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근대 조선의 전쟁은 ‘폭염 속 진흙탕’과의 싸움이다: 신미양요를 보는 새로운 시선
당신이 서구 열강의 군대와 맞서는 조선 말기의 병사라고 상상해보자. 무장은 임진왜란 때 쓰던 조총이 전부다. 방탄복은 이불처럼 두꺼운 누비 솜옷이 전부다. 입는 즉시 몸놀림이 둔해질 뿐더러, 죽도록 덥다.
서양 오랑캐의 배는 먼 바다에서부터 포탄을 쏘아 대는데, 우리 조선의 포탄은 닿지도 않을뿐더러 운 좋게 몇 발 맞춰도 적의 철갑선은 끄떡도 하지 않는다. 아무리 조상님의 나라라고 해도, 약소국의 병사가 되는 것은 엔간하면 고르고 싶지 않은 선택지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건 어떨까? 당신에게 새로운 선택지가 주어진다. 병인양요의 프랑스군, 신미양요의 미국군, 청산리 전투의 일본군이 되는 것이다. 외적(?)이 되는 것이 께림칙하긴 하지만, 적어도 훨씬 나은 조건에서 싸울 수 있다. 신미양요의 미국군이 된다. 1200명의 미국군 중에 전사자는 불과 3명, 부상자는 12명이었다. 맨 앞에만 서서 오발탄에 맞지만 않으면, 근세의 전장을 즐기고 무용담을 자랑하고 올 수도 있다.
그러나 불과 몇시간 뒤, 당신은 생각치도 못했던 변수를 만나게 된다. 강화도의 갯벌 때문이다. 전쟁은 머드 축제가 아니다. 뻘 밭에 벗어두고 온 신발을 시작으로 바지와 옷, 군장들이 온통 진흙 범벅으로 못쓰게 된다. 본인의 군장은 물론이고 군수품과 대포, 모든 것을 들고 가야한다.
당신의 상관은 순식간에 상륙해 24시간만에 강화도를 점령하겠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갯벌 200m를 상륙하는데 4시간이 걸렸다. 가까스로 상륙해도 길다운 길은 보이지 않는다. 때는 한반도의 6월이다. 맨발로 강화도의 산길을 걸어 가다보니 열사병자가 속출한다. 역시 ‘GTA 헬조선’에서 좋은 선택지가 있을 리 없었다.
우리는 개항기 조선인의 모습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미스터 션샤인의 낭만적 ‘모던 뽀이’, 혹은 서양식 신무기에 죽창으로 맞서는 무력한 동학농민군을 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너무 막연하다.
오히려 21세기의 한국인이 개항기에 이입하려면, 19세기의 조선인보다는 막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이 더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 관점은 ‘미개하고 무력한 조선’을 낮춰보며 우월감을 누리는 관점 같은 게 아니다. 강화도의 황량한 진흙탕을 하염없이 걷는 미군의 관점이다. 신효승 박사가 EBS의 지식강연 서비스 ‘클래스e’에서 진행한 강의 <전쟁으로 본 한국 근대사>로 바로 그 관점을 제시하고 있다.
2. 제발 일본군 대장 말 좀 태우지 마라 – 봉오동 전투
신효승 박사는 학군장교 출신의 역사학자이다. 자신의 군 경험을 바탕으로 전쟁사연구가로 전업, 덕업일치(…)의 삶을 누리고 있다. 박사 학위 논문도 무장독립운동인 만큼, 근대 전쟁사에 있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퀄리티를 자부한다.
영상에서 가장 재미있는 대목은 9편, 영화 <봉오동 전투>의 역사 자문을 한 대목이다. 자기가 조언한 부분은 거의 반영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제 전장에서는 누가 지휘관인지 숨겨야 하는게 기본이다.
그래서 그렇게 신효승 박사가 신신당부했는데도, 일본군 지휘관 야스가와는 기어이 말을 타고 등장한다(…) 대신 지나가는 식으로 조명탄과 박격포가 있었다고 언급하니까 조명탄과 박격포만 죽어라 등장했다고 한다(…)
신효승 교수는 항일 독립군들이 영화 <봉오동 전투>의 마지막 장면처럼 ‘우리는 독립군 누구다!’라고 외치지 않았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오히려 실체를 드러내지 않으며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유형의 군대였을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그것이 일본군의 입장에서는 더욱더 두려운 종류의 군대이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조선 주둔 일본군, 즉 ‘조선군’은 그렇게 정예 부대도 아니었다고 한다. 절반 이상의 일본군은 지휘관 야스가와를 당일 처음 보는 사이였다고(…) 대부분 일본 각지에서 마구잡이로 뽑혀온 부대였다. 그래서 두만강을 도강하다가도 물살에 떠내려가고, 정박해 놓은 배를 잃어버리기도 한다(!)
