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은 나이에 피아노를 만난 일은 어쩌면 행운일지도 모른다
피아노 전공은 아니지만 피아노를 배우고 싶어서 피아노와 마주한 지 벌써 2년 하고도 몇 개월의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매일 같이 피아노 연습을 하려고 했으나 대학 시험이다 뭐다해서 종종 피아노 연습을 빼먹은 적이 있었다. 레슨을 통해 잘못된 습관을 수정받더라도 쉽게 고쳐지지 않아 힘들었다.
하지만 피아노가 질리는 일은 결코 없었다. 가끔 추억과 이벤트 때문에 접속하는 게임 ‘바람의 나라’는 10분만에 질리지만, 피아노는 같은 곡을 3시간 연습하더라도 질리지 않았다. 단지 내 체력이 받쳐주지 못해서 1시간 정도 연습하면 집중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게 문제….
최근에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을 연습하고 있다. 애니메이션 OST를 연주하고 싶어서 시작한 피아노였는데, 역시 애니메이션 OST와 함께 전통 클래식으로 불리는 곡들을 연주하고 싶었다. 뜻밖에도 애니메이션 OST 악보보다 모차르트 〈작은 별〉 변주곡 악보에 더 쉽게 적응을 했다.
정명훈 지휘자가 연주한 피아노 〈작은 별〉 변주곡은 9분 정도다. 나는 조금 더 느린 속도로 악보의 약 절반 정도(5분)을 이제 연주할 수 있게 되었다. 앞으로 나아가는 일은 쉽지 않고, 똑같은 부분을 될 때까지 연습하라는 선생님의 말씀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얼굴에서 웃음이 사라지는 일은 없었다.
이렇게 피아노를 연습하면서 블로그에 글을 쓰는 일은 하루를 허투루 보내는 것을 허락지 않는다. 조금이라도 엉뚱한 짓을 하면서 시간을 보내면, 연습 시간이 부족할뿐더러 책을 읽고 글을 쓸 시간조차 사라진다. 오늘 이 자리에서 소개할 책 또한 그 바쁜 시간 속에서 읽은 정말 멋진 책이었다.
책의 제목은 『다시, 피아노』(앨런 러스브리저 지음, 이석호 옮김, 포노, 2016년). 부제로 ‘아마추어, 쇼팽에 도전하다’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이 책은 인터넷 서점에서 다른 책을 구매하려다가 우연히 알게 되었다. 유치원 시절 피아노를 배웠다가 26살이 되어서 다시 피아노를 시작한 참이니 왠지 모르게 이 책이 읽고 싶어 망설이지 않고 구매했다.
『다시, 피아노』의 저자이자 《가디언》의 편집 국장인 앨런 러스브리저는 일을 하면서 우연히 쇼팽의 「발라드」를 만나게 되어 학창 시절에 배웠던 피아노를 다시 시작하게 되었다. 『다시, 피아노』는 일기 형식으로 적힌 그의 이야기다. 피아노를 연습하는 모습부터 시작해서 평소 모습이 담겨있다.
《가디언》과 존재 자체를 비교할 수 없겠지만 나 또한 작은 블로그에 매일 같이 글을 쓰면서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어 나름대로 공감대를 형성하며 책을 읽었다. 일기 형식으로 적힌 이야기는 무심하게 읽고 넘어갈 것 같지만, 책 군데군데 절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피아노와 책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다.
책을 열고 얼마 지나지 않아 만날 수 있는 아래의 장면을 함께 읽어보자.
기차 안에서는 찰스 쿡의 『재미 삼아 피아노 치기』를 열독했다. 정말 얻을 게 많은 책이다. 아마추어에게 가장 격려가 되는 말을 해주는 사람이 아마 쿡이 아닐까. 나이 먹고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고 해서 기죽지 말라고(“학생의 나이는 중요치 않다”), 사실 따지고 보면 아마추어만큼 축복받은 위치에 있는 사람도 없다고 하니 말이다.
연주를 대함에 있어 대부분의 프로페셔널보다 아마추어인 당신의 처지가 더 낫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아마추어에게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연습해야 한다는 엄혹한 멍에가 없다. 부담감과 책임감에 짓눌릴 일도 없고, 치열한 경쟁도 없다. 공연장의 형편, 음향 상태나 본인의 정신 상태와 무관하게 끊임없이 청중을 상대해야 하는 입장도 아니다. 아마추어는 모든 취미가 본래 그렇듯 좋아서 음악을 하는 사람들이다. 그 결과로 당신은 스스로에게 만족하고, 취미를 공유하는 동호인들을 흡족케 하며, 당신의 처지를 이해하고 온정적인 자세로 연주를 들어줄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에게도 기쁨을 줄 수 있다.
