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걸음을 멈추어
살그머니 애띤 손을 잡으며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사람이 되지」
아우의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다.
윤동주의 시 「아우의 인상화」로 이야기를 열어본다. “너는 자라 무엇이 되려니” 하는 질문에 대한 아우의 엉뚱한 대답을, 시인은 “설운, 진정코 설운 대답”이라 평한다. 순진한 아우의 대답에 시인이 슬픔을 발하는 것은, 아마도 냉혹한 현실을 살아야 할 해맑은 아우의 얼굴 앞에서 느낀 안쓰러움 까닭일 테다. 한편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올곧은 삶을 살고자 끊임없이 성찰했던 시인임을 알기에, ‘사람이 된다’는 대답이 주는 위대한 의미 앞에 서성이게 된다. 우리는 ‘사람이 되는’ 삶을 향해 지금 나아가는가?
사실로서의 역사와 기록으로서의 역사
이어 오늘의 문장 앞에 도달한다. 역사를 공부한다면 첫 번째로 접하게 되는 문장, 역사 교과서의 첫 장을 여는 질문, 역사 수업의 첫 번째 주제임과 동시에 인문 필수 교양서적으로 잘 알려진 에드워드 카 저작의 제목으로도 유명한 문장이다. 그래서일까, 그 답 또한 너무 잘 안다 여기고 쉽게 건너뛰는 질문이기도 하다. 사실로서의 역사, 기록으로서의 역사,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 딩동댕, 이제 본격적인 역사 이야기로 넘어가 보도록 할까?
그런데 잠시만, 이에 대해 조금 더 하고 싶은 말이 있어 마음 급한 사람 손목을 붙들어 본다. 조금만 더 생각해 보고 갑시다. 우리는 정말로 역사란 무엇인지 아나요? 학술적인 차원에서, 우리는 역사에 대한 정의에 대해 그럭저럭 공부할 수 있다. 하지만 정답을 찾아야 한다는 강박을 조금 내려놓고 나면, 각양각색의 대답이 슬며시 고개를 든다. 사람으로서 삶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삶에 대한 개똥철학 하나쯤은 있기 마련이니까. 우리가 살아온 이야기가 곧 역사라고 한다면, 역사란 무엇이냐는 물음은 산다는 게 무어지? 또는 우리는 무엇이 되려니? 하는 질문의 다른 이름이 되기도 한다. 이 물음 앞에서 한 번은 고민을 해 보아야 하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헤겔은 역사가 가진 이중적인 의미에 대해 언급한 바 있다. 과거에 일어난 사실 그 자체(res gestae)로서의 역사와 이야기(담론)로서의 역사(historia rerum gestarum)로. 개똥철학 이야기를 하려는 듯하더니 갑자기 머리 아픈 학술적인 이야기로 급하게 문장을 선회한 이유는, 우리 사는 이야기도 사실 이 안에 어느 정도 묶여 있기 때문이다. 인내심을 가지고 옛날 사람들의 이야기를 조금만 더 들어보자. 19세기 독일의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에게는 지금 이 맥락에 어울리는 뻔한 이름이 하나 붙어 있는데,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이름,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가 그것이다. 그는 1824년 『라틴 및 게르만계 민족의 역사』라는 책을 썼는데, 책의 내용보다 서문의 문장 하나가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이 책은 있는 그대로의 사실(Wie es eigentlich gewesen)을 다루고자 했다.
당대에 유행한 경험주의/실증주의를 역사학 분야에도 반영하여, 학문적인 정립을 이루었다고 말할 수 있겠는데, 간단히 설명하면 이렇다. 인간은 오감을 통한 경험적인 관찰을 통해 세계에 대한 인식을 획득한다. 이것이 경험이다. 축적된 경험 속에서 인간은 이성을 활용하여 일종의 패턴을, 법칙성을 찾아낸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실증할 수 있는 것만이 참된 지식이며, 그렇지 않은 부분은 허구로 구분된다. 랑케는 이런 철학적인 관점에서, 역사학의 궁극적인 목표를 역사 지식의 획득, 즉 원사료(original source)를 이용하여 과거 사실을 밝혀내는 것 자체로 삼았다. 물론 독실한 크리스천이었던 그는 헤겔과 마찬가지로 역사를 움직이는 것은 신의 섭리라는 식의, 실증주의 관점에서 ‘허구’에 해당하는 주장을 공공연하게 하기도 했지만, 어쨌든 우리에게 그는 사실로서의 역사의 대명사로 남았다.
