를 따라 제 앞에 내놓았습니다. 향이 고소하고 아주 연한 게 커피를 못 드시는 칠순의 우리 큰이모님이 즐기셔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그런 커피였습니다. 1불짜리 한 장과 동전 몇 개를 내고 난 후 커피를 들고나오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군요. 그런데 굳이… 아메리카노가 없다고 할 것까지 있었나?!
사실 저에게 커피란 1. 우유가 들었냐 안 들었냐, 2. 단맛이 있느냐 없느냐 정도의 구분만이 의미 있는 일종의 생존형 음료입니다. 그래서 까만 커피를 원했을 뿐인 저에게는 다소 혼란스러운 상황이 아닐 수 없었죠. 에스프레소 샷이 들어간 ‘진짜 아메리카노’는 아니기 때문에 대충 넘어가지 않고 확실히 대답한 직원의 강직함이 돋보이는 사건이었습니다.
이렇게, 이들이 만만하게 마시는 커피의 기본형은 커피 메이커로 만든 연한 드립 커피였습니다. 카페에 가서 ‘커피’ 주세요(‘아메리카노’가 아님), 또는 레귤러 커피 주세요 하면 나오는 것. 가게에서 무조건 제일 싼 커피가 바로 이겁니다. 심심하면 아메리카노를 마시는 우리와 달리, 미국에서 아메리카노는 커피 전문점에나 있는 Fancy한 커피라는 인식이 있더군요. 한국으로 치면 저는 대학교 매점에 가서 자바칩 프라푸치노나 바닐라 크림 콜드브루 주세요, 한 경우라고 볼 수 있겠네요. 물론 우리나라는 세계 최고의 커피 전문가 집단이 모여 건국한 나라이니만큼, 대학교 매점이라도 화려한 커피의 라인업을 자랑하고 있다는 점을 잊어선 안 되겠습니다.
미드 <오피스>에서도 이런 점들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던더미플린의 직원들 역시 고로록 고로록 내려 마시는 커피머신을 쓰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마이클 스캇 지점장이 직원들을 자신의 새 오피스에 끌어들이기 위해 에스프레소 머신을 들여놓는 장면이 나오죠. 그리 큰 효과는 없었지만… 케빈만이 와서 커피를 마시고 갔던.
그뿐인가요. <빅뱅이론>의 레너드와 페니도,
<가십걸>의 세레나도
시험공부를 위해 밤을 지새며 이런 드립 커피를 마셨죠. 한국에서 드립 커피라 하면 예가체프니 콜롬비아니 하는 원두를 골라서 바리스타의 고집과 정성으로 만들어낸 노동집약적 하이엔드 상품이지만, 기계로 내리는 이 드립 커피는 길거리 카트와 동네 슈퍼 격인 델리에서도 1~2불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팔리고 있습니다.
더 특이한 점은 이 드립 커피에 우유도 타고 설탕도 타 먹는다는 겁니다. 믹스커피로 이미 당을 충전한 한국인들이 아메리카노에 시럽을 넣는 것을 그다지 즐기지 않죠. 하지만 여기서 제가 ‘커피’를 시키면 카페 직원들은 친절하게도 슈가와 밀크는 필요 없냐고 물어보곤 합니다. 그래서 “블랙으로 주세요^^”하고 대답하는 과정을 거쳐야 하죠.
이미 물이 반도 넘는 이 연한 커피에 미지근한 우유를 탄다는 사실도 흥미로웠지만, 라떼가 아닌 블랙 커피를 주문한 사실만으로는 우유를 넣고 싶지 않다는 제 의도를 충분히 전달할 수 없다는 사실 또한 작은 문화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몇 번은 우유를 넣고 먹어 봤는데 애매하고 미지근한 매력이 있더군요. 농도로나 온도로나 적당히 섞인, 전세계인들이 모여 사는 뉴욕을 표현하는 듯한 맛이었습니다.
외국에 살기도 많이 살고 여행도 많이 했지만, 제가 뉴욕에 와서 새로 알게 된 신기한 부분 중 하나였습니다. 아메리카노도 라떼도 아닌 ‘커피’라는 메뉴가 있다는 사실, 그리고 연하고 고소한 드립 커피의 매력까지 말이죠. 다음에 뉴욕에 가실 땐 블루보틀 말고 커피 카트에서 아이스커피 한 잔 어떠실까요?
원문: 뉴욕월매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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