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입니다』는 올봄 출간된 지 얼마 안 되어 구매했지만 솔직히 말해 실제로 읽어볼 생각은 없었던 책이다. 나 역시 여성으로서 직장에서 일해본 경험이 있고, 그 미묘한 역학관계와 공기와도 같은 차별구조를 충분히 안다고 생각했다. 또한 그간의 이슈가 업데이트 될 때마다 관심을 갖고 지켜봐 왔기에 모르는 부분이 없다고 여겼다. 출간 이후 워낙 해당 책에 대해서 말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까닭에 안 읽었지만 마치 읽은 듯한 느낌이 들기도 했고. 그러므로 김지은 씨를 응원하려는 의도로 사기는 샀되 다 아는 내용들이라 생각해 딱히 읽을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러다 다시 한번 읽어볼 결심을 하게 된 것은 박원순 시장의 일이 있고 나서였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첫째의 하교 시간에 맞추어 횡단보도 앞에서 기다리고 서 있는데 근처의 다른 엄마들이 이야기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모두 전날 보도된 사건 관련 충격적인 감상을 말하며 안희정과의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들은 모두 안희정 사건이 ‘불륜’이라 확신했는데, 심장이 덜컹할 정도로 황망한 순간이었다. 사건 이후 김지은 씨가 그렇게 열심히 싸워왔건만,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았건만, 아직도 세간의 인식은 이렇구나 하는 절망감.
그러면서 다시금 책을 읽어볼 마음이 들었다. 읽고 나면 왠지 더 명확해질 것 같았다. 왜 사람들이 김지은 씨의 행동에 의구심을 가지는지, 왜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지. 더 나아가서 이해하고 싶었다. 김지은 씨가 아니라 안희정의 행동을. 사실 나로서는 김지은 씨보다 안희정의 행동이 훨씬 미스테리했다. 많은 사람들이 김지은 씨가 왜 네 번이나 성폭력에 무방비했는지에 의문을 품곤 했다. 처음 한 번이면 모를까 어째서 네 번이나 반복될 동안 무방비하게 당하고만 있었냐고. 진작 싫다고 명확하게 말하지 그랬느냐고. 당장 그만두고 나오지 않고 뭐 했냐고.
그런데 사실 김지은 씨 입장에서는 당연한 것 아닌가 싶다. 여성의 먹고사니즘은 흔히 남성의 그것보다 훨씬 하찮게 취급되고는 한다. 하지만 여성 역시 한 명의 노동자이다. 직장이란 상사가 부당한 지시를 내렸다고 당장에 박차고 뛰쳐나오거나 할 수 있는 곳이 아니다. 하물며 정치계처럼 평판이 중요하고 꼬리표처럼 평생을 따라다니게 되는 곳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나로서는 “당장 그만두지 않고 뭐 했느냐”고 말하는 사람들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그렇다면 “지사님 너무 좋아.” 등 지인과 주고받은 문자는 무엇이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있을 텐데, 내가 만약 “문재인 대통령 너무 좋아”라고 말한들 그게 문재인 대통령과 성관계를 맺고 싶다는 뜻은 아니지 않은가? 너무 명백한 이 사실을 혼동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내 기준에서는 내내 미스테리했다.
내게는 안희정이 왜 모든 리스크를 감수하고 네 번이나 성폭력을 저질렀는지가 더 궁금한 부분이었다. 안희정이야말로 가진 것이 너무나 많은 사람이었다. 가장 유력한 차기 대권주자였고, 현직 도지사였다. 열혈지지자도 무척이나 많았다. ‘훈남 페미니스트’로서 페이스북 등지에서 여성들이나 진보 성향의 인사들로부터의 호감도 또한 높았다. 그런 사람이 도대체 왜 그런 범죄를 저질렀을까, 왜 한 번도 아니고 네 번씩이나 그랬을까 하는 의문이 내 안에 존재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렇게 겁이 없었을까, 어쩌면 그토록 뻔뻔했을까 하는 의구심이 있었다.
