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 세계가 같은 링에 올라 같은 적과 싸우는 ‘코로나 시대’, 각국의 작전과 병법이 난무한 가운데 대한민국이 택한 전략은 전 세계에서 단연 돋보였다. 이제 K-pop, K-beaty, K-drama에 이어 K-의료, K-방역이 전 세계의 관심을 끌었다. 코로나 시대를 지나며 전 세계의 주목을 받은 것은 대한민국의 의료보험 체계였다.
코로나 시대 최전선 방호 기지의 역할을 톡톡히 해낸 대한민국의 공적 의료보험 체계가 주목을 받자 정치인들은 공을 제각기 자신들에게 유리한 쪽으로 돌리며 의료 보험의 토대를 자신들이 만들었다고 언급했다.
누구도 ‘장기려’라는 이름을 언급하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대한민국 의료보험제도와 관련하여 가장 먼저 기억해야 할 이름은 바로 ‘장기려’라는 이름 세 글자이다.
언젠가 부산에 세워졌다는 소식을 듣긴 했지만 가 보지 않았던 장기려 기념관을 찾아가 보았다. 한국 전쟁 당시 만들어진 판자촌 동네를 부산의 역사 관광 상품으로 만들어 놓은 초량 이바구길 한편, 그곳에서도 눈에 띄지 않는 언덕배기에 장기려 기념관이 있었다. 굳이 알고 찾아가지 않으면 눈에 띄지 않을 외딴곳에 기념관이라고 이름 붙이기 멋쩍을 정도로 작은 규모의 기념관이 있었다.
어떻게 보면 장기려 박사님의 성품에 어울리는 소박한 기념관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으나 안으로 들어서자 실망스럽기 그지없었다. 거의 인쇄된 사진들과 빽빽한 글 만이 기념관 벽면에 가득할 뿐 시선을 끌 만한 유품 하나 없었다. 요즘 같은 시대에 누가 이 빽빽한 글들을 찬찬히 읽을까, 설령 이 기념관을 다녀간다고 해도 장기려라는 인물에 대해 제대로 알기는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장기려라는 인물은 우리가, 대한민국이, 더구나 부산이, 이렇게 소홀하게 다룰 만한 인물이 결코 아니다. 내가 장기려 박사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제작한 것은 2006년이었다. 박사님이 돌아가신 지 10년이 되던 그해 장기려 박사는 우리나라 ‘과학 명예의 전당’에 의사로는 최초로 이름이 올랐다. 지금은 비교적 수월해진 간 절제 수술을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성공한 사람이 바로 장기려 박사다. 의학계에서 ‘간의 날’로 지키는 10월 20일은 바로 장기려 박사가 간 절제 수술에 성공한 날이다.
그해 나는 한 해 동안 박사님을 곁에서 모시고 기억하는 사람들을 전부 만나고 장기려 박사에 관련된 모든 장소를 다 방문했다. 그때만 해도 장기려 박사님이 생의 마지막 시간을 보낸 옥탑방이 보존돼 있어 그곳을 직접 가는 행운을 누리기도 했다.
그의 서거 소식이 알려진 1995년 12월 25일, 그를 기억하는 한 후배는 ‘작은 예수’가 세상을 떠났다고 애통해하기도 했다. ‘살아있는 성자” 작은 예수’라고 불렸던 장기려 박사, 그를 가까이서 본 이들의 증언에 의하면 그 호칭은 결코 과장이 아니었다.
청십자병원에 오랫동안 입원했지만 입원비가 없어 퇴원을 하지 못하는 가난한 환자에게 “뒷문을 살짝 열어 놓을 테니 도망가라”라고 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영양실조로 입원한 환자의 처방전에 “닭 두 마리 값을 내주시오”라고 써 주었다는 이야기도 알려진 대로 사실이다.