침략자 일본의 입장에서 전쟁을 바라보는 순간, 무자비하고 막강한 일본이 아닌 좌충우돌 정신 없는 오합지졸 무리로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순간, 독립군의 진정한 의미와 전략적 성과를 평가할 수 있게 된다.
3. 카트리지 없이 프린터만 무한정 질렀다고? 대한제국 군대의 허상
신효승 교수의 강의는 한국 근대사의 전투를 독특한 시선으로 분해한다. 자신이 잘 모르는 적진에 쳐들어온 외세의 근대적 군대와, 지리적 우위를 최대한도로 활용하는 ‘파르티잔’으로서 조선인의 대항으로 바라보는 것이다.
그 관점에서 가장 날카롭게 비판받는 것은 바로 고종 황제의 대한제국 군대이다. 6편 ‘무섭지 않은 군대 – 대한제국’ 편은 전쟁의 패러다임이 바뀌었는데도 화려한 제복과 외양에만 집착한 군대의 허실을 낱낱이 집어낸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카트리지를 사지 않고 프린터기만 왕창 사들이는 것이 대한제국의 군비 증강이었다.
근대 산업문명의 핵심은 규격화, 표준화이다. 아무리 좋은 총기를 사도 그 총기에 맞는 탄약이 충분히 준비되지 않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대한제국군은 좋다는 총기는 마구잡이로 사들였다. 덕택에 선진적인 후장식 총기의 초기 모형까지 지르는 위엄을 과시하지만, 정작 탄약은 물론이고 총기를 재정비하는 윤활유(=강중유)는 전혀 사들이지 않는다. 그렇게 비싼 총기들은 일회용이나 다름없는 장식품으로 전락한다.
대한제국의 허약한 해군력을 상징하는 물건으로 양무함이 있다. 일본의 잔잔한 내해를 다니던 석탄 운반선은 조선에 와서 군함으로 돌변한다. 내해용으로 사용된 선박이다 보니, 엔진의 힘이 형편없었다. 크기는 SUV인데, 엔진은 소형차 엔진인 격이었다.
그렇다면 이런 선박을 대체 왜 구입했을까? 신효승 박사는 양무함이 크고 화려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크다 보니 무기를 덕지덕지 달아 놓을 수 있었고, 근대화의 상징인 만국기(…)도 달 수 있어 자랑하기에 안성맞춤이었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대한제국의 화려한 군대도 마찬가지였다. 화려한 프랑스식 군복과 정복이 분별 없이 뒤섞여 있었다. 전쟁의 양상은 남북전쟁 이전의 라인 사격에서 최대한 흩어져 적군을 스나이핑하는 근대전으로 바뀐 지 오래였는데, 아직도 화려한 행진과 군악 퍼레이드로 과시에만 몰두했다. 전쟁을 접해보지 않은 군주가 열강에게 금, 은광의 이권을 팔면서 장만했던 ‘무늬만 근대화’는 이렇게 실패로 끝났다.
4. 다시는 호랑이 포수를 무시하지 마라: 조선의 의병전쟁
하지만 허수아비인 정규군에 비해, 진짜 조선의 저력은 다른 곳에 있었다. 바로 의병이었다. 당시 외국인의 입장에서 조선은 풍토병이 끊이지 않는 오지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자신이 사는 지역에 능통하고 풍토병에도 강했던 것이 의병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전투력은 바로 호랑이를 잡는 포수들이었다.
이들은 비록 전근대적인 화승총으로 무장했지만, 호랑이를 불과 10보 앞에서 잡을 만큼 실전에 강했다. 이 사실은 조선 조정도 알고 있어서, 병인양요에서도 대원군이 포수들을 비상 전력으로 활용할 정도였다. 항일 의병장에서 출발해 독립군 장군까지 활약한 홍범도 장군도 바로 호랑이 포수 출신이었다.
신효승 박사는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가 거대한 승전을 거둔 전술적 대첩이 아니라고 강조한다. 열 명을 죽인 전투가, 한 명을 죽인 전투에 비해서 10배 더 중요한 전투는 아니라는 것이다.
심지어 봉오동 전투의 경우, 국내 진공을 시도했던 미산 전투의 위상이 더 클 수도 있다고 평가한다. 오히려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의 진짜 의의는, 간도 지역을 (일본군의 표현으로는)‘무법 지역’으로 만들어 러시아 혁명으로 혼란한 와중에 연해주, 나아가 바이칼호까지 진출하려는 일본군의 전략적 의도를 가로막았다는데 있다는 것이다.
