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리 소비’ 트렌드 바람을 타고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나 동물 실험 반대와 관련한 상품들이 속속 등장했다. 또한 페미니즘의 부상으로 기존의 ‘사탕 껍질’ 속옷을 벗어 던지고 편하면서도 저렴한 남성용 속옷을 찾는 여성들이 많아진다. 이러한 움직임 이후, 나는 SNS 광고를 통해 말도 안 되는 수많은 제품 광고를 만났다.
이는 결국 기존의 질서에 대항하는 움직임을 새로운 시장으로 흡수하려는 강렬한 시도이며, 이런 소비는 결국 당신의 본 목적을 흐리게 할 수도 있다. 물론 그러한 새로운 시장이 기존 시장보다는 당신이 달성하고자 하는 목표 어딘가에는 부합할 수 있다. 하지만 때때로 이러한 시장에서는 “대안”이라는 이름 하에 때때로 상품들이 터무니없이 비싸게 판매되기도 한다. 또한 이러한 대안/윤리 시장의 고객층에 여성이 많다는 점으로 볼 때 여성세와 관련한 문제 제기 또한 피하기 어려워 보인다.
기본적으로는 더 나은, 더 윤리적인 제품으로 기존의 제품을 대체하는 것은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만, 이 때문에 과소비, 여성세, 혹은 환경 파괴를 피하겠다는 본 목적을 흐리는 것이 아닌지 한 번쯤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1. 윤리적인 화장품
나도 화장품을 위한 동물 실험에 반대한다. 그래서 현재는 모든 화장품 및 세정 제품의 종류를 줄여 비누 한 가지만 쓴다. 동물 실험 문제가 사회에서 논의되고, 이에 대안적인 상품이 나오는 것을 진심으로 환영한다. 어떤 회사는 해외 일부 국가에 대한 진출을 이러한 동물실험을 피하기 위해 포기했다는 미담도 들려온다. 이 영향으로 기존의 회사들도 바뀌었으면 좋겠다.
다만 동물 실험과 비윤리적으로 생산되는 제품들을 가장 효과적으로 줄일 방법은 불매다. 내가 사용하는 제품의 가짓수를 세 가지에서 두 가지로, 또 한 가지로 줄여나가는 것이다.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다는 고가의 상품으로 화장대를 새롭게 꽉 채우는 것이 아니다. 추가로 동물 실험을 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화장품의 생산 그 자체는 지구에 사는 다른 생물들(나를 포함해서)을 어느 정도 해할 수밖에 없기에, 그 소비를 줄여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환경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해본다면, 상품의 소비/유통 과정 자체를 줄이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동물 실험을 하지 않는다거나, 환경에 해를 덜 끼친다는 제품으로 기존 상품을 조금씩 대체해나갈 수는 있다. 그리고 이러한 윤리 소비 운동이 관성적으로 허용되어 온 동물 실험 시장에 대한 문제 제기의 역할을 한다는 면에서는 큰 의미가 있다. 다만 내 생각에는 소비는 본질적으로 비윤리적인 영향력을 포함할 수밖에 없기에, 그것을 극대화하는 방식으로서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소비는 우리에게 만족감을 준다. 그렇기에 내가 화장품이나 세정 제품의 갯수를 줄이려는 노력보다 윤리적 제품으로 인증받은 화장품 하나를 사는 것이 더 뿌듯하고 쉬운 길이다. 하지만 줄이는 게 어려운 만큼, 근본적인 문제 해결에는 더욱더 효과적인 방법이다. 정말로 동물 실험 문제에 관심이 있거나 환경 문제에 금전적으로 투자를 하고 싶다면, 비글구조협회나 카라 등 유관 단체를 직접적으로 후원하는 것이 더 직접적인 효과가 있으리라고 생각한다.
