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고유의 언어를 가진 자들이 그 언어를 어떻게 쓰느냐에 따라서 세상은 변할 수도,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시인은 지식을 말하지 않더라도 지식인의 형태를 띠게 된다. 순수/참여 같은 분류를 굳이 언급하지 않더라도, 세상에 관해 이야기하는 모든 시는 그 시대의 정신과 분위기를 담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 시인이 순응과 퇴행을 택하느냐, 전진 혹은 전복을 택하느냐는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화두다.
노혜경 시인의 『그러나 최소한 나는 저항한다』를 여름에 한 번, 겨울에 한 번, 두 번 읽었다. 2020년의 마지막 독서였다. 시에 대해 알지도, 모르지도 않는 나는 두 번을 읽고 나서야 과거의 글들을 모은 이 책이 지금 나온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여성시’란 무엇인가라는 고민, 그리고 왜 시인은 ‘페미니스트여야 하는가’라는 문제의식을 던지기 위함이었으리라 믿는다.
이 책에서 다루는 ‘여성시 운동’은 내겐 비교적 생소한 것이었다. 간단히 말하자면 ‘여류 시인’에서 ‘여류’를 떼고, 여성들이 쓴 시에 대해 온당한 평가를 하자는 90년대의 운동이다. 언뜻 보기에는 명확하고 단순해 보이는 ‘여성시 운동’이 어려웠던 이유는 ‘여성시’의 가치를 알아보는 사람이 드물었기 때문이다. 반면 남성 시인의 ‘도발적’인 시나, 남성의 시각을 대리하는 여성 시인의 시는 평단의 찬사를 얻었다.
저자가 이 책에서 가장 중심적으로 호명하는 인물은 박서원과 김정란이다. 이들의 시를 저자는 “얼굴이 없는, 혹은 지워진 여자들”이라는 말로 설명한다. 그리고 박서원의 「부서진 십자가」의 일부를 인용한다.
이들의 시는 다른 얼굴로, 즉 맨얼굴로 말해야 할 필요성을 깊이 인식한 세계이다. 왜냐하면 그들이 드러내야 하는 것은 지금껏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던 여자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남성 단론의 규정된 틀 안에서 그들이 얻었던 얼굴을 ‘지워버린’, 그리하여 다시 새로운 얼굴을 가질 때까지는 얼굴이 없는 여자들.
- 『그러나 최소한 나는 저항한다』, 127쪽
주여,
나에게 성녀가 되길 요구하지 마세요.갈비뼈 앙상한 십자가 허리
망치로 내려친다 차례대로……
손목……무릎……발목내 팔뚝도 면도날로 난도질한다
아무도 내 얼굴을 잘 모른다
버려진 내 시
소망으로 가득 찼었지만 나뒹구는 내 시와 고통은 얼굴을 원치 않는다.
- 박서원, 「부서진 십자가」(1995)에서
저자는 박서원이 인터뷰에서 자기 시에 영향을 미친 전통이 있느냐 묻는 말에 “없다”고 했다며 “슬프게도 이 대답은 대개의 여성시인에게도 해당이 된다”고 밝힌다. 그는 “여성이 인간이면서 시인이기 위해 통과해야 하는 길목에 가장 큰 장애로 버티고 선 것이 ‘전통이라 불리는 남성들의 언어”였다고 강조한다.
80년대 거대한 적이 사라지고, 민중문학이 길을 잃었을 때도 여성 시인들은은 ‘화전민 선언'(이어령)이나 ‘아버지 죽이기’ 식의 남성적 전통을 바탕으로 변화를 꿰할 수가 없었다. 그때 여성은 ‘여성’에 집중하며 새로운 길을 만든다. 그러나 저자는 “이때 여자는 시인 자신이 아니라 그야말로 ‘얼굴이 지워진’ 여자들이다. 어머니이기도 하고, 딸이기도 하며, 여신이기도 한 여자들”(149쪽)이라고 말한다.
나의 얄팍함은 이 지점에서 문단 내 성폭력 고발을 비롯한 미투 운동과 최영미의 시 「괴물」을 떠올리게 했다. ‘매끈한 얼굴을 가진 남성주체’가 단독자로서 언어를 집행할 때, 여성은 어떻게 맞설 수 있는가를 ‘여성시’가 보여준 게 아닐까 싶었다. 그들의 시가 지금 페미니스트 시인들의 유일한 ‘참고 문헌 있음’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처음 이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박서원 시인이 죽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는 2012년 죽었지만, 그의 죽음은 2017년에 알려졌다. 박서원은 가부장제 속 여성의 고통을 몸소 체득하며 살아온 사람이었고, 자신의 트라우마를 고백하듯 시를 써 내려간 사람이다. 그는 모두가 좋아하는 시를 쓰지도 않았고, 번듯한 교수도, 문단의 스타도 아니었다. 김정란은 박서원 자서전 『천년의 겨울을 건너온 여자』의 추천 글에 이렇게 적었다.
