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본 기사에 따르면 20대 청년 7명 중 1명이 학자금 대출로 인한 빚을 졌으며 그 수는 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중 6개월 이상 이자를 못 낸 학생들이 지난 5년간 2배 가까이 늘었고, 청년층 실업률은 40% 정도로 전 연령대 중 가장 가파르게 상승했다. 개인 회생 신청도 전 연령대 중 유일하게 늘어 20% 이상 상승했다.
코로나로 아르바이트 자리는 씨가 말랐고, 학교도 가지 못한 채 골방에 틀어박혀 지낸 한 해이지만, 등록금은 요지부동이다. 서울 대학가에는 원룸을 계약했지만, 학교를 갈 일도 없어서 방을 비운 채로 몇 달째 월세만 내는 빈방이 널려 있다고 한다. 상황이 이렇지만 청년층의 목소리랄 것은 거의 들리지가 않는다.
가장 큰 이유는 심화된 고립과 목소리가 나올 법한 창구 자체가 거의 사라졌다는 점이 클 것이다. 대자보를 붙일 대학도 없고, 뛰쳐나가 시위를 벌일 수도 없고, 저항의 상징인 축제나 놀이조차 없으며, 남은 것은 그저 각자 방 안에 틀어박혀 1년 내내 토익 문제집이나 한국사 시험문제를 풀면서 유튜브나 구경하는 게 대부분일 것이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이 줄어들면서, 청춘 자체가 실종된지도 모르겠다.
청년 시절은, 그야말로 가장 다양하고 낯선 타인들을 만나면서, 삶의 이정표를 세우기 시작하고, 자기 나름의 관계 법칙을 만들어가면서, 비교적 다양한 가능성들을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실험해보는 시기이다. 청년들이 만들어가는 세상이나 문화, 창업이나 새로운 시도들은 대개 동아리 방이나 술집, 카페에서, 다소 치기 어린 용기나 모험심 속에서 피어나곤 한다.
함께 모여 무언가 작당을 하고, 때론 실패하고, 때론 무척 신선한 길을 열어젖히면서 세상을 싱그럽게 물들인다. 그러나 더 이상 청년들이 밖으로 나서지 못하는 시대에, 그들은 다른 어느 세대보다도 더 인생 전체에 어떤 심각한 타격을 입을지도 모른다.
보통 가정을 꾸린 나이대의 사람들이라면 이럴 때 자기 할 일이나 하면서 부리나케 가정으로 돌아가면 된다. 가족을 챙기고, 그 속에서 돈독한 정을 쌓고, 서로에게 필요한 일들을 해나가면 된다. 그러나 홀로 인생을 시작해야 하는 적지 않은 청년들은 빚과 취업난에 허덕이며 더 고립된다. 그 와중에도 부부가 협심해 그래도 번듯한 직장이 있고, 그래서 각종 대출과 도움으로 영혼을 끌어모을 수 있는 세대들은 위기가 기회라고 투자에 열을 올리지만, 그만큼 청년들에게는 어마어마한 벽이 앞에 올라서는 셈이다.
집도 없고 직장도 없이 수천만 원의 빚만 떠안은 청년들 앞에는, 불과 2–3년 만에 앞으로 살 곳이 되어주리라 믿었던 도시 곳곳의 주택들이 몇 배의 가격으로 뛰어오른 미래만 기다린다. 나는 나름 88만 원 세대라고, 절망적인 세대라는 이름을 부여받은 세대였지만, 지금 청년 세대에 비하면 그 시절의 절망은 귀여웠던 수준이라는 생각이 든다. 점점 세상의 모든 부와 권력은 더 확고하고 거대하게 기성세대들에게 집중된다. 그 와중에 청년들은 영혼마저 털리듯이 주워 먹을 것 하나 없어지게 되어간다.
청년의 이런 몰락과 좌절은 사회 전체를 무너뜨릴 것 같겠지만 아마 아주 오랫동안 이 사회는 이렇게 새로운 세대들을 착취하면서 이어질 것이다. 이미 세계에서는 그런 사회들이 있다. 비대해진 기성세대의 부와 권력이 확고하게 유지되고, 청년들은 그에 짓눌려 온전한 미래를 꿈꾸기가 불가능해진 그런 사회들이 존재하고, 그것은 또한 우리 사회의 미래가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을 것이다. 한 사회가 완전히 몰락하기까지는 원래 몇백 년은 걸리기 마련이고, 내가 살아있는 한 나의 부는 점점 늘어나기만 할 것이고, 나의 권력과 세력은 유지될 것이며, 그럴수록 그들의 목소리는 점점 더 들리지 않고, 그들의 모습도 점점 더 볼 필요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게 누군가에게는 참으로 좋은 삶만이 이어질 테고, 주변에도 그런 좋은 삶만이 넘쳐나는 듯이 느껴질테니 말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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