2. 생리대 파동, 그 이후
기존 남성들에 의해 만들어지던 생리대가 사실 여성의 몸에 해롭다는 것이 밝혀진 이후, 면 생리대에 대한 구매가 폭발적으로 늘었고, 생리컵 같은 대안적 수단에 대한 관심 또한 폭발했다. 이에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있었다.
실리콘 컵 한 개에 3–4만 원씩 받을 수 있는 생리컵 시장은 많은 남성 사업가들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자신이 생리를 경험하지도 않으면서, ‘여자 친구’가 알려줬다거나, ‘누나’가 알려줬다면서 결국 팀원에는 여성을 배제하고 발명한 비싼 생리컵이 시장에 속속 등장했다. 어떤 것은 터무니없이 컸고, 어떤 것은 생리를 하는 사람 입장에서 보기에 구상 자체가 말이 안 됐다.
면 생리대도 터무니없이 고급스런 시장으로 자리 잡았다. 여기서 한 가지 고백하자면 나도 면 생리대를 몇 번 비싸게 주고 샀었지만 몇 번 쓰고 난 곧 다시 기저귀 면(그냥 순면)으로 돌아왔다. 기저귀 면으로 쓰이는 순면을 진심으로 추천한다. 그냥 하얀 순면 아무거나, 거즈면도 가능하다. 통풍도 잘 되고 빨래도 훨씬 쉽다. 밖으로 샐까 봐 불안하면 속옷을 두 겹(?) 입거나 하면 되는데 양이 적을 때 한 번쯤 기저귀용 면을 접어서 써봤으면 좋겠다.
아예 잊어버리면 떨어뜨릴 수 있는 위험성이야 있지만 적응이 되면 좋다. 불안하다면 집에서만 써보는 방법을 추천한다. 빨래를 할 때는 사용한 면 기저귀를 물로 좀 씻어낸 뒤에 적셔서 산소계 표백제를 좀 부어놓기만 하면 된다. 패드 생리대가 생리통에도 피부에도 최악이라 상품으로 나온 면 생리대를 처음 쓸 때는 좀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사용하다 보니 빨래도 잘 안 되고 방수천 때문에 통풍이 안 되어서 생리통에 큰 효과가 없었다.
사람마다 경험은 다르겠지만, 정말 아무도 이런 얘기를 잘 하지 않기 때문에 말을 꺼낸다. 아마도 이 말은 아무에게도 돈이 되는 말이 아니기 때문이 아닐까. 기존의 상품을 줄여버리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가장 쉬우면서 싼 방법인데, 이런 대안이 전혀 거론되지 않는다는 건(모두에게 맞을 수는 없지만) 결국은 자본에 이로운 방향으로 대안에 대한 논의 또한 견인된다는 것을 보여준다.
패드 생리대는 오가닉이니 뭐니 종류별로 다 써봤지만 큰 차이를 못 느꼈고, 생리대 파동 이후 내가 아는 고가의 생리대를 판매하는 판매자들이 거의 다 아저씨라는 것을 알고는 더더욱 구매하고 싶어지지 않았다. 여성들의 불안은 전부 더 고가의 생리용품 소비 시장으로 흡수되었고, 이로 배를 불린 것은 또다시 남성들이었다.
면 생리대 사용은 개인마다 다를 수 있다. 난 추가로 탐폰도 이용해왔는데, 탐폰도 외국보다 국내가 훨씬 비싸고 종류도 적어서 해외의 지인에게 부탁해서 구매했다. 최근에는 국내에서 여성이 출시한 탐폰을 구매해서 사용하는데, 이는 당사자의 입장에서 만들었기 때문만이 아니라 가격과 품질 모두 만족스러워서 계속 사용할 예정이다. 생리대를 아예 안 쓸 수는 없으므로.
