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2월 도쿄의 오다이바, 일본 관동지방에서 가장 큰 1,400평 규모로 무인양품이 새로운 매장을 선보였다. 같은 해 7월에 니가타현에서 1,500평 규모로 오픈한 나오에쓰 매장에 이어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매장! 코로나 영향으로 오프라인 리테일의 위기설이 더욱 흉흉하게 떠도는 가운데 무인양품이 최근 오픈하는 매장은 판이 갈수록 커지는 모양이다. 집 앞에도 자그마한 무인양품 매장이 있지만, 새로 생긴 대규모 매장은 어떤 모습일지 궁금했다.
포근한 봄기운이 느껴지는 2월의 주말, 여전히 긴급 사태 명령이 내려져 있는 시국에 마스크를 꾹꾹 눌러쓰고 오다이바로 향했다. 스미토모 부동산이 운영하는 아리아케 가든이라는 쇼핑몰 안에 위치한 무인양품 매장은 오픈한 지 두 달밖에 안 되어 그런지 사람들로 북적였다. 무인양품 아리아케점을 방문하고 느낀 점을 1) 주거, 2) 로컬, 3) 친환경이라는 세 가지 키워드로 정리해 보았다.
1. 기분 좋은 생활을 권유하는 집
아리아케 매장의 가장 큰 특징은 의심의 여지 없이 ‘주거’에 있었다. 잘 알려져 있듯 2000년대 중반부터 무인양품은 일본 내에서 집을 판매하고 리모델링하는 서비스를 시작했다.
가족들의 생활 공간이 연결되어 있는 공간감을 강조한 ‘나무의 집(木の家)’, 원하는 곳에 원하는 크기로 창을 내어 집안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바깥 풍경을 감상할 수 있는 ‘창의 집(窓の家)’,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가늘고 긴 모양의 택지에 여섯 개의 공간을 자유롭게 조립하듯 끼워 넣어 만든 ‘세로의 집(縦の家)’ 등 개성이 다른 세 개의 디자인을 소개했다.
그리고 2019년 9월, 무인양품은 5년 만에 ‘양의 집(陽の家)’이라는 새로운 모델을 소개하는데 아리아케 매장에 바로 그 모델하우스가 전시되어 있었다. 이전의 집들은 도심의 복층 단독주택을 위해 만들어졌다면, ‘양의 집’은 마당이 넓은 교외 지역에 있을 법한 1층짜리 아담한 집이었다.
순서를 기다려 신발을 벗고 내부에 들어가니, 벽이나 문으로 구분을 짓지 않고 훤하게 트인 내부 공간이 나왔다. 거실, 침실, 부엌, 이렇게 기능을 달리하는 공간을 따로 구분하지 않고 잠을 잘 수도 있고, 책을 읽을 수도 있고, 식사를 할 수도 있고, TV를 볼 수도 있고, 멍하니 밖을 바라보며 쉴 수 있는 공간이 오밀조밀하게 연결되어 있는 느낌이었다.
가장 인상적이었던 건 벽을 뚫어버린 듯 집의 정면에 크게 나 있는 세 개의 커다란 창. 내부에서 밖을 바라보면 시원하게 바깥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비록 매장의 모델하우스에서는 쇼핑객과 전시 가구가 눈에 들어왔지만, 잠시동안 푸른 숲으로 집이 뻗어 나가는 듯한 풍경을 상상해 보았다. (기생충 부잣집에서만 통유리로 정원을 보며 사는 게 아니라구욧!)
‘양의 집’은 실내와 실외의 구분을 허물어 밖에 있으면서도 안에 있는 듯한, 안에 있으면서도 밖에 있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하는 매력이 있었다. 아래 사진에서처럼 날씨가 좋은 날에는 테이블을 밖으로 이동해 햇살을 즐기며 브런치를 먹을 수도 있을 테고, 밤에는 모닥불을 피워놓고 술을 마시며 지인들과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수도 있을 테다.
