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사랑이 주는 신비로운 경험 중 하나는 당신이 건넸던 어느 순간의 호의, 눈빛, 몸짓 하나가 세상의 다른 모든 것들을 사라지게 하고 오직 그것만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느끼게 만드는 순간이다. 당신이 타주었던 차 한 잔, 당신이 건네주었던 꽃 한 송이, 당신을 따라나섰던 밤 산책, 당신이 커피를 마시던 한순간의 모습이 어느 순간 가장 의미있고도 유일한 것이 되고, 그 밖의 나를 둘러싼 인생이나 세상의 맥락 같은 것들은 아무래도 상관없는 것이 된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부디 시간이 흐르지 않기를 바란다. 더도 말고 덜고 말고, 더 얻을 것도 더 내어줄 것도 없이 그저 시간이 멈추기를 바란다. 당신과 마주 앉은 방 안의 새벽, 끝나지 않을 것만 같은 창밖의 여름, 매일 아침마다 마시게 되는 가을의 차가운 공기가 그대로 머무르길 바라고 영원하길 바라게 된다. 다시 돌아갈 삶은 이만큼 중요하거나 소중하지 않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완벽하리만치 아름답거나 소중한 순간은 그리 오래 주어지지 않는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사랑이 어떤 종류의 완벽한 순간을 경험하게 하고, 혹은 그런 감각을 준다는 건 꽤 오래전부터 공인되었던 사실인 것 같다. 그 많은 문학인들이나 예술가들이 예나 지금이나 하나같이 그러한 순간을 노래하고 있고, 그 순간 한 사람이 어디까지 과감해질 수 있는지, 얼마나 용기를 낼 수 있는지, 그전까지는 없었던 의지력과 열정을 자기 안에서 끌어낼 수 있는지, 그렇게 온통 세상을 다 지워버리고 우주에 단 둘만 남을 수 있는지 이야기하고 있으니까.
사랑하는 연인은 세상 끝까지 도망치기도 하고 서로를 구해내기도 하며, 삶을 땅바닥에 내동댕이쳤다가 완전히 백지에서 새로 시작하게 만들기도 한다. 모든 걸 백지로 만들고 새로 시작할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이 빈틈없이 채워지고, 무엇이 가장 중요한 것인지 정확하게 알게 되어 삶은 어느 때보다도 명료해진다.
아마 그런 사랑의 경험은 인생에서 자주, 많이 주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또 그런 시간은 최초의 시간이 지나고 나면 서서히 진정되어서, 사랑도 삶의 여러 요소들을 갖추어가야 한다. 사랑하는 사람과 그대로 달려 세상 끝으로 도망치기보다는, 둘 다 잘 자리 잡을 일들을 찾아서 취업해야 한다. 함께 살고 싶다면 앞으로 인생에서 일어날 여러 일에 대비하며 주거 안정도 생각하고, 보험도 들고, 일년 뒤에 먹을 것과 입을 것에 대해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
양가 부모님의 건강이나 관계도 신경 써야 하고, 생활 곳곳에서 마주할 수밖에 없는 여러 누추함들도 감당해야 한다. 완벽한 순간이란 항상 이어질 수 있는 건 아닌 것이다.
2.
그래도 나는 사랑에 대한 감각은 생활이 어떻게 되든, 인생의 맥락이 어떻게 바뀌든 존재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건 어느 순간 맞이하게 되는, 이대로 영원하면 좋겠다고 믿어지는 순간들이다.
그냥 이대로 영원하면 좋겠다. 더 필요한 것도 없고, 더 대단한 것이 없어도 좋고, 그저 이대로 당신과 내가 있는 이 순간이면 족하다. 당신이 깔깔대고, 밤이 고요히 젖어 들고, 우리 사이에 있는 아이의 숨결이 매 숨마다 느껴지고, 눈앞에 바다가 있고, 하늘이 펼쳐져 있는 순간에 지금은 죽어도 괜찮을 것 같다고, 이다음 순간이 오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믿어지는 어느 순간이 있다면 역시 그것은 사랑의 증거가 아닐까 싶다.
사랑은 그렇게 부단히도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 쫓기는 인생 속에서, 늘 무언가를 쫓아가야 할 삶 속에서, 시간을 멈추게 하고 시간을 멈추게 만들고 싶은 것이다. 시간이란 본디 흐르는 것이 아니라 멈춰 있어야만 하는 게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게 만드는 것이 사랑이다. 그 순간은 아마 천국과도 닮아있을 것이고, 내 마음이나 영혼은 머물러 있던 어느 낯선 세계를 가리키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사랑하는 사람은 운다. 사랑의 순간이 그리워서, 잃지 않고 싶어서, 시간에 휩쓸려가고 싶지 않아서 운다. 당신의 웃음이나 손짓이 너무나 소중해서, 그것이 결국 사라지고 말 것임을 알아서, 모든 게 다 흘러가 버리고 말 것임을 알아서 운다.
원문: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