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 꼬마도 어느덧 피아노를 시작할 나이가 됐다. 어렸을 때 피아노를 배우는 것은 통과의례 같은 느낌이다. 무슨 악기를 배우든 피아노가 기초가 되어 주기 때문일 것이다. 코로나19로 인해 피아노 학원이 문을 닫아서, 대신 선생님이 마스크를 쓰고 집으로 방문 지도해주러 오셨다.
한동안 먼지가 쌓여 있던 피아노의 뚜껑이 열리고, 검은색과 흰색의 반지르르한 건반이 모습을 드러냈다. 우리 꼬마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도레 도레’를 치는 것을 어깨너머로 지켜보니 참 대견스럽다. 그리고 문득 과거 모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벌써 30년도 더 됐다. 신발주머니 같은 가방을 옆구리에 끼고, 집 앞 피아노 학원을 참 바지런히 다녔었다. 그 당시 ‘국민학교’ 저학년이 되면, 동네 아이들 너도나도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누구나 한 번쯤 피아노로 상 한 개씩은 타봤을 정도로, 참 열심히들 배웠다.
그러다가 중학교 들어갈 때쯤 전공을 할 생각이 아니면 대부분 악기 배우는 것을 관두는 게 일반적이었다. 대개 ‘체르니 100번’ 또는 ‘체르니 30번’ 정도로 피아노 역사를 마무리 짓기 마련이다. 그 후 입시, 대학 생활과 취직을 거치며 피아노는 그저 어린 시절 추억 같은 존재로 서서히 잊혀 갔다.
그리고 2021년. 시간이 훌쩍 흘러, 우리 꼬마가 피아노를 친다. 나의 아련한 눈빛이 느껴졌는지 피아노 선생님께서 “어머니도 같이 피아노 배워 보실래요?” 하시는 게 아닌가! 뜻밖의 제안에 “제가요? 저도 배워도 되나요?”라고 깜짝 놀라 답했다.
내가 지금 피아노를 배운다고 전공을 할 것도 아니고, 직장 업무에 사용할 수 있는 것도 아닌데, 그리고 우리 꼬마가 배우려고 시작한 건데, 내가 배워도 되나 싶은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럼요. 아이 수업 마치고 30분 정도 배워보세요.
그럼… 다시 해볼까요?
그동안 잊었지만 내 마음 깊은 곳에서 언젠가 다시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기억하는가? 과거 『피아노 명곡집』. 이 책을 아직도 교재로 사용한다는 것이 참 반가웠다. 한국에 계신 엄마에게 연락해, 국제 특급우편으로 배송받았다.
‘배보다 배꼽이 더 큰’ 엄청난 배송료 폭탄을 안고 당당히 도착한 파랑이와 빨강이. 오래된 친구를 만난 기분이었다. 설레고 반가운 마음에 책장을 넘겨보니, 그때 그 노래, 그 악보가 그대로 있었다. ‘엘리제를 위하여’ ‘소녀의 기도’ ‘뻐꾸기 왈츠’ ‘꽃노래’… 제목만 들어도, 피아노 선율이 자동으로 떠오르는 곡들이다. 왠지 모르게 가슴이 뭉클해졌다.
첫 레슨 시간. 그 유명한 ‘엘리제를 위하여’이다. 전 국민의 자동차 후진 소리로 기억되는 바로 그 곡이다. 뭔가 쑥스럽고 거칠지만, 그래도 나름 정성을 다해 연주했다. 선생님께서 “악보는 잘 보시네요, 이번에는 조금 더 부드럽게 연주해보세요, 이렇게” 하고 시범을 보여주셨다. 정말 같은 곡이 맞나 싶을 정도로 참 소리가 아름답게 들렸다.
30년이 지나 다시 쳐본 ‘엘리제를 위하여’가 이렇게 애잔하고 감미로운 곡일 줄이야! 피아노 선율에 빠진 30분 레슨 시간이 마치 3분처럼 지나갔다. 그렇게 나의 피아노와의 인연은 다시 시작되었다.
중년이 돼서 배우는 피아노 레슨은 참 재미있다. 무엇보다 익숙한 피아노 선율이 추억으로 나를 초대하는 것 같다. 그토록 오랜 시간이 흘렀어도, 과거에 쳤던 곡을 칠 때면, 옛날 동네도 떠오르고, 친구들과 장난치던 장면, 내가 연습하는 동안 옆에서 간식을 준비하시던 엄마의 모습도 떠오른다.
또한 피아노 선율에 집중하며 감성 충만하게 음악을 즐길 수 있는 여유가 생겼다. 더 이상 ’10번 연습하기’처럼 숙제 체크할 필요도 없다. 대회 나갈 것도 아니니, 같은 곡을 수십 번 반복할 필요도 없다. 이제 오롯이 나를 위해 연주하는 것이다. 같은 곡을 치더라도, 손목과 손가락의 강약에 따라서 같은 음도 여러 방식으로 전달된다.
어떤 곡은 부드러운 강이 흘러가는 듯하고, 어떤 곡은 따스한 카스텔라 처럼 부드럽고 달콤하게 느껴진다. 또, 어떤 곡은 왼손의 저음과 오른손의 고음이 마치 남녀가 연애하듯 속삭이는 것 같다. 이렇게 아름다운 소리를 그동안 잊고 지냈다니! 정말 억울할 뻔했다.
코로나로 종일 컴퓨터 스크린에 앉아 재택근무를 한 지 곧 1년이 돼간다. 무료하고 답답한 일상에, 피아노 레슨은 단비와 같은 존재가 됐다. 나중에 우리 꼬마도 커서 이 시간을 기억할 때가 오겠지? 그때 엄마가 피아노를 즐겁고 행복하게 쳤던 모습으로 기억되면 좋겠다. 내가 그랬듯이, 우리 꼬마에게도 피아노와의 좋은 추억과 기억이 많이 남았으면 좋겠다.
원문: 켈리랜드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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