그의 삶은, 한국이라는 아주 특수한 가부장 문화를 가진 땅에서 가진 것 없이 태어난 한 아름답고 재능있는 여성이 겪어야 하는 온갖 종류의 고난을 뭉뚱그려 가지고 있는 상징이며, 그의 고통 뒤에는 남성들에게 받은 학대를 여성에게 갚으며 살아온 이 땅의 전근대적 어머니들의 비극이 겹겹이 쌓여있다. 그는 시라는 칼로 그 순환고리를 끊어낸다.
- 경향신문 「박서원 시인 2012년 쓸쓸한 죽음…문인들 아무도 몰랐다」에서 재인용
그의 죽음이 단순히 재능있던 한 시인의 ‘안타까운 죽음’으로 끝낼 수 있는 이야기일까. 때문에 「그러나 최소한 나는 저항한다」는 박서원의 존재를 재조명한다는 점만으로도 의미가 작지 않다고 생각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수많은 영역에서 ‘아버지’로 상징되는 권력이 남성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생각한다. 남자들이 눈치 없고 무례하고 쉽게 분개할 수 있는 이유는, 폭력과 기행을 ‘성격’으로 포장할 수 있는 이유는, 그들 자연스럽게 부여받은 ‘승계권’ 때문일 것이라고. 그들에게는 언제나 ‘안전망’이 있다. 가부장이 될 수 있다는, 또는 절대로 가부장이 남성인 자신을 버리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 그것이다.
하지만 박서원에겐 안전망이 없었다. ‘마녀’도 ‘성녀’도 아닌 그냥 ‘시인’. ‘여류’가 아니라 그냥 ‘시인’. ‘女시인’이 아닌 그냥 ‘시인’이 되기 위해서 남자들의 ‘믿음’에 양날의 검을 내밀었다. 어쩌면 지금도 많은 여성은 거대한 ‘남성권력’을 앞에 두고, 자신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서 싸우고 있을 것이다. 싸움을 걸어도 숨기에만 급급한 ‘아버지’와 ‘아버지 지망생’들, 대체 어디에 있는가.
여성을 착취하는 시인, 페미니즘을 거부하고 배척하는 시인은 ‘시’를 권력의 도구로 이용한다. 시와 작품은 다르게 평가해야 한다는 지적이 있지만, 적어도 그 시를 통해 얻은 ‘지위’를 이용해 성폭력을 저지르거나 반여성주의적 언사를 반복한다면 그 작품을 개인의 행적과 따로 평가하긴 어렵다.
A 시인은 박원순 전 시장의 장례식에 가지 않겠다고 말한 류호정 정의당 의원을 두고 “구상유취: 입에서 젖내가 남. 당신들 100만 명의 정의감과 도덕성보다 나는 박원순의 단 하루가 더 아쉽고 안타깝다”라고 말했다. ‘구상유취’라는 시인의 사자성어 인용은 박 전 시장 지지자에게는 “공격하라”는 하나의 신호나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는 이외수의 시 여성혐오적 시 「단풍」(“저 년이 아무리 예쁘게 단장을 하고 치맛자락을 살랑거리며 화냥기를 드러내 보여도”)을 보고도 “문학이 버려야 할 말이 너무 많아졌어요 형님”이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A 시인이 말하는 문학은 대체 누구를 위한, 누구에 의해 쓰인 문학인가. ‘여성’의 존재를 지운 문학인 것은 확실하다.
‘신망받는 남성 권력자를 잃은 것, ‘남성이 억울할지도 모르는 상황’은 누군가에게는 ‘피해 여성’의 고통보다 주요한 관심사일지도 모른다. 그렇기에 사회적으로 돌아올 비난과 불이익을 감수해야 하는, 그럼에도 ‘고발하고’ 또 ‘연대하는’ 이들의 목소리는, 시’와 ‘시인’의 권위를 통해 틀어막히기도 한다.
문단 내 성폭력 운동을 통해 성폭력 혐의로 처벌받거나 혐의를 인정한 시인, 소설가만 14명이다(페미위키 인용). 남성 문인 상당수가 교수나 출판사의 높은 위치에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성폭력이 드러나지 않은 경우도 꽤나 많을 것이다. 상황이 이럴진대 페미니스트가 아닌, 남성 권력의 온존에 힘쓰는 시인들의 시를 우리가 왜 읽어야 하는가? 과연 ‘버려야 할 시’는 없는 것일까?
원문: 박정훈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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