2000년대 중반 인터넷 역사 동호회에서는 이른바 ‘네티즌판 한일전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특히 청산리 전투의 전과에 대해서 교과서 수준의 입장만 고수하다가, 일본 우익 네티즌들에게 역관광(…)을 당한 사례는 치욕스러운 기억으로 남아 있다. 청산리 전투의 전과는 사실 임시정부가 활용하기 위해서 부풀린 측면도 없지 않다. 부풀려진 전과가 청산리 대첩의 진정한 전략적 성과를 가려서는 안 될 일이다. 이번 클래스e 강좌를 통해서 얻을 수 있었던 새로운 식견이라고 할 수 있다.
5. 역사는 ‘갑툭튀’가 아니다
한국사의 흐름만 따라가다 보면 세계사와 ‘진도’가 달라서 종종 충격을 받을 때가 있다. 조지 워싱턴이 조선 정조와 같은 시대 사람이라던가, 전봉준이 빈센트 반 고흐와 동년배라던가 하는 식. 하지만 이런 따로 놀기는 단순히 출생연도 정도에 그치지 않는다.
맥락 없이 근현대사를 보면 이해가 잘 안 된다. 갑자기 프랑스가 쳐들어왔다가 가버리고, 갑자기 미국이 쳐들어왔다가 가버리고, 일본이 갑자기 강화도에 쳐들어와 조선을 개국시키며, 청과 러시아가 한반도에서 일본과 전쟁을 벌이는 ‘갑툭튀’의 연속이 된다. 세계사적인 맥락이 없기 때문이다.
클래스e <전쟁으로 보는 한국 근대사>의 4편은 한국사에서는 잘 들어보기 힘든 청불전쟁이다. 프랑스는 당시 베트남을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 전쟁은 베트남과 중국의 현재 국경을 결정지은 사건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 전쟁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것일까?
바로 같은 시기에 일어난 김옥균의 갑신정변이다. 갑신정변은 임오군란 이후 청의 압도적인 위치가 살짝 흔들리면서 일어났다. 프랑스는 청나라에게 양면전쟁을 강요하고 싶었고, 마침 청나라도 조선에 주둔하던 병사의 절반을 베트남 전선으로 돌리고 있었다.
프랑스는 청을 흔들고자 일본에게 불평등 조약의 개선까지 제안하면서(!)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개입을 부추겼다. 일본이 프랑스의 요청에 따라 조선에 적은 비용으로 개입할 구석을 찾다가 김옥균의 쿠데타를 지원하게 된 것이다. 이게 갑신정변이다. 이렇게 보면, 갑신정변을 세계사적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게 된다.
사실 청일전쟁 이전의 일본은 조선에 영향력을 과시하기는커녕 내부 단속도 급급하던 상황이었다. 심지어 갑신정변 직후에는 청나라 북양해군이 나가사키에 군함을 정박, 청국 수병이 일본 경찰과 패싸움을 벌였는데도 오히려 청나라에게 사과하고 경찰의 도검 사용을 금지시키는 외교적 굴욕까지 겪기도 했다(1886년 ‘나가사키의 굴욕’).
강화도 조약 역시 불평등 조약이라기에는, 조선이 개항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한편 일본의 허풍과 블러핑을 무시했다는 사실도 새롭게 읽힌다. 조선은 이전부터 치외법권적 개념으로 일본인들을 대하고 있었고, 수심 측정이나 관세에도 무심했기에 사과나 배상 없이 개항지를 제한하는 것에만 만족하며 조약을 체결했던 것이다.
모든 사실이 이런 식으로 읽힌다. 청나라 내부의 군벌 알력이 아니었다면 청일전쟁도 일본의 승리가 되지 못했을 것이고, 영국의 적극적인 개입이 아니었다면 일본은 러시아에 도전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런 세계사적 맥락이 없었다면 일본이 한반도를 집어삼킬 수 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신효승 박사님의 조곤한 입담을 듣다보면 어느 순간 자연스럽게 이야기에 녹아들게 될 것이다. 학자로서의 자기 의견을 ‘뇌피셜’일 수도 있다고(!) 겸손하게 말하는 태도도 좋았고, 단순해 보이지만 손이 많이 들어간 자료 이미지도 인상적이었다. ebs에서만 가능한 편집밀레(…)가 아닌가 싶다.
역사란 단순한 사건의 나열이 아니다. 전쟁사도 그렇다. 1) 당시의 군사적인 전술의 흐름, 2) 군사적 행보의 전략적인 맥락, 3) 세계사적인 맥락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역사를 온전히 이해했다고 볼 수 없는 것이다. 클래스e <전쟁으로 본 한국 근대사>는 그 어려운 과제에 성공한 시리즈다. 강력하게 추천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