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세간에서는 어리석고 바보 같은 사람을 두고 ‘새대가리’ 혹은 ‘붕어대가리’ 같은 비하의 말을 사용하곤 한다. 아마 새나 물고기가 기억력이 나쁘고 지능이 낮다는 인식에 기반한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이 말들은 사실 옳지 않다. 정치적 올바름의 여부를 떠나 ‘팩트’적 측면에서 그러하다.
실제로 조류나 어류는 사람들의 생각보다 훨씬 머리가 좋다. 새는 옷차림이나 행동만으로 인간을 구분할 수 있으며, 자신의 영역과 새끼를 보호하기 위해 지능적인 다양한 행동을 하기도 한다. 까치나 까마귀와 관련된 옛이야기가 괜히 많은 것이 아니다.
물고기 또한 마찬가지이다. 이들이 낚싯줄에 한 번 걸렸다 풀려난 뒤에 또 찌를 무는 것은 기억력이 좋지 않아 있었던 일을 고새 까먹었기 때문이 아니라, 너무나도 배가 고픈 상황에서 먹이를 쉽게 구할 수 없는 현실을 인지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것을 알면서도 위험을 무릅쓰는 것이다.
해양생물 중에서도 연체동물인 문어는 더하다. 넷플릭스의 〈나의 문어 선생님〉은 1년간 문어 한 마리를 집중적으로 관찰하고 교감한 과정을 그려낸 다큐멘터리이다. 이 작품을 보면 문어가 얼마나 머리가 좋은지 알 수 있다.
다큐멘터리 감독인 크레이그 포스터는 어느 날 삶의 고비를 맞이하고, 갈등이 최고조에 달하자 돌파구를 찾기 위해 자신에게 익숙한 장소인 바다로 향한다. 바다에서 가벼운 잠수를 하며 스트레스를 해소하던 그는 어느 날 문어 한 마리를 목격한다. 이 문어의 행동이 매우 흥미로웠던지라 줄곧 관심을 가지고 지켜본다.
처음에는 주인공을 매우 경계하고 도망 다니며 멀찍이서 바라보기만 하던 문어는 그가 아무런 위해를 끼치지 않고 사진만 찍는다는 사실을 이내 눈치채고 조금씩 관심을 보인다. 카메라를 만져보고 맛을 보는 행동에서 시작한 뒤 마침내는 주인공에게까지 다리를 뻗는다. 그리고 그 다리를 주인공이 맞잡으면서(?) 둘의 본격적인 ‘우정’이 시작된다.
그러면서 주인공은 문어가 자신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뛰어난 생물임을 알게 된다. 문어가 외부 상황을 관찰하고, 그것을 응용할 줄 알며, 속임수나 유인책으로 적을 따돌리거나 먹이를 사냥하고, 심지어는 특정한 목적 없이 단순한 유희 활동을 즐기기도 하며, 무엇보다 강력한 호기심을 지녔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문어가 단순히 먹고, 자고, 싸고의 본능적인 생존 욕구를 뛰어넘어 우리와 비슷하게 ‘상상력’과 ‘사고력’을 지녔음을 의미한다. 익숙한 것에 대한 친밀감, 낯선 것에 대한 공포, 어려운 것에 대한 도전 정신, 다양한 것에 대한 호기심. 인간이 느끼는 모든 감각을 문어 또한 느꼈다는 사실에 주인공은 전율한다.
그렇게 주인공은 문자 그대로 문어와 사랑에 빠진다. 문어에 대해 더 자세히 알고 싶어 밤낮으로 온갖 논문을 읽어대는 한편, 하루라도 문어를 보러 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한번은 문어가 상어에게 공격당해 다리 하나를 뜯기고 죽을 위험에 처하는데, 이때 주인공은 문자 그대로 ‘가슴이 찢기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고.
그런 그의 걱정이 무색하게 문어는 온갖 고비를 뛰어넘고 그와의 우정 또한 탄탄히 다져가며 잘 살아남는데, 안타깝게도 그런 시간이 오래 지속되지는 않는다. 문어의 기본 수명은 3–4년으로 이미 주인공을 만난 단계에서 성장을 완료한 상태였던 문어의 남은 시간이 그리 길지 않았던 것이다.
