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쿵쾅쿵쾅’ 심장 소리에 눈을 떴다. 잠깐 눈을 붙인다는 게 소파에 얼마나 오래 누워 있던 걸까? 휴대폰 화면 시간은 5시 30분, 약 2시간 반 정도 잔 것 같다. 잠을 잤는데도 심장 소리는 줄어들지 않는다. 어떻게 심장이 24시간 동안 이럴 수 있는 건지, 기분 탓인가 싶어 손을 심장에 얹어 보지만 손바닥을 통해 심장의 맹렬한 움직임이 전달된다.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내 역량을 200% 아니 그 이상을 발휘해야 감당이 되는 경우가 생긴다. 어떤 경우는 80%만 발휘해도 충분할 때도 있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해야 하는 업무나 익숙하지 않은 새로운 기술이나 방법론을 요구하는 프로젝트를 맡게 되면 하루에도 수없이 고비가 찾아온다. 그리고 그럴 때마다 내 심장은 한번 쿵쾅거리기 시작해서는 프로젝트가 종료될 때까지 몇 달이 지속됐다. 이런 쿵쾅거림을 들을 때마다 나도 힘들지만 팀원들이 생각났다.
나도 이 정도인데 직원들은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무게의 책임이나 부담을 느낄 때 얼마나 두려울까?
직장 생활 하면서 나름 굴곡이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서 내가 상대적으로는 평탄한 직장 생활을 오랜 기간 동안 했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예전에는 심장이 24시간 쉬지 않고 쿵쾅거렸던 기억이 없기 때문이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내가 노력하면 다 할 수 있는 일들을 했고, 해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염려 따위는 없었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 심장의 쿵쾅거림이 잦아지고 심리적으로도 불안한 상황이 생기면서 생각을 달리하게 되었다.
그래서였을까? 작년 초에 읽었던 글 중 다른 나라 얘기로 치부했던 글이 떠올랐다. 바로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가 쓴 「직장에서 심리적 안정감 만들기(Creating Psychological Safety in the Workplace)」라는 제목의 글이었는데, 직장 생활에서 직원들이 갖는 심리적 안정감이 얼마나 중요한지에 대한 내용이었다.
내가 이 글을 지나쳤던 가장 큰 이유는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것 자체가 직장 생활에서는 사치스러운 표현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굳이 심리적 안정감이라는 표현까지 써가면서 이런 부분을 신경 써야 하나 싶었다. 하지만 2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내 생각이 참으로 짧았다는 것을 깨닫는다. 심리적 안정감은 절대 사치스러운 게 아니라 본인과 회사 둘 모두에게 너무나도 필요한 요소였던 것이다.
내가 생각하는 직장에서의 심리적 안정감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하나, 업무와 관련해서 어떤 말을 하더라도 벌을 받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
외국계 회사에 다녔을 때 일이다. 사장님은 분기마다 타운홀 미팅을 가졌다. 회사 실적, 규모가 큰 프로젝트, 글로벌 메시지를 공유하는 자리였다. 그리고 타운홀 미팅 마지막 순서는 직원들로부터 질문을 받는 시간이었다. 외국계 기업이니 활발한 질문을 할 거라는 환상은 이직 후 첫 타운홀 미팅에서 깨졌다.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한 번은 아시아태평양(APAC) 지역 총괄사장이 방문해 타운홀 미팅을 함께 진행했다. 이번에도 마지막 순서로 질의응답 시간이 있었다. 이번에도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궁여지책으로 타운홀 미팅을 주관했던 팀장은 사전에 사업부 별로 한 명씩 질문자를 준비했고, 질문이 겹치지 않게 하기 위해 사전에 질문을 미리 받았다. 질문자를 섭외하는 쪽이나 섭외 받는 쪽이나 씁쓸한 것은 매한가지였다. 직원들은 왜 질문을 하지 않았을까? 물론 아주 가끔 평범한 질문을 하는 직원은 있었다. 그러던 중에 나의 궁금증이 풀린 사건이 벌어졌다.
이번에도 여느 때처럼 타운홀 미팅은 조용한 분위기에 진행됐다. 사장님이 발표한 슬라이드 마지막에는 새롭게 도입하는 성과보상 시스템에 대한 내용이 있었다. 성과보상이면 직원들이 가장 피부에 와 닿을 수 있는 예민하면서도 중요한 것이었다. 그런데 사장님 발표는 너무 두루뭉술했다. 얼핏 들으면 앞으로 평가와 보상을 깐깐하게 할 거란 얘기 같은데, 얼마나 객관적으로 할 것인지에 대한 내용이 없었다.