당연히 반론이 뒤따랐다. 이런 역사는 인간의 복잡하고 다채로운 삶의 세계를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인도의 시인 타고르(Tagore)는 역사학자이기도 했는데, 랑케식의 역사에 국한하지 않는 넓은 포용력의 필요성을 이야기했다. 역사 지식의 형성 과정에 대한 반론도 있었다. 있는 그대로의 과거의 사실이 있다고 치자.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이지 엄청 많이 있다. 그럼 그걸 다 어떻게 공부해? 다행히도 그 무수한 과거의 사실 중 일부만이 운 좋게 사료에 담기게 된다. 이런 식으로 역사 기록을 남기는 사람들을 역사가라고 부른다.
역사가는 수많은 사실 중 어떤 것을 기록으로 남기는가? 그야 모든 것을 다 쓸 수는 없으니까, 그 자신이 의미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취사선택하기 마련이다. 어? 취사선택이라고? 그러면 이 과정에서는, 그렇다. 분명히 역사가라는 사람의 주관이 개입한다. 랑케는 신교도였다. 그래서 교황청의 자료 보관소 열람을 거절당했다. 교황들의 행적을 다룬 랑케의 기록에서, 교황청에 대해 호의적인 대목을 찾아보기 어려운 것은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기록에는 주관이 들어간다. 눈에 보이게 드러날 수도 있고, 선택과 배제의 작업을 통해 은밀하게 숨겨 놓을 수도 있다. 선택과 배제의 작업이 드러나지 않도록 매우 은밀하게 숨겨 놓은 대표적인 책에는……, 충분히 예상 가능했으려나? 역사 교과서가 있다.
일기를 쓴다. 일기는 역사 기록의 아주 좋은 예가 된다. 과거의 무수한 사실에 대한 취사선택의 기록이라는 점에서 정확하게 맞아떨어진다. 어려서부터 일기 쓰기를 강요당하면서 배운 바가 있다. 좋은 일기란? 아침 기상부터 저녁 취침까지 시간 순서대로 있었던 일들을 쭉 적는 것은 결코 좋은 일기가 아니다. 그날의 일 중에서 의미 있는 것들, 좋았던 것들,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은 것들을 위주로 자신의 생각을 적는 것이 좋은 일기라고 배웠다.
생각해보면 사실 아침부터 했던 일들을 쭉 적고 싶어도, 일어나서 눈을 몇 번 비볐는지, 화장실에 들어가 몇 분을 보냈는지, 세수를 먼저 했는지 양치를 먼저 했는지 같은 것들을 일일이 적는 것은 불가능하다. 자연스럽게 기록의 대상으로 어떠한 사건을 선택하고 어떠한 사건을 배제하게 된다. 작성자의 가치관, 주관성의 개입이 이루어지는 대목이다. 의도한 바일 수도 아닐 수도 있다. 정리하자면, 과거의 사실은 과거의 기록을 통해서만 후대에 전해지는데, 과거의 기록 자체가 주관성을 반드시 포함한다는 말이 된다.
과거의 기록을 바탕으로 경험해 본 적 없는 과거를 재구성해야 하는 현대의 우리들은 그래서 주춤하게 된다. 과거인이 기록하지 않은 내용은 영원히 알 수 없다. 이미 생산의 단계에서부터 주관이 개입되어 있을 수밖에 없는 역사 기록을 읽는 우리 역시 주관으로 똘똘 뭉친 존재이다. 스스로의 지식과 스스로를 둘러싼 환경이라는 편견의 안경을 쓴 상태에서 과거의 기록들을 읽어 나간다. 오늘날의 우리 역시 무수한 기록 중 어떤 부분을 골라내고(선택), 어떤 부분을 무시하며(배제), 주관의 기록에 자신의 주관을 더해 나간다. 그렇다면 있는 그대로의 사실만 담은 역사라는 것은 과연 가능한 작업인가? 여기까지 오면 랑케에게 과감하게 마지막 빠이빠이를 외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또 잠깐, 누군가의 한마디를 듣고 나니 랑케를 완전히 떠나보내는 것도 꽤 망설여진다. 과거의 사실에 닿는 것이 어차피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은 김에 깨끗이 보내주려 하였는데, 어딘가 석연치 않다. 많이 들어 본 단어가 눈앞에 등장한다. 역사 왜곡. 아무래도 많이 당해 본지라 이 단어 앞에서는 불편한 감정을 숨기기가 어려워진다. 과거의 사실을 무시해 버린다면 창작의 영역으로, 말마따나 소설을 쓰시는 영역에 닿게 된다. 실존 인물이 단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사극이라면 역사는 수식어가 들어가는 게 어색한 것처럼 말이다.