문어와 생활한 1년간의 시간은 주인공의 삶에 엄청난 변화를 일으킨다. 타인이나 다른 생물에 별다른 공감을 하지 못하고 자기만 알던 그는 주변의 모든 생물에 대해 더 깊이 있는 관심을 갖게 되는 한편, 가족에 대해서도 더욱 큰 책임과 사랑을 느끼게 된다.
또한 문어가 온갖 역경을 뛰어넘고, 엄청난 기지를 발휘하여 죽을 고비를 넘기고, 절체절명의 순간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극심한 고통 앞에서도 끝까지 무너지지 않는 것을 보면서 많은 감명을 받는다. 그렇게 영리한 포식자로 살던 문어가 새끼를 낳고 그에 맞춰 숨을 거두는 모습을 통해서는 삶과 자연, 생명에 대한 깊은 생각도 하게 된다.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 깊었던 대목은 문어의 죽음에 대한 그의 소회였다. 너무나 사랑했던 나머지 그는 지금도 종종 문어가 살았던 동굴에 가보고 문어를 추억하곤 하는데, 그럴 때마다 극심한 그리움으로 인해 심장에 고통을 느낀다고 한다. 하지만 문어의 죽음을 떠올려보면 한편으로는 후련한 측면도 있다고.
그토록 깊이 사랑했던 대상의 상실 앞에서 후련함을 느낀다니. 얼핏 모순적일 수도 있는 이 말을 나는 너무나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일종의 ‘해방’의 자유였을 것이다. 더는 사랑으로 인해 고통받지 않아도 된다는 안도감.
실제로 그는 문어가 살아 있는 동안 종일 문어 생각밖에 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문어를 너무 사랑했던 나머지 그 관심과 걱정과 연민과 애정은 어느덧 집착 수준에 달하여 밤에 잠을 자면서도 문어에 대한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던 것이다. 무언가에 사로잡힌다는 것, 중독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지만으로는 거기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문어가 언제 죽을까 전전긍긍해 하는 한편, 알을 낳고 점점 힘이 빠지는 문어를 지켜보며 오늘 가면 문어가 살아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불안함에 시달렸고, 그 모든 과정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힘들었다고 한다. 그렇기에 문어가 완전히 떠나버리고 난 지금은 오히려 속이 후련하다는 것이다.
그런 측면에서 너무 사랑했기에 한편으로는 후련하다는 그의 말이 너무나도 공감이 갔다. 사랑은 본질적으로 고통이다. 사랑이 클수록 그러하다. 이 세상 모든 것은 유한하며 아무리 깊은 사랑도 언젠가는 끝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때 사랑이 주는 희열이 클수록 상실의 고통 또한 클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맹점이자 아이러니한 부분이다.
희열이 크면 클수록 고통받을 수밖에 없다니. 그럴 거면 대체 뭐하러 사랑을 하나 싶을 수도 있겠으나, 여기서 다시 아이러니한 부분은 그 고통이 다시금 우리를 살게 한다는 사실이다. 인간은 무언가를 진지하게 사랑하는 과정에서 깊은 고통을 느끼고, 그렇게 얻는 고통을 통해 비로소 살아 있음을 인식하게 되는 것 같다.
그저 태어났다는 이유로 하루하루 관성적으로 살아가던 사람은 어떤 것을 깊이 사랑함으로 인해 희열과 고통을 느끼고, 그 과정에서 기쁨과 슬픔과 절망과 용기를 동시에 경험하며, 그러면서 비로소 살아 있다는 생생한 느낌과 삶의 의미를 생각해보게 되는 듯하다.
깊은 사랑은 우리에게 깊은 고통을 주지만, 그만큼 우리를 크게 변화시키기도 하는 것이다. 그리고 무언가를 깊이 있게 사랑할 수 있는 것은 결국 그 앞에 상실이 기다리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다. 잃어버릴 것을 알기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다.
원문: 한승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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