질의응답 시간이 되었고 평소처럼 아무도 질문하지 않았다. 바로 그때 옆팀 A 과장이 손을 번쩍 들었다. 마이크를 건네받은 그는 사이다 같은 질문을 던졌다.
성과 보상 설명 잘 들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어떻게 평가를 하겠다는 것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성과 중심 문화를 만들겠다고 하셨는데, 구체적인 설명 부탁드립니다.
사장님은 당황했다. 그리고 사장님의 대답은 직원들을 황당하게 했다.
좋은 질문이에요. 평가와 성과 보상에 대해서는 이 자리에서 많은 것을 공개할 수는 없고요. 필요하면 HR팀을 통해서 커뮤니케이션하도록 할게요.
질문한 A 과장의 얼굴을 바라봤다. 실망이 가득한 얼굴이었다. 얼마나 답답했으면 내가 손들어서 ‘아니 그래서 성과 중심 문화를 어떻게 만드실 건가요? 그리고 어떻게 평가하겠다는 것이죠?’라고 물을 뻔했다. 더 슬픈 건 그렇게 사이다 질문을 한 A 과장을 안 좋게 보는 시선이 사내에 있었다는 것. A 과장은 그 이후로 한 번도 질문하지 않았고 1년 후 회사를 떠났다. 본인이 속한 사업부에서 대체 불가한 인재여서 그만둘 때 오히려 사장님이 말렸다는 소문이 있었지만 미련 없이 떠났다고 한다.
한 번은 네덜란드에서 온 직원이 타운홀 미팅에 참석했다가 아무도 질문하지 않는 것을 보면서 나에게 ‘이해 가지 않는다’라고 말했던 적이 있다. 내가 간단히 이유를 설명했는데도 그는 이해하지 못한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서 내가 ‘네덜란드에서는 어떻게 하는데?’라고 묻자 그는 충격적인 에피소드를 들려줬다.
새해 타운홀 미팅 때 네덜란드 대표가 앞에 나와서 올해 전략을 소개했어. 그런데 갑자기 주니어 직원 한 명이 손을 들더니 ‘저는 방금 대표님이 말한 전략에 동의할 수 없어요’라고 말하더니 조목조목 반박하는 이유를 설명했어.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알아? 바로 그 자리에서 대표랑 모든 직원이 전략에 대해 다시 리뷰하고 논의하고 수정하는 시간을 가졌어.
한국에선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문화 차이라고 하기엔 너무 극과 극이었다. 이제 와서 생각해보니 이건 문화 차이가 아니라 심리적 안정감의 차이였다. 우리 회사에선 ‘내가 어떤 말을 잘못 뱉었다가는 벌을 받든 손해를 보든 할 수 있다’라고 생각하는 반면 네덜란드 친구 회사에서는 ‘내가 어떤 말을 해도 벌을 받거나 손해 보지 않는다’라고 생각한다. 그 차이에서 오는 심리적 안정감이 직원들로 하여금 말을 하게 만드는 것이다.
사실 내가 가장 부러웠던 건, 그렇게 모든 직원이 모인 자리에서 전략에 대해 허심탄회한 논의를 했다면 모두가 전략을 제대로 알고 한 해를 시작했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앞에서 언급한 아티클의 저자인 에이미 에드먼슨 교수는 이런 조직을 두고 ‘두려움 없는 조직(fearless organization)’이라고 불렀다. 그녀가 말하는 심리적 안정감은 편안함과는 다르다. 편안하다고 업무에 관한 말을 마구 쏟아내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어떤 소리를 내더라도 나를 탓하는 사람이 없다는 확신이 있으면 업무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내기 시작한다.
주위를 둘러보면 보수적인 회사에서도 두려움 없는 팀(fearless team)이 존재하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는 대개 팀 리더가 심리적 안정감의 필요성을 깨달은 경우이다. 예를 들어 팀 리더 본인이 신사업 기획을 위해 몇 날 며칠을 아등바등했으나 실패했는데, 팀원 중 한 사람이 제안한 아이디어가 채택이 되어 좋은 성과를 낸 것을 경험하면 그다음부터도 팀원들이 적극적으로 말할 수 있는 분위기를 낼 수 있도록 노력한다.