3. 여성의 속옷
여성의 속옷은 최근 여성들이 겪어온 부당한 경제적 차별과 신체적 구속에 대한 집중도가 상승함에 따라 위로 한 번, 아래로 한 번 주목받았다. 참고로 나는 와이어 브래지어를 안 입고 나서야 그동안 가끔 발작처럼 왼쪽 가슴에서 숨 막히게 느껴지던 흉통의 원인이 그것임을 알았다.
브래지어가 할퀴고 지나간 여성의 신체 위에 브라렛 시장이 북적북적 자리 잡았다. 여성들이 브래지어를 벗어 던진 이유는 와이어로 인한 압박도 있었지만 그것이 내 몸 보기 좋으라는 ‘사탕 껍질’이었기 때문도 있었건만. 브라렛 시장은 기존 브래지어 시장 그 이상의 화려하고 야시시한 사탕 껍질의 향연이 되었다. 대안적인 시도는 ‘섹시’해야 했고 ‘스타일리시’해야 하니까.
이러한 시장은 갑갑한 캡과 와이어를 벗어 던지는 목적은 달성했을지 몰라도, 내 몸에 사탕 껍질을 둘러대면서 사업가들의 배를 불려주지 말자는 목표에는 먹칠이 되었다. 굳이 그런 걸 비싸게 주고 살지 말고 그렇게 조금씩 새어나가는 돈을 잡아서 경제적 주권을 회복하자는 시도 또한 화려한 광고가 틀어막는다. 심지어 한 (남성) 사업가는 정기적으로 브래지어나 브라렛 따위를 새로 사도록 유도하는 서비스를 런칭했다. 백래시도 이런 백래시가 없다.
많은 여성이 탈브라를 외치며 노력하지만, 당신 피부에 제일 좋은 건 레이스보다 면이며, 더 이상 당신의 몸은 남자 눈에 섹시해 보이기 위한 객체가 아니라는 목소리를 감추려는 시도는 계속된다. 당신의 지갑에서 눈을 떼지 못하면서 말이다.
이제는 아랫도리의 차례이다. 남성용 트렁크를 사봤다. 마트에서 할인 중이긴 했지만 하나에 1,000원꼴이었다. 100% 면이었고, 통풍도 잘 되고 빨래도 쉬웠다. 다시는 예전의 레이스 달리고 통풍도 안 되고 끼는, 무엇보다도 비싼 여성용 속옷으로 돌아갈 일이 없다고 생각한다. 아, 하지만 이러한 흐름이 생기자마자 돈 냄새를 맡은 사람들이 또 몰려들어 시장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물론 여성의 신체적 특징을 고려한 새로운 상품은 좋다. 다만 꽤 많은 판매자가 그 가격을 터무니없이 비싸게 팔면서 동시에 질 또한 현저하게 떨어지는 게 눈에 보인다는 점이 문제였다. 게다가 이제는 집안에서는 트렁크만 맨몸에 입을 수 있다는 광고를 봤다. 아니 팬티를 맨몸에 입을 수 있다는 광고는 대체 무슨 생각인가. 마치 특별히 맨몸으로 샤워한다는 말 같다. 이제 속옷도 실내용 실외용을 따로 사라는 것인가? 나갈 땐 치마 입어야 하니까?
여성용이라며 빨래하기 힘든 새하얀색 혹은 파스텔 톤으로, 누가 봐도 저렴한 소재로 대충 만들어진 속옷은 여성용이라는 타이틀 하에 한 장에 2만 원 이상을 호가했다. 그리고 이런 시장이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기존의 경제적인 갈취를 벗어나려는 여성들의 시도를 이런 기회로 활용하는 그들에게 부아가 치민다. (남성용과 비슷한 수준의 퀄리티와 합리적인 가격대의 속옷 판매자들에게는 큰 불만이 없다.)