그래서 읽어보았고, 읽어본 결과 명백해졌다. 김지은 씨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진작에 안다고 생각했고, 생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안희정에 대해서는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네 번이나 반복해서 성폭력을 저질렀던 까닭, 그것은 바로 ‘그래도 되기’ 때문이었다. 직장 부하에게 성폭력을 가하고 버젓이 “너도 미투할 거니?”라고 뻔뻔하게 물어볼 수 있었던 이유는, “너는 나를 비추는 거울이다. 모두가 No를 외칠 때에도 너는 Yes을 말해야 한다” 같은 1920–1930년대 문학작품 같은 대사를 부끄럽지 않게 내뱉을 수 있었던 이유는, 차마 문제라고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그런 행동을 당연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멍 때리지 마라, 절대 기다리게 해서는 안 된다, 격식 있는 자리인지 미리 확인해라, 지위에 맞지 않는 자리를 싫어하신다, 행사 시 앉는 자리에 착석하는지 끝까지 봐야 한다, 보안이 필요한 식사는 수행비서 개인 카드로 결제해라, 사우나, 미용, 마사지 등 지사의 개인 일과 비용도 수행비서 개인 사비로 써라, 지사 가족들의 비용도 수행비서가 부담한다, 현금을 넉넉히 가지고 다녀라, 한도 500만 원짜리 카드를 만들어라, 지사의 식성을 파악해라, 아주 세세한 음식 기호를 외워서 맞춰드려야 한다, 얼굴이나 이름을 못 외우니 수행비서가 보조 기억 장치로 있다가 옆에서 알려드려야 한다, 각종 신고서도 수행비서가 써서 챙겨드려라, 경제 용어도 외워라, 못 알아들으면 안 된다, KTX를 탈 때 수행비서 앞에 있는 받침대는 지사의 커피와 가방을 놓을 수 있게 펼쳐놓아라, 아메리카노에 각설탕은 1개, 시럽일 때는 2번 펌핑해야 한다, 빵을 사 오라 하면 크루아상이나 따뜻한 플레인 베이글을 사라, 크림치즈와 나이프를 같이 준비해드려라, 가끔 단 것을 찾으시면 그럴 땐 옛날 꽈배기를 사라, 우유는 예전에는 커피우유만 드셨으나 요즘에는 흰 우유를 주로 드신다, 꼭 빨대 챙겨라, 자주 부르고 자주 심부름을 시키신다, 병장을 웃기는 이등병의 마음을 가져라, 공식 일정 이후 시간, 기업, 친구, 여자 이야기는 주변에 함구하라, 특히 여자 관련해서는 인수인계서 메모에서도 삭제해라, 단어 언급조차 하지 말고 어디에 쓰지도 마라, 보고 듣고 알아도 비밀을 유지하고 반드시 함구하라, 중요하니 재차 강조한다 (…) 마지막으로 지금까지의 인수인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사님 기분’이다, 여기에 별표 두 개를 그려라, 인수인계 사항들은 모두 지사님 기분을 맞춰드리기 위한 것이다.
- 89–90쪽
안희정은 전지적 상사였다. 특히 비서는 그의 기분을 건드리면 안 된다. 기분이 중요하다는 말은 무형화된 권력을 구성하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그가 누군가를 자를 때는 “나를 기분 나쁘게 했다”는 한마디면 됐다. 특히 별정직은 도지사에게 절대적인 채용과 면직 권한이 있었기 때문에 지사의 말 한마디면 바로 해고할 수 있었다. 상사의 기분에 따라 잘릴 수 있었다. (…) 인사권자의 ‘기분’이 업무의 핵심이었다.