과거의 사실에 닿기 위한 노력도, 그 과정에서 주관이 개입될 수밖에 없다는 인정도 모두 필요하다. 어렵게 어렵게, 드디어 정답에 닿는다. 바로 저 유명한 명제, ‘역사는 과거와 현재의 끊임없는 대화’에 도달하는 순간이다. 역사는 과거(의 사실)와 현재(과거의 사실을 기록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오늘날의 우리)의 끊임없는(지속적인) 대화(상호작용)이다. 깔끔하고, 아름답다. 아름다운 정의다.
개똥철학: 삶과 이야기의 집합
History is a continuous process of interaction between the historian and his facts, an unending dialogue between the present and the past.
완벽한 정의를 찾았기에 여기에서 마무리 짓는다면 속 편할 텐데 그럴 작정이었다면 애초에 이 글을 시작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과거의 사실도 현재의 우리도 모두 중요하다는 견해는 물론 타당하다. 하지만 저 명제의 맹점은, 저것이 비유라는 데 있다. 딴지는 여기서 시작한다.
에드워드 카는 대화라는 비유로 둘 사이의 연관을 설명했다. 대화, 둘 이상의 실체 사이의 상호적인 언어 소통, 너도 한마디, 나도 한마디 나누며 오고 가는 그것이 대화다. 가만 생각해보자. 과거의 사실과 오늘날 우리 사이에는 어떠한 종류의 대화가 오고 갈 수 있을까?
대화라는 게 사실 참 어렵다. 오늘 했던 대화들을 살펴볼까. 내면 깊숙이 눌러 놓은 하고 싶은 말을 다 쏟아내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상대의 기분도 고려해야 하고, 말을 하는 자기 자신의 체면도 살펴야 한다. 감정이 얼굴 밖으로 드러나면 미성숙한 사람, 표현을 감추고 꽁꽁 숨기면 음흉한 사람 취급을 받는다. 과거의 사실과 한 번 대화를 해 보자. 적어도 눈치 볼 일은 없어서 좋겠구나.
그런데 하다 보니 그게 아니다. 과거라는 이 친구는 꿀 먹은 벙어리다. 편식쟁이, 운동 부족의 비만아, 성인병 환자에 과로를 일삼아 건강을 망친 군주, 조선조 세종에 대해 기록을 남겨 보려 한다. 세종 원년의 기록. 상왕으로 물러난 아버지 태종이 아들 임금에게 잔소리를 한다. “아들이 사냥을 좋아하지 않는 건 아는데, 뚱뚱해서 운동을 좀 해야 하므로 사냥을 시켜야겠다.(주상은 사냥을 좋아하지 않으시나, 몸이 비중(肥重)하시니 마땅히 때때로 나와 노니셔서 몸을 존절히 하셔야 하겠으며, [세종 즉위년 10월 9일])” 태종은 아들 걱정을 많이 한 군주였다.
세종 4년의 기록. 아버지의 상을 지키며 과로로 고생하는 임금에게 신하들이 청한다. “아버지(선왕)께서도 예전에 임금님이 고기 없이는 밥 안 드시는 거 알고 나중에 당신 돌아가신 다음에도 에프엠대로 규정 다 따르지 말고 고기 먹으라고 하셨잖아요.(‘주상은 고기가 아니면 진지를 들지 못하니, 내가 죽은 후 권도를 좇아 상제(喪制)를 마치라.’고 하셨으니, 이는 곧 전하께서 예법을 지키시고 지나치게 슬퍼하시므로, 앞으로 건강을 해하실까 미리 아시고 염려하셨사오니, [세종 4년 11월 1일])” 독서를 많이 하여 생겼다는 안질도 실은 당뇨 합병증 증세일 수도 있다고 한다.