저자가 찰스 쿡의 『재미 삼아 피아노 치기』를 읽고 말하는 부분에서 그가 인용한 글은 크게 와 닿았다. 피아노를 늦게 시작했다고 해서 기죽을 필요가 없으며, 오히려 아마추어이기에 피아노를 좋아하는 대로 즐길 수 있다는 말. 피아노를 즐기고 싶은 사람으로서 정말 마음이 가벼워지는 말이었다.
윗글 뒤에는 “쿡은 그렇지만 ‘하루 한 시간 연습’만큼은 반드시 지키라고 강조한다.”라는 말이 나온다. 하루 한 시간 연습하는 것의 중요성. 역시 아마추어라고 해도 꾸준한 연습은 필수인 법이다.
지금 나는 대학 방학 기간이라 아침마다 적게는 2시간, 많게는 3시간 정도 피아노 연습을 하고 있다. ‘연습을 하지 않으면 발전하지 않는다’는 의무감도 있지만 현재 연습하는 모차르트의 〈작은 별〉 변주곡을 얼른 익숙하게 연주하고 싶은 욕심이 크다. 나의 목표는 쇼팽의 에튀드 OP25-11 〈겨울바람〉을 연주하는 것인데, 거기까지 가는 목적지가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아직 가야 할 길이 너무 멀다.
이 이외에도 책을 읽으면 저자의 이야기만 아니라 저자가 읽은 책, 저자가 피아노를 통해 만난 사람들의 이야기를 무척 인상 깊게 들을 수 있었다.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한 동기가 애니메이션 OST를 피아노로 연주하기 위해서였기에 상대적으로 클래식을 잘 몰랐던 나는 책에 나온 쇼팽의 곡명과 의의를 읽으며 찾아 듣기도 했다.
그중에서 우연히 들은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OP-23은 대단히 좋았다. 이 곡은 내가 좋아한 애니메이션 〈4월은 너의 거짓말〉의 주인공 아리마 코우세이와 미야조노 카오리의 멋진 마지막 모습을 볼 수 있었던 곡이었다. 정명훈의 연주를 들었는데, 정말 곡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시, 피아노』를 읽으며 그동안 내가 좁게 바라본 피아노가 아니라 좀 더 넓은 피아노, 또 피아노와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만난 기분이다. 원래도 피아노 연주와 독서를 좋아했지만 이 책을 통해서 내 취미를 더 좋아하게 되었다.
언젠가 피아노 연습을 하고 글을 쓰면서 매일 보내는 내 일상을 저자처럼 정리해보고 싶다. 과거 피아노 일기를 쓰다가 멈춘 터라 이 책을 읽고 다시 한번 글을 적어보았지만 썩 마음에 드는 글은 되지 못했다. 『다시, 피아노』처럼 나 또한 명료하게 내 삶을 글로 옮길 수 있었으면 한다.
마지막으로 책에서 읽은 쇼팽의 발라드를 해설하는 부분과 함께 정명훈이 연주한 쇼팽의 발라드 1번 G단조 OP-23 연주 영상을 남긴다. 주말을 앞두고 누구보다 바쁘게 살아갈 우리가 잠시 피아노 연주를 들으면서 쇼팽의 발라드가 가진 뜻을 잠시 상상해보는 여유를 가질 수 있길 바란다.
제가 보기에 말이죠, 쇼팽은 발라드에서 스스로의 인생에서 겪은 일들을 이야기하는 것 같아요. 쇼팽이 이 곡을 쓴 건 20대 초반 시절이었죠. 위대한 사람들이 대부분 그렇듯 쇼팽 역시 행복을 갈구하고 결국엔 낙심하고 그런 과정을 오가는 것 같단 말이죠. 발라드만 해도 그렇잖습니까. 처음은 아주 심각하고 무겁게 시작하잖아요. 어떻게든 무거운 분위기를 떨치려고 노력하다가 중간 부분에는 잠깐이나마 흔적이 스쳐 지나가지만 종내 우울한 첫머리의 분위기로 돌아가 버리고 말죠. 그렇잖습니까? ‘행복해지고 싶다’고 고함을 내지르지만 쉽게 되지 않죠. 마지막에는 ‘결코 삶이 나를 짓누르도록 내버려 두지 않겠다’는 결기가 느껴지고요. 코다에 접어들면 ‘내가 삶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있다’는 느낌이 지배합니다.
이 작품이 위대한 이유는 바로 끝부분에서 희망을 느끼게 하기 때문인 것 같습니다. ‘있잖아, 인생은 그렇지 않아. 그렇게 나쁠 것 없는 거라고’하고 말을 거는 것 같아요.
원문: 노지의 소박한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