나무로 만든 데크는 특히 집이 외부로 확장되는 듯한 느낌을 주었다. 다만 비가 오거나 눈이 오거나 낙엽이 떨어지거나 하면 깨끗하게 관리하기가 쉽지는 않을 것 같다.
내부 공간은 당연히도 무인양품이 만든 가구로 채워져 있었다. 공간이 좁은 만큼 가구를 다용도로 사용할 수 있도록 디자인되었다.
왜 무인양품이 집을 만드는 걸까? 무인양품이 1,400평이나 되는 아리아케 매장을 무엇으로 가득 채웠는지 천천히 돌아보면서 자연스럽게 이 질문의 답을 찾을 수 있었다. 매장은 온갖 종류의 생활 잡화, 가구, 식재료, 도서, 옷 등 생활에 필요한 거의 모든 것들로 가득 차 있었다. 생활 잡화를 만드는 곳인 줄 알았는데, 음식도 파네? 옷은 왜 만들지? 이상하게 생각될 수도 있지만 무인양품은 ‘이것으로 충분하다’라는 라이프스타일을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브랜드인 만큼, ‘무지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들이라면 무엇이든 만들고 팔 수 있다.
그러니 우리가 먹고, 자고, 쉬고, 생활하는 공간인 ‘집’으로 무인양품의 관심이 확장되는 건 오히려 자연스러운 수순처럼 느껴졌다. 생활을 담는 그릇 역할을 하는 집이라는 공간에 무인양품의 제품이 놓일 때 비로소 꼭 맞는 제자리를 찾은 듯한 어울림을 상상할 수 있었다. 무인양품 아트 디렉터인 하라 겐야는 “집의 이야기를 합시다(家の話をしよう)”라는 제목의 유튜브 영상에서 숟가락에서 출발해 제품을 만들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이라는 곳에 다다랐다고 얘기한다.
지금까지 나온 무인양품의 네 가지 모델 중 하나를 골라서 살 수 있다면 난 ‘양의 집’을 선택하고 싶다. 생활의 풍요로움이란 무엇일까? 재택근무를 1년 넘게 지속하면서 이런 생각을 할 기회가 많아졌는데 하나의 직업, 하나의 공간, 하나의 정체성에 고정되지 않고 여러 가지 생활 양식을 탐험하듯이 자유롭게 즐길 수 있는 삶이 풍요로운 생활의 모습 중 하나일 것 같다.
한국에서도 살아보고 일본에서도 살아보며 국가라는 테두리를 훌쩍 뛰어넘어 새로운 생활을 경험해 본다든지, 월화수목금 회사원으로 살면서 주말에는 나만의 은밀한 공간을 찾아 프리랜서나 창작자로서의 시간을 보낸다든지. 다채로운 생활을 열어주는 공간으로서, ‘양의 집’이라는 곳을 고려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무인양품은 제안한다.
참고로 2020년 6월 기준 토지가격을 제외한 집의 순수 시공비는 1,869만 엔, 우리나라 돈으로 약 2억 원 정도라고 한다.
2. 지역사회에 더 가까이 (ft. 블랙무지의 탄생)
다음으로 무인양품이 아리아케 매장을 만들 때 지역사회의 니즈를 열심히 파악해서 그 니즈를 만족시킬 수 있는 공간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는 점을 여기저기서 엿볼 수 있었다.
예를 들어 아리아케 점포에는 다른 무인양품 매장에서 볼 수 없었던 검정색 가구가 있다. 오다이바 아리아케 매장에 입점하기 1년여 전부터 무인양품은 이 지역의 주민들과 인터뷰 및 좌담회를 진행했는데, 그 결과 이곳은 무인양품을 지지하는 고객 기반이 약하다는 점을 파악하게 되었다고 한다. 아리아케 지역의 주거 형태는 모노톤 위주의 인테리어를 채택한 고층 타워 맨션이 주를 이뤄 내추럴한 색상의 무인양품 기존 가구와 어울리지 않았던 것. 그결과, 무인양품 최초의 검정색 가구 라인이 탄생한다.