- 89–90쪽
퇴근 후에도 부르면 언제든지 달려가야 했다. 공적 업무 외에 사적으로 지시받는 업무도 많다 보니 어느 순간 공과 사가 구분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지시하는 일이라면 수행비서는 뭐든 해결해내야 했다. 지사의 가족과 관련된 업무로 휴일 구분 없이 수시로 있었다. 휴가 때나 명절에 아들과 요트를 타러 가거나 가족끼리 놀러 가는 일정의 숙소, 식당, 체험 활동 등을 알아보고 예약해야 했고, 지사의 친구 가족이나 지인들이 묵을 장소도 알아봐야 했다. 사모나 지사가 친구들 모임에서 술을 마셔 운전을 못 하면 한밤중에 불려 나가 대리운전을 했다. 맥주, 담배 같은 개인 기호품도 수행비서가 대신 사서 숙소나 집무실로 가져다주어야 했다. 미투 이후 나는 “왜 네 번이나 지사의 방에 갔느냐”는 말을 수없이 들어야 했지만, 그날들은 사적 신부름 때문에 불려 갔던 수백 번 중 아주 일부에 불과했다. 늦은 밤, 새벽, 퇴근 후, 휴일에도 몇 번이고 불려 가 심부름을 했다.
- 100쪽
성폭력의 여부를 떠나 정치권 노동자들의 현실이 차마 그 정도로 열악할 것이라고는 나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지도자 한 명이 왕처럼 군림하고 모든 것이 그 하나만을 위해 돌아가는 세상. 수트핏을 위해 자신은 전화기조차 휴대하지 않고 모든 소지품을 누군가 대신 들고 다니며 걸려오는 모든 전화는 비서가 대신 받아주는 세상. 통화할 일이 있으면 통화 대기음은 비서가 듣다가 상대가 받는 순간에 정확히 통화가 연결되는 세상. 그가 원할 때면 비서는 샤워 중에라도 무조건 전화를 받아야 하는 세상. 지도자는 단 1분 1초도 불필요한 에너지를 소비할 필요가 없는 세상. 그의 편의를 위해서라면 한밤중이든 새벽이든 무조건 누군가 달려와 수발을 들어주는 세상. 현관에 놓여진 구두의 각도부터 커피의 온도, 농도, 맛까지 미세하게 조절해주는 세상. ‘단것을 먹고 싶다’고 하면 그게 무엇인지 자세한 설명 없이도 알아서 꽈배기 등을 대령해야 하는 세상.
이처럼 모든 것이 자신 위주로 돌아가는 세상에서, 김지은 씨는 안희정에게 한 명의 인간으로 생각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에게 있어서 김지은 씨는 AI나 로봇 같은 일종의 시스템이자 편의를 위한 도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그런 세계다 보니 그런 대상에게 ‘성욕’의 수발을 들게 하는 것에도 일체의 거리낌이 없었던 것이다. 애초에 같은 인간이 아니었으므로 문제의식조차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그렇기에 “너도 미투할 거니?”라는 질문을 던진 뒤 바로 직후에 또 범행을 저지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게 범죄를 저지른 현장을 자신의 피해자에게 청소하도록 지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여러 이유로 읽기를 망설였던 책이지만, 결과적으로 읽기를 너무나 잘했던 책이었다. 읽지 않았으면 그저 막연히 안다고만 생각하고 끝났을 것이다. 실제로 이토록 자세히 알지는 못했을 것이다. 정치권에서 단 하나의 목표만을 위해, ‘선거 승리’라는 맹목적인 목표를 위해 얼마나 많은 가치와 의제가 짓밟히는지, 인권과 약자를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그 안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을 착취하는지에 관해서. 그 안이 얼마나 권위적이고 수직적인지에 관해서. 읽지 않았더라면 미처 몰랐을 사실들이다. 책의 저자인 김지은 씨에 관해서라면 여러 측면에서 수없이 감사 인사를 드려야 마땅하지만 안희정과 같은 인물을 대통령이 되지 못하게 한 것에 관해 특히나 감사한 마음이 든다.
원문: 한승혜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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