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계속 공정성이 논란되는 것은 그들이 의지할 게 공정성밖에 없기 때문이다. 대다수 청년은 이미 수저와 재능의 차이에 따른 출발점의 차이를 인정한다. 각자가 가진 재능이라는 것도 시기나 질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부러움과 선망, 존경의 대상에 가깝다.
기성세대가 볼 때 금수저라는 것은 어딘지 부끄럽고, 떳떳하지 못하고, 감추어야 할 일처럼 느껴질 수도 있지만 청년 세대 사이에서 금수저는 당당하고, 부럽기 그지없고, 오히려 얼마든지 내세울 만한 것이다. 그들은 그에 따른 삶의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
그러나 그런 인정은 어딘지 절망적인 데가 있다. 기성세대의 상당수가 세상을 평등하게 바꿀 수 있고, 출발점을 똑같이 맞출 수 있는 세상이 가능할 거라 꿈꾸고, 혁명을 공부했다면, 청년 세대들은 더 이상 그런 꿈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세상에 대해 기성세대가 포기라고 불릴 만한 인정을 이미 밑바탕에 깔았다.
대신 그들이 절박할 정도로 원하는 것은 룰의 공평함이다. 출발점도 다르고, 재능도 다르고, 따라서 능력도 다르더라도, 적어도 심판이나 경기 시작 이후의 룰은 같길 바란다. 그 룰의 공평함에 절망적일 정도로 의지한다. 이런 삶을 대하는 태도, 세계관은 아무래도 그 속에 속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는 좀처럼 정확히 알기 어려운, 이질적인 것이다.
그들은 왜 이 세계의 거대한 불평등에 분노하지 않는가? 왜 이 세계 전체를 바꾸는 어떤 정치적 가능성에 기대를 걸지 않는가? 그 대신 왜 그토록 자기가 속한 영역의 공정성만을 강박적일 정도로 요구하는가? 그 작은 세계의 룰이 무엇 때문에 그리도 중요한가? 왜 그들은 대의도 모르고, 넓은 세계관도 없고, 장기적인 인생 전망도 없이, 그 코앞의 공정성에 눈에 불을 켜고 집착하는가?
그 이유는 청년 세대가 겪은 삶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그들의 정체성, 존재, 심리적 안정감, 기쁨과 인정의 메커니즘, 절망과 좌절이 작동하는 인생의 사이클 자체가 그랬기 때문이다. 아직 스스로가 누구인지 제대로 알기 전부터 강요받았던 끝도 없는 평가의 연속, 그 평가에 따른 상벌, 줄 세우기, 그로 인해 계속해 재구성되는 미래의 전망, 자기 존재의 가치, 서열 지어진 정체성 따위가 평생을 따라다니며 그들을 구속했기 때문이다.
그들은 학점이 B+이냐 B냐에 따라 절망과 기쁨의 강을 오가고, 토익 점수가 910점이냐 890점이냐에 따라 시간과 자유를 결정 당한다. 자기가 다니는 학교가 서연고서성한이중경외시건동홍국숭세단광명상가 중 어딘지에 따라 존재의 가치가 달라진다고 느낀다.
인생의 모든 요소에 서열을 부여하고, 가장 섬세한 측면에까지 우열을 만들어 그들에게 던져준 건 이 세상이다. 그들이 그런 일들을 너무도 즐기도록 태어났기 때문이 아니다. 같은 학교라도 어느 학부나 어느 학과인지 정시나 수시 중 어떤 전형으로 입학했는지, 같은 회사라도 어느 부서인지 어느 계열사인지 어느 지점인지에 따라 서열을 매겨놓고 ‘인간의 가치’를 값 매기도록 만들었기 때문이다.
어떤 브랜드의 아파트에 사는지, 자가인지 임대인지, 아파트 평수에 따라, 지역에 따라 더 나은 삶을 사는지 아닌지 판단하는 건 그들이 원했기 때문이 아니다. 항상 그런 식으로 삶의 모든 요소를 파악하고, 인식하며, 비교해서, 스스로의 위치를 확인하도록 평생 강요받았기 때문이다.
청년 세대를 중심으로 터져 나오는 공정성 문제들이 모두 옳은 건 아니다. 때때로 그런 공정성 논란은 자신이 선 지반을 무시한 채 더 약자를 향한 폭력이 되기도 한다. 이를테면 실질적인 공정성을 위해 마련된 방편들이 기계적인 공정성이라는 탈을 쓴 차별에 의해 공격당한다. 그러나 적어도 그들이 공정성에 느끼는 절박함만은 진실일 것이다. 그들은 세상의 평등 대신 공정성을 택했고, 그것이 그들이 딛고 설 수 있는 마지막 대지라는 걸 안다.
청년들은 더 이상 기적을 바라지 않는다. 대개 바라는 것은 그들의 부모처럼, 혹은 그들의 부모가 그러지 못했기에, 그저 안정적인 직장을 얻고, 작은 집 하나 마련하고, 이따금 호캉스나 다니면서 사는 소소한 삶 정도일 뿐이다. 그러나 그런 삶으로 가는 일조차 태생적으로 대부분 정해져 있고, 삶의 어느 시점에 이미 결정 당했다는 걸 안다.
그나마 그들이 그런 아주 작은 삶으로 이르기 위한 마지막 길이 공정성의 길이라고 믿을 뿐이다. 궁지에 몰린 쥐는 마지막으로 고양이라도 물어뜯으려 한다. 그것이 마지막 길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원문: 문화평론가 정지우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