편리함, 신속함, 저렴함을 앞세운 온라인 쇼핑과 차별화하기 위해 오프라인 리테일 매장에서 지역성을 강조하는 건 일본에서 주요 트렌드로 자리 잡은 것 같다. 지역사회의 니즈를 반영한 공간은 고객들에게 더 뾰족하고 구체적인 제안을 건넨다. 위에서 소개한’ 양의 집’을 지을 수 있는 장소를, 오다이바에서 차로 1시간 15분 정도 이동하면 도착하는 치바현의 보소 반도라는 곳으로 제안했던 것처럼.
2층 매장에서는 모델 하우스 이외에 ‘무엇이든 상담소’ 같은 공간도 있었는데 인테리어 상담, 정리정돈 서포트, 맞춤형 가구 제작 등 생활에 관련된 것이라면 무엇이든 물어볼 수 있었다. 이런 서비스 역시 주민들에게 가까이 다가가기 위한 노력이다. 물건과 서비스의 판매 경계가 점점 사라진다.
3. 친환경에 진심인 편
아리아케 매장 1층에는 ‘푸드 드라이브’라고 무인양품 제품뿐 아니라 집에서 소비하지 않고 남은 음식을 회수해가는 박스가 있고, 의류를 판매하는 3층에서는 의류와 플라스틱병을 회수하는 코너가 마련되어 있었다. 과자도 1g 단위로 원하는 만큼 구매할 수 있으며, 세제류 역시 100ml 단위로 판매했다. 집에서 기존에 쓰는 빈 용기를 가져오면 그 안에 내용물을 담아주는 방식.
코로나 감염 위험 때문에 운영하지는 않았지만 무인양품의 무료 급수시설도 설치되어 있었다. 물통을 가지고 오면 굳이 플라스틱병을 추가로 소비하지 않고도 물을 마실 수 있도록 무인양품은 시범적으로 매장에 급수기를 설치해놓고 그 위치를 무인양품 앱로도 안내한다. 물론 무인양품 플라스틱 보틀이 아니라 본인이 지참한 텀블러를 이용해도 된다.
일본은 2020년 7월에서야 편의점, 슈퍼마켓 등 소매점에서 플라스틱 봉투 사용을 유료화했다. 그전에는 편의점에서 오니기리 하나만 사도 플라스틱 봉투에 담아줄 정도로 플라스틱 봉투 사용에 너그러웠는데 법으로 규제하기 훨씬 이전부터 무인양품은 플라스틱 대신 종이봉투를 사용하는 등 친환경적인 노력에 앞장서 왔다.
필요한 만큼만 구매하고, 플라스틱 용기에 세제나 물을 채우기 위해 매장을 방문할 수 있게 만들어 친환경적인 목표를 달성하는 동시에 고객들이 매장을 더 자주 찾도록 설계한 무인양품의 큰 그림이 멋졌다.
대형 오프라인 매장의 매력
예전에 하라 겐야의 책을 읽고, 무인양품의 철학에 공감하면서 이 브랜드를 좋아하게 되었는데 아리아케 매장을 방문하고 나서는 호감도가 더 올라간 것 같다. 집 앞의 작은 무인양품 매장에 비해 훨씬 더 많은 브랜드의 스토리와 생각을 보여주는 공간이었다.
역시 대형 매장에는 온라인 쇼핑이나 소규모 점포에 없는 ‘우연한 발견(serendipity)’의 재미가 있다. 스크린 속 스크롤을 내리며 흘려보낸 제품도, 다른 잡화, 먹거리, 옷, 등등 모든 제품이 ‘나야 나, 무지!’라고 속삭이는 공간에서는 다시 보게 되는 맥락이 생긴다. 사야 할 것 같은 이유가 생긴다.
원문: 할리할리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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