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동안 내가 즐겨 본 어느 드라마의 주인공은 사랑에 빠진 상대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이런 질문을 던졌다.
짜장면이 좋아요, 짬뽕이 좋아요?
흔들리지만 단언할 수 없는, 이건지 저건지 알 수 없는 갈등과 고민을 시청자들이 온몸 찌릿하며 느낄 수 있도록 해준 그 말. 어디 한 번 곰곰 생각해보자. 어디 이만한 고민이 또 있겠는지. 치킨이야 ‘반반무마니(양념 반, 후라이드 반, 무 많이의 합성어)’로 해결됐다지만, 짜장과 짬뽕을 향한 깊은 고뇌는 여전히, 그리고 앞으로도 풀래야 풀 수 없는 문제다.
혹자는 ‘아니, 그릇까지 친절히 반으로 나눈 짬짜면도 나왔는데 그게 무슨 문제냐’란 생각을 할 수도 있겠지만, 어디 그게 가당키나 한 말인가. 둘 다 만들 시간 부족하니 적당히 만들어둔 국물이나 부어 내놓는 짬뽕은 무엇이며, 곱빼기도 모자란 짜장면은 양을 절반이나 줄여야 한다니! 결국 그러다 보면 우린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러니까 짜장면도 짬뽕도 아닌 그냥 ‘짬짜면’이나 먹게 되는 불상사를 겪게 되고 마는 법이다.
다양성 vs 통일성
서양철학사를 살펴보면 이렇듯 짜장면과 짬뽕처럼 두 개의 가치관을 놓고 벌이는 갈등과 고민이 끊이지 않았다. 특히 철학사상 최초의 대립이라고 일컬어지는 남부 이탈리아의 이오니아학파와 소아시아 해안(오늘날 터키 지역에 해당) 엘레아학파의 논쟁이 대표적이다.
이오니아학파의 대표적 인물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다양성을 통해 세상을 바라봤다. 그는 낮과 밤, 정의와 불의, 선과 악 등 대립물의 지속적인 모순과 충돌을 바탕으로 한 끊임없는 변화가 세상의 본질이라 생각했다. 그의 철학은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담글 수 없다”는 말로 대표된다. 이는 강 자체는 변화하지 않는 것으로 보일지 모르나 강물은 지금 이 순간에도 끊임없이 흐른다는 뜻으로, 세상이 끊임없는 변화를 통해 구성되고 유지되며 또한 이를 바탕으로 균형과 통일성을 찾아간다고 설명한 것이다.
엘레아학파의 파르메니데스는 이런 헤라클레이토스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박한다. 다양성이 아닌 통일성을 강조한 것이다. “현실은 전체 속에서만 파악 가능하다”란 말로 대표할 수 있는 그의 철학은 존재의 개념을 서양철학 최초로 연구해 다다른 결과다. 그에 따르면 ‘있는 것은 있고 없는 것은 없으며, 없는 것은 말할 수 없음은 물론 파악할 수도 없다’ 생각해보자. 과연 없는 것을 생각할 수 있는지.
돌이켜보면 우린 무엇이 없다는 생각 정도만 할 수 있을 뿐 ‘없음’ 그 자체를 결코 머리에 그릴 수는 없다. ‘없음’이 없으니 그가 생각하기에 세상엔 ‘있음’만 존재한다. 또한 ‘있음’이 여럿 존재하려면 그 사이사이에 ‘없음’이 있어야 하므로 ‘있음’은 하나뿐이다. 즉, 존재는 통일성을 갖춘 하나다.
두 철학자와 함께하는 중국집
이제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가 함께 하는 중국집의 풍경을 상상해보자. 헤라클레이토스는 아마 제아무리 많은 사람이 있더라도 각자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어야 한다고 주장했을 것이다. 설령 그것이 짜장, 짬뽕을 넘어 볶음밥이나 울면, 잡채밥, 잡탕밥이더라도 말이다.
그는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방금 자네가 먹은 볶음밥과 지금의 볶음밥은 다른 것이니 어서 더 먹어보라”며 다양한 음식을 맛보길 서로에게 권했을 것이다. 볶음밥과 짬뽕 국물을 함께 내준 중국집 사장님에겐 ‘세상의 이치를 깨달은 사람’이라며 엄지를 치켜세웠을지도 모르고 말이다.
반면 파르메니데스는 중국집에 도착하자마자 “짜장으로 통일!”을 외쳤을 것이다. 그가 생각하기에 다른 메뉴들은 어차피 짜장면과 하나도 다르지 않다. 짬뽕은 물론 탕수육, 라조기, 깐풍기, 양장피 같은 요리들도 ‘존재’에 포함되는 부분에 불과할 뿐이다. 그는 이렇게 말하지 않았을까.
이거나 저거나 다 똑같은 마당에 500원이나 더 내고 자네에게 짬뽕을 시켜줄 이유가 어디 있는가?
짜장면이냐 짬뽕이냐를 넘어, 융합의 세계로
짜장면이냐 짬뽕이냐의 고민은 지구가 멸망하거나 전국의 중국집이 모두 문을 닫지 않는 한평생 끝나지 않을 게다. 서두에 이야기한 것처럼 아무리 짬짜면이 나오고, 탕볶밥에 2인용 쟁반짜장이 출시되어도 온전한 짜장면 혹은 짬뽕 한 그릇을 나 혼자 먹고 싶은 마음이야 결코 사라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헤라클레이토스와 파르메니데스의 철학에서 시작된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다툼 또한 지난 2,500년의 세월 동안 계속되어 왔다. 4–5세기경엔 헤라클레이토스의 이론을 모순이라고 일축하면서도 세상의 끊임없는 변화를 인정한 플라톤과 경험의 본질이 인간의 환상에 불과하다는 제논의 입장이 펼쳐졌으며, 19–20세기엔 두 상반되는 것의 통합에 근거한 헤겔의 변증법적 체계와 파르메니데스의 근본적 명제로 되돌아가 자신의 철학을 펼친 하이데거의 존재론이 각광 받았다.
다양성과 통일성에 대한 주장 둘 다 ‘결코 아니다’라며 포기하기엔 나름의 타당함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 때문에 이들의 대립과 고민 또한 계속될 것이다. 지구가 흔적도 없이 사라지거나 철학이 씨도 남지 않는 한 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들의 주장은 상대의 입장을 인정하고 반박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발전을 이룩할 수 있었음을 잊어선 안 된다. 이것이 소위 ‘융합’이 필요한 이유이며, 다름은 인정하는 자세일 것이다. 결국엔 진하게 끌어안으며 서로의 애정을 확인한 드라마 속 두 주인공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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