세종은 식욕만큼이나 성욕에도 충실한 임금이었다. 7명의 부인에게서 낳은 자식이 무려 18남 4녀. 자녀의 수가 조선 임금 중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힌다……같은 이야기만으로 세종의 일대기를 정리한다면 어떨까. 거기다 세종에 대한 여러 기록과 다른 왕족들의 초상화를 참고하여 복원하였다는 저 어진을 덧붙이며 이야기를 끝맺는다면.
이 후손 놈이 누구 덕에 편하게 글 쓰는지도 모르느냐, 하고 관 뚜껑을 박차고 일어나 달려들어도 참 좋을 텐데, 당연히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내가 잘한 것이 얼마나 많은데 그런 것은 다 제쳐두고! 하고 과거는 말하지 않는다. 과거는 나서지 않는다. 과거와 현재와의 끊임없는 대화는 이루어질 수 없고, 이루어진 적도 없다. 다만 침묵하는 과거 앞에 오늘날 우리의 독백만 허공을 가를 뿐이다.
그렇다면 에드워드 카의 정의는? 그것은 어쩌면 과거와 현재의 불공평하고 부조리한 관계를 아름답게 포장한 것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주관이 담겨 있지만 여전히 객관성을 담보할 수 있는 것이 역사 서술이라는 모순된 명제를, 마치 진실인 양 은폐하여 온 것일지도 모른다. 아무렴 어떠한가. 어쨌든 과거의 사실에는 닿기란 불가능하고, 오늘 우리가 떠들어대는 소리가 소음뿐이라 하더라도 막을 방도는 없는데.
역사란 무엇인가? 잘 모르겠다. 시간은 계속 흘러가고, 그것을 거스를 방법은 없다. 스티븐 호킹 박사가 타임머신이 가능하다고 했을 때, 잠시 설렘을 느낀 것은 미래가 궁금해서가 아니었다. 과거의 어느 시점을 다시 볼 수 있다면, 고스란히 다시 재현해 낼 수 있다면 하는 기대였는데 역시나, 과거로의 시간 여행은 이론적으로도 불가능하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엔트로피는 계속 늘어나고……하는 부분들은 문송한 관계로 설명하기 어려울 것 같다. 하지만 다른 이야기는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역사를 통해, 지나간 시간의 이야기들을 통해 우리는 무엇을 보아야 할까?
좋아하는 사진이 한 장 있다. 내게 역사의 이유가 되어 준 사진이다. 교과서에도 실릴 만큼 원래부터 유명한 사진이었고, 드라마의 마지막을 장식한 덕분에 더욱 유명해진 사진이다. 1904년 영국인 기자 하나가 러일 전쟁을 취재하러 한반도에 왔다. 작은 나라는 아직 망하지 않았지만, 이제 이를 누가 차지할지가 곧 결정 날 판국이었다.
승자가 결정 난 이후 그는 이 나라를 다시 찾았다. 을사늑약이 맺어졌고 작은 나라는 보호국이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까지 획득한 다음의 일이었다. 제국주의의 화살은 이 나라의 형식적인 군대마저 흩어 버렸다. 해산된 군인들은 자신들만의 싸움을 계속했다. 정미의병, 후기의병 같은 이름으로 외우곤 했던 이들이다. 영국인 기자는 이들이 꽤 인상 깊었던 모양이다. 여기저기 어려운 곳을 쏘다니며 취재를 하였고, 그 덕에 그들의 모습을 사진 한 장에 남길 수 있었다. 기자는 이들과의 만남과 대화를 기록으로도 남겼다.
“당신들이 여기에 있는 줄 알면 일본군이 틀림없이 이리로 올 텐데, 야간 공격에 대한 어떤 경계 태세를 취하나요? 보초는 세워 놓았나요? 개울 쪽 도로는 방비합니까?”
“보초는 필요 없습니다. 주위에 있는 한국인 전부가 우리를 위해 감시를 해줍니다.”
나는 다른 의병군의 조직에 대해 여러 가지로 그에게 물어보았다. 그들은 도대체 어떻게 조직되어 있는 것일까? 그 대장이 나에게 해준 이야기로 미루어 보면 그들은 실제로 전혀 조직이 되어 있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각각 흩어져 있는 몇 개의 무리들이 아주 엉성하게 결합되어 있는 것에 불과했다. 각지의 부유한 사람들이 기금을 제공했다. 그것을 그가 산재해 있는 한두 사람의 의병에게 은밀히 건네주면 그들이 각각 자기 주위에서 자기편을 모으는 것이었다.