2006년 당시 내가 직접 만났던 이동기 씨는 장기려의 삶을 증언하는 산 증인과도 같은 사람이었다. 두 다리와 한쪽 팔까지 마비돼 먹고살 길이 없었던 그는 젊은 시절부터 길가에서 구걸하며 삶을 연명했다. 그런데 매섭게 찬 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겨울날, 지나가던 장기려 박사가 그를 봤다. 작은 체구의 장기려 박사는 그를 직접 업고 구호소까지 데려다주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 정도의 은혜를 베푼 것으로 끝이었겠지만 장기려 박사는 그 후 시간이 날 때마다 이동기 씨를 찾아와 돌아보고 성경 말씀을 들려주었다. 그리고는 비슷한 처지의 여인과 중매를 해 결혼까지 시켜주었다. 아미동 언덕배기에 이동기 씨의 집까지 마련해 준 장기려 박사는 돌아가시기 직전까지 한 해에 몇 번씩 이동기 씨를 찾아왔다고 한다. 이동기 씨의 아들들을 친손주까지 예뻐하면서 돌보아 주고 가끔 편지까지 보내곤 했다고 당시 이동기 씨 부부는 눈물을 흘리며 장기려 박사에 대해 증언했다.
장기려 박사에 관련된 사소하지만 감동적인 일화들은 작은 지면에는 다 쓸 수 없을 만큼 넘쳐난다. 그중에서도 이 시대 우리가 꼭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나라에 민간의료 보험을 최초로 만든 이가 바로 장기려 박사라는 사실이다.
우리나라 대안교육의 장을 열었던 풀무학교의 원장이자 사회사업가였던 채규철과 각별한 사이였던 장기려 박사는 1968년 함께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립한다. 채규철 박사가 덴마크에 가서 공부하며 심하게 아파 병원에 가서 오랫동안 치료를 받았는데 병원비를 한 푼도 받지 않는 경험을 했다. 그게 바로 그 나라의 의료보험 덕분이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 우리나라에도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기로 한다.
1968년 최초의 민간의료보험 창림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
의료보험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던 1968년, 그들은 “건강할 때 이웃 돕고 병났을 때 도움받자”는 구호를 내세우면서 청십자 의료보험을 창립한다. 처음에는 건강할 때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의료보험제도를 이해시켜야 했다. 다행히 부산에 있는 교회들을 중심으로 회원을 모집하면서 청십자 의료보험은 자리 잡아간다.
1970년대 700여 명이던 회원은 꾸준히 늘어났고 1975년에는 아예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원들을 위한 청십자 의원이 개원을 할 정도였다. 1981년에는 조합원 숫자가 3만 명을 돌파했고 1983년에는 10만 명에 이르렀다.
물론 우리나라에도 1977년부터 의료보험 조합이 있었다고 하지만 그 의료보험은 공무원이나 군인, 대기업 노동자만 가입이 가능했던 것으로 일반 국민들은 가입할 수 없는 조합이었다.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만이 전 국민 누구에게나 문이 열려 있는 조합이었다.
1989년에는 조합원이 22만 명에 달할 정도로 성장했다. 청십자 조합원들은 전국 480곳의 병원에서 진료를 받을 수 있었다.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은 한해 15억 원 이상의 흑자를 내는 기관이 되었다. 그러나 그해 청십자 의료 보험 조합으로부터 많은 제도를 이어받은 전 국민의료보험 조합이 출범하자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은 어떠한 조건도 없이 발전적 해체를 한다. 오직 대한민국 국민들을 위한 결단이었다.
비단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에 관한 일뿐만 아니라 장기려 박사는 어떤 일에서도 개인적인 이익도 취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취재하면서 만났던 많은 후학은 장기려 박사가 의료계에서 만약 자신의 라인을 만들었다면 지금보다 의학계에서 훨씬 큰 평가를 받았으리라는 이야기들을 했다.
“월급은 식구 수대로 받아 갑시다”
평양에서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1·4 후퇴 때 작은아들 손만 붙잡고 부산으로 피난 온 그는 1951년 부산 제3 영도교회 창고에서 천막을 치고 무료로 가난한 이들을 돌본다. 그것이 복음병원의 시작이었다. 무료 병원이 알려지면서 하루에 환자들이 200여 명이나 몰려들었다. 미국 개혁 선교회가 그나마 지원을 하면서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월급을 받게 되었는데 장기려 박사는 월급을 식구 수대로 받아 갈 것을 제안한다. 식구가 몇 명이냐에 따라 받아 가는 월급이 다른 것이다. 결국 식구라고는 작은아들과 자신 둘뿐인 장기려 박사는 가장 적은 월급을 받아 갔다.