이처럼 심리적 안정감은 성과와도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이다. 그리고 이제는 리더들도 복잡하고 예측 불가한 경영 환경에서 훌륭한 성과를 내기 위해선 심리적 안정감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팀원에게 심리적 안정감을 주고 싶은 리더에게 주고 싶은 팁 하나. 직원의 행동에 즉각적인 대응을 하지 말아 보자. 직원의 말에 습관적으로 처벌하듯 성급하게 다가갈 때가 있다. 그러기보다는 잘했든 못했든 칭찬을 해주면서 가능성을 찾아서 접목할 수 있는 부분을 일러 주면 어떨까?
내가 속한 조직을 두려움이 없는 조직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노력하는 방법 하나는 ‘그래서 네 의견은 어떤데?’라고 묻는다. 이전 상사에게서 배운 방법이다. 나에게 솔루션을 구하는 팀원에게 ‘그래서 네 의견은 어떤데?’라고 묻고 그 방법이 80% 수준만 되어도 본인의 의견대로 진행해보도록 한다. 이를 통해 팀원들은 자신의 의견이 반영되어 결과로 나오는 것을 보게 되고, 이후로는 자신의 의견을 보다 자신감 있게 얘기하기 시작했다.
둘, 업무와 관련해서 본인이 감당할 수 없는 책임과 부담을 혼자 감당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할 수 있는 환경
회사에선 직원을 과소평가해도 안 되지만 과대평가해서도 안 된다. 그러기 위해선 회사가 직원에게 바라는 역할이 어느 정도인지 합의가 필요하다. 그래서 책임과 역할(R&R)을 분명하게 하기도 하고, 프로젝트의 경우 처음 시작할 때 이 부부에 대해서 서로 공감대를 형성하기도 한다.
컨설팅 프로젝트를 하다 보면 힘든 고객사를 만날 때가 있다. 이때는 프로젝트 멤버들의 실력도 중요하지만 매니징을 담당하는 프로젝트 매니저(PM)의 역할이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진다. 그렇다고 고객사들이 얼마나 까다로울지를 프로젝트 시작 전부터 100% 파악하는 것은 어렵다. 그럴뿐더러 순탄하게 진행되던 프로젝트가 의외의 변수를 만나 최악의 프로젝트가 되기도 한다. PM의 경험 부족으로 인해 사태를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도 충분히 생길 수 있다.
이때 모든 책임과 부담을 오롯이 자신이 감당해야 한다면 어떤 심정일까? 한마디로 매일 아침 눈 뜨는 게 괴로운 심정일 것이다. 반대로 그 모든 짐을 본인이 감당하지 않고 회사가 덜어줄 거라는 확신이 있다면 결과는 정말 달라진다. 힘든 상황을 위에 알리는 에스컬레이션(escalation) 프로세스가 잘 되어 있고, 적절한 타이밍에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인지한다면 오히려 거침없이 프로젝트를 매니징 할 수 있을 것이다.
팀장 역할을 처음 맡았을 때 팀원들이 했던 말이 있다.
마크, 우리가 마크 얼굴에 먹칠 안 하게 열심히 할게요. 대신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팀을 우선해서 지켜줘요.
그리고 팀원들은 정말이지 멋지게 일했다. 소수 정예, 일당백이라는 표현이 부족할 정도로 최선의 노력으로 최고의 성과를 이뤄냈다. 멋진 팀원을 만난 것도 복이었지만, 그들이 그럴 수 있었던 건 뒷감당은 팀장인 내가 해주리라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나 역시 내 힘이 닿는 데까지 때로는 정말 자리를 걸고서라도 팀원들이 사지에 몰리지 않도록 애를 썼다.
그러고 보면 이러한 사회적 안정감은 사회 초년생일 때나 임원일 때나 동일하게 간절히 원하는 것이기도 하다. 나 역시 회사에서 막내 임원이지만 마음 깊숙이는 사회적 안정감을 너무나 원한다. 자주 하는 생각이지만 대표는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때로는 대표님이 감당해주길 바라는 무게의 십자가가 있다.
물론 모든 상황에서 도움받는다면 임원 자격 박탈이지만 나조차도 버거운 문제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과감히 대표님에게 SOS를 치기도 하는데 열에 아홉은 흔쾌히 받아 주신다. 그런 심리적 안정감이 있기에 나 역시 과감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그 과정에서 성장한다. 문득 대표님은 어떻게 심리적 안정감을 갖는지 궁금해진다.
심리적 안정감은 무엇보다 자신의 역량을 최대한 발휘하게 하는 힘이 있다. 리더가 이를 잘 안다면 팀원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위한 작은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고맙게도 회사의 경영진이 이 사실을 안다면 당장 문화를 바꿀 순 없더라도 분위기부터 바꿀 수는 있지 않을까?
원문: Mark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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