그는 자기들의 전도가 반드시 밝은 것만은 아님을 인정하였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으로 좋습니다. 일본의 노예로 살기보다는 자유로운 인간으로서 죽는 편이 훨씬 낫습니다”라고 그는 말했다.
- F. A. 맥켄지 저, 김창수 역, 『조선의 비극』, 을유문화사, 1984
을사늑약과 함께, 그들은 나라가 망할 것임을 알았다. 그래서 무기를 들었다. 그러나 이기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도 알았다. 우리는 죽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전투를 앞둔 이들은 담담했다. 정신적인 무장, 패기 같은 것은 보이지 않았다. 눈앞에 다가올 죽음을 순순히 맞이할 심산이었다. 그럼에도 그 이유는 분명히 알았다. 노예로 살기보다 자유민으로 죽겠다. 이들은 임금을 위해, 쇠약한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다고 말하지 않는다. 애국심이라는 말로는 전부 담아낼 수 없는 인간의 존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사진의 왼쪽 앞줄에서 세 번째, 그러쥔 총을 앞세우고 카메라를 노려보는 아이가 있다. 잘해야 10대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모습이다. 엄마 손에 억지로 깨워져, 절반쯤 감긴 눈을 해서 학교에 가고, 편의점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고 학원 뺑뺑이를 돌았을 그럴 나이. 똑같이 이 땅을 살았던 소년에게 다른 것이 있다면 100년 일찍 태어났다는 사실뿐이다. 전혀 다른 상황과 환경 속을 살아야만 했던 인생의 변수는 운명이라는 이름으로 불러야 할까? 그는 그 스스로의 선택으로 펜 대신 총을 들었고, 외국인의 카메라 속의 자신의 족적을 남긴 후 머지않아 죽을 수밖에 없을 거라던 자신의 예측대로 되었을지도 모른다.
이것이 역사다. 삶의 이야기, 당당할 수도, 비겁할 수도 있었던 무수한 인생들과 그들이 자신에게 주어진 운명 속에서 행하였던 선택의 집합체. 그래서 모든 역사는 숭고하다. 의미가 있다. 하나의 짤막한 문장으로 요약된 기록 속에는, 숱한 인생의 이야기들이 빼곡하게 숨 쉰다. 40만 명을 참수했다는 동양 역사서의 한 대목을 읽어 내는 데는 수초도 채 걸리지 않지만, 40만의 시신이 널려 있는 광경은 그 누구도 쉽게 상상해 내기 어렵다. 그들이 살아온 시간들, 그들이 누렸던 감정들, 그들을 기억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또 큰 산이 되어 쌓이고 큰 내가 되어 흘러넘친다. 과거의 사람들은, 영웅들은, 민초들은 특출 나서, 유별나서 그 상황과 환경 앞에 맞닥뜨린 것은 아니다. 유한한 인간으로서, 오늘의 우리는 저들과 다른가?
가끔 동래 부사 송상현을 생각해 본다. 눈앞에 나타난 수많은 적군을 바라보는 그는 두렵지 않았을까? 필경 두려웠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이, 가족들의 안위가 염려되었으리라. 무엇보다 자신이 죽은 이후의 상황을 가늠할 수 없음이 가장 두려웠을 것이다. 동래성을 포위한 왜장에게 그가 서신을 전한다. “싸우다 죽는 것은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戰死易假道難)” 우습게도 우리의 상황과 환경은 꼭 우리의 능력 범위 바깥에서 우리를 둘러싸곤 한다. 눈을 떠 보니 어느 순간 성 밖을 가득 메운 적의 군대를 바라보는 심경.
정도는 다를지언정, 벽에 부딪히고 이룰 수 없는 욕망에 매일을 좌절하는 것이 우리 삶의 연속이다. 그때 우리는 어떤 말을 남길 수 있을 것인가? 역사는 그 길을 보여준다. 역사는 우리와 같은 사람의 이야기이면서도, 우리보다 먼저 삶이라는 것을 경험해 보았던 그네들의 이야기인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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