여성의 ‘사이즈’나 ‘신체적 구조’에 맞췄다는 그런 속옷이 아주 조금 더 좋을 수는 있다. 하지만 정말 그 가격을 줘야 하는지, 남성들도 과연 그 가격으로 그 정도 퀄리티의 속옷을 살지 한 번쯤 고민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으면 좋겠다. 결국은 당신의 지갑에서 돈이 추가로 나가는 일이 될 뿐이므로. 결국에는 사탕껍질 시장이 단지 형태만 바꾼 것 같아 보이는 건 기분 탓일까.
참고로 나는 골반이 매우 작지만 남성용 트렁크가 커서 흘러내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트렁크를 기준으로 이야기했지만 트렁크보다 브리프나 드로어즈 종류를 선호하는 여성들도 많다. 자신에게 맞는 방법을 찾는 것은 좋을 것 같다.
4. 제로 웨이스트 운동
몇 번이고 강조하지만 나는 윤리적인 소비 시도를 비판하는 게 아니다. 윤리적 소비를 하려는 마음은 정말 숭고하다고 생각하며 존경하고 응원한다. 다만 그 과정에서 돈 냄새를 맡은 사업가들에게 덜 현혹되자는 것이다.(정도를 넘은 부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다.) 이러한 시도 중 가장 역설적인 것이 ‘제로 웨이스트’ 운동이라고 생각한다.
해당 운동 자체는 너무 좋다. 하지만 일단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쓰레기를 양산한다는 점을 인식해야 한다. 봉투를 한 번 쓸 때, 내가 쓰레기를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이 환경적 영향에 대해 한 번 더 멈춰서 생각해야 한다. 코로나19 전부터 많은 사람이 기후 위기에 집중하면서 제로웨이스트 또한 많은 관심을 받는다. 하지만 만약 제로웨이스트를 위해 매번 새로운 제품을 구매한다면?
매우 가깝게는 에코백이나 텀블러 같은 예시를 들 수 있다. 사서 몇 번 안 쓰고 버리는 에코백이나 텀블러는 환경에 해가 되며, 쓰레기를 양산하는 것에 불과하다. 기왕 사는 꼭 필요한 물품을 분해 플라스틱이나 종이 포장지로 되는 상품으로 살 수는 있다. 하지만 기존에 사용도 하지 않던 상품을 제로웨이스트를 위해 일부러 구매하는 건 목적에 결국 위배될 수 있다. (일부 상품에 투자하여 이를 영구적으로 쓰는 걸 비난하고자 함은 아니다.) 광고와 상품에 귀 기울이기보단 목적을 한 번 더 되새기는 것이 필요하다.
운동에 있어 소비는 가장 쉬운 덫이다
어릴 때, 공부하기 싫을 때 문방구에 가서 펜을 사면 마치 내가 공부를 열심히 한 것처럼 뿌듯했다. 이처럼 소비는 사실상 가장 쉽게 만족감을 얻는 행위 중 하나이다. (따지고 보면 그 소비 행위 저변에 있는 노동을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은 경우가 많지만 말이다. 이 두 과정은 떨어져 있기에 인지하기가 어렵다.) 때문에 우리가 어떤 결심을 내리면 그 목적과 뜻에 상관없이 소비로서 ‘실천에의 착각’을 얻을 수 있다.
구직이 쉽지 않은 건 누구나 잘 알 것이다. 그만큼 새로운 시장의 개척을 하려는 사람들 또한 넘쳐난다. 시장이 가능한 영역이라면, 게다가 그것이 고가의 소비를 감수할 수 있는 가치관의 영역이라면 그곳에는 시장이 생긴다. 그리고 때로 그 시장은 원 목적을 배반한다. 넘쳐나는 광고에 비해 왜 그 상품을 사면 안 되는지 이야기하는 창구들은 너무나 적고 소중하다.
내가 어떤 상품은 사지 말라 사라 결정해줄 수는 없으며 그럴 자격은 없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어떤 가치관을 실현코자 행위를 할 때는 이 목적이 무엇인가, 그 행위로서 이 소비가 적합한가 하는 고민은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원문: 익명의 브런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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