복음병원은 계속 발전을 해 10층짜리 고층 빌딩을 세웠다. 그러나 병원이 발전하고 커질수록 높은 자리에 앉으려는 사람들은 넘쳐났다. 명예와 실익이 있는 곳에 장기려 박사의 자리는 없었다. 그는 복음 병원을 떠나 작은 청십자병원의 병원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오직 아픈 환자들이 있는 곳, 그곳이 장기려 박사의 자리였다. 그해 1년 동안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면서 방문한 여러 장소 중 가장 인상적인 곳은 장기려 박사가 생의 마지막을 보낸 옥탑방이었다.
자신의 집 한 칸 마련하지 않고 살았던 그는 더 이상 몸이 아파 환자를 돌볼 수가 없는 나이가 되어 청십자병원을 떠날 무렵, 갈 곳이 없었다. 그제야 후배들이 노년의 그가 머물 자리를 마련하기 위해 알아보기 시작했다. 그렇게 마련해 준 곳은 송도에 높게 솟은 고신 복음병원 빌딩의 꼭대기 옥탑방, 한 평 남짓의 공간이었다. 그곳은 전화 교환원들이 근무하던 공간이었다가 비어있는 그야말로 옥탑방이었다.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로 꽉 차는 보잘것없는 옥탑방, 그러나 그는 기쁘게 그곳으로 이사를 했다.
우리가 취재할 당시 그 옥탑방은 장기려 박사님이 사용하시던 생전 모습 그대로 보존되었다. 그곳은 10층까지만 운영하는 엘리베이터도 더 이상 닿지 않는 곳이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0층에서 내려 가파른 계단을 스무 계단쯤 올라가야 하는 옥탑방, 장기려 박사는 생애 마지막 몇 년을 그 방에서 살았다.
평생을 아무것도 가지지 않고 오직 가난한 이들을 위해 모든 것을 베풀었던 그는 이 생에서 정말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은 채 1995년 12월 25일, 자신의 장례비로 써 달라는 액수의 돈만 통장에 남긴 채 하늘나라로 떠났다.
그 옥탑방은 지금은 어떤 곳으로 사용할까? 장기려의 기념관을 만든다면 그런 공간에 만들어야 하지 않았을까? 엘리베이터도 닿지 않는 곳, 스무 계단의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 책상 하나와 침대 하나가 전부인 그의 옥탑방을 관람객들이 둘러본다면 장기려의 삶에 대해 정말 깊은 감동을 받지 않을까?
그해 그 다큐멘터리를 제작하고 나는 오랫동안 떠나 있던 교회에 다시 등록을 했다. 기독교에 대한 여러 가지 회의로 교회를 떠났지만 장기려 박사의 삶을 보니 장기려 박사가 믿었던 예수는 분명 살아 존재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한 인간이 장기려 박사처럼 살 수 있단 말인가?
장기려의 이야기가 교과서에도 소개되고 장기려의 기념관까지 만들어졌지만 장기려라는 인물이 세상에 한 일이 제대로 알려졌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의문이다.
영광과 칭찬은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오직 하늘의 상급을 바라보는 크리스천으로 조용히 자신이 할 바를 살아가신 분, 크리스천이 이 땅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인지 오롯이 삶으로 보여주신 장기려 박사, 혼탁하게 흐려진 종교가 세상을 어지럽히는 이 시대, 그의 삶의 발자취는 돌아보면 돌아볼수록 더욱 빛이 난다.
두렵고도 무서웠던 코로나 시대의 어두운 터널을 힘들게 통과하며 희미한 희망을 빛이나마 마주하는 지금, 장기려 박사의 삶이 다시 한번 조명받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원문: 미전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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