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손정우 미국 송환을 불허한 강영수 판사에 대한 기사문에 “니 딸도 당해봐야 정신 차리겠느냐?”는 비난 댓글이 많습니다. 다른 성범죄 기사문에도 그런 댓글이 많이 보입니다. 분노는 정당하지만 그런 방식의 분노 표출은 정당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제가 전에 쓴 글을 재업합니다.
성범죄 기사에 끔찍한 댓글들이 많이 보입니다.
너 딸도 똑같이 당해라!
저놈 마누라도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기사 댓글뿐 아니라 실제로 저런 말을 나름 정의롭게 하시는 분들을 종종 봅니다. 남성만이 아니라 여성들도 그런 말을 하기도 합니다. 왜들 이럴까요? 죄는 가해자가 지었는데 왜 벌은 가해자와 가까운 관계에 있는 여성들이 받아야 할까요?
물론 우리 사회에 만연한 여성혐오 문화 때문이죠. 경제적으로 취약한 위치에 있는 젊은 남성들이 외제차 타는 남성이 아니라 그 옆 조수석에 앉아있는 여성을 욕하는 것처럼, 무슨 불만스런 일이 생기면 비난의 화살은 여성에게 꽂힙니다. 남성이 잘못했을 때도 어떻게든 관련된 여성 먼저 비난합니다. 심지어 성폭력 사건이 터져도 “여가부는 뭐하냐?” “페미니스트들은 뭐하냐?”며 가해자가 아니라 여성들을 욕하는 남성들이 꼭 있죠. 여성혐오 문화입니다.
그런데, 더 뿌리 깊고 무서운 무의식이 ‘너 딸도’ ‘너 마누라도’라는 발언의 밑바탕을 이루고 있습니다. 예를 들어 볼게요. 주차된 자동차를 들이받은 사고가 났다고 합시다. 사고를 낸 사람은 “아프게 해서 죄송합니다.”라고 자동차에 사과하지 않습니다. “차를 망가뜨려서 죄송합니다.”라고 차 주인에게 사과하고 차 주인에게 변상해 줍니다. 자동차는 사람이 아니니까요.
이게 바로 성폭력 범죄에 반응하는 일반 사람들의 사고방식입니다. 여성은 같은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성폭력 범죄 피해 여성의 고통에 관심이 없고 가해자의 미래를 걱정해줍니다. 여성은 앞서 예를 든 자동차처럼 재산입니다. 가해자는 같은 인간으로서 여성에게 폭력을 행사한 것이 아니라 다른 남성(즉 피해 여성의 아버지나 남편)의 재산을 망가뜨린 셈이 됩니다.
그러므로 벌은 가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아내나 딸이 받습니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가해자의 재산도 망가뜨려야 공평하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가해자가 아니라 “가해자의 딸/아내도 똑같이 당해라!”라는 말을 하게 됩니다. 무서운 현상입니다.
지금으로부터 3,800년 전 고대에 등장한 함무라비 법전을 볼까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란 말, 위에 썼습니다. 다들 알고 계시죠? 그러나 계급에 따라 달리 적용되었다는 것도 알고 계시죠? 귀족의 눈을 멀게 하면 가해자 귀족의 눈도 멀게 했지만, 평민의 눈을 멀게 하면 돈만 내었죠. 노예의 눈인 경우는 평민의 반값. 이 함무라비 법전의 내용이 여성사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한 남성이 한 남성을 죽입니다. 가해자는 사형당하죠. 그런데 한 남성이 한 어린 여성을 죽입니다. 그러면 어떤 벌을 받을까요? 눈에는 눈, 이니까 그 남성이 사형당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남성의 딸이 사형당합니다. 여자는 남자의 재산이니까요. 남자와 동등한 인격체가 아니기 때문에 남자의 목숨으로 값을 치르고 속죄하는 벌을 받지 않습니다. “너도 재산을 잃는 피해를 당해라!”며 살인자의 딸을 죽이는 거죠. 눈에는 눈, 이 이렇게 적용됩니다.
자, 이제 현대를 볼까요. 밤길 가다 엉덩이 만진 추행범 잡아서 경찰서에 가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아세요? 경찰관 앞에서도 “그깟 엉덩이 좀 만졌다고 닳냐!” 하며 뻔뻔하게 굴던 추행범이, 피해자의 아버지나 오빠, 남편이 나타나면 90도 각도로 절하며 죄송하다고 빕니다. 사과는 피해자 여성이 아니라 피해자 여성의 가부장 위치에 있는 남성에게 합니다. 여성을 더럽혀서 물건값을 떨어뜨린 것에 대해 물건주인에게 용서를 비는 거죠. 햐~ 현재 우리나라가 이렇습니다. 우리는 21세기가 아니라 고대 함무라비 시대에 살고 있어요.
가부장제가 역사에 등장한 반만년 동안 사람들 사고방식에 뿌리박힌 이 인식이 지금까지 여성을 대하는 우리 문화의 근본 틀입니다. 이 틀이 지금까지 견고히 유지되어 현재 사람들이 이윤택 조민기 관련 기사에 “니 딸도 당해라!”라고 분노하고 있는 것이죠. 이건 ‘너가 다른 남성의 재산인 여성을 건드려 남성에게 피해를 줬으니 너도 재산피해를 당해봐라’ 이 뜻입니다. 모르셨죠? 발언하는 본인은 나름 가해자에 대한 분노를 갖고 정의구현을 위해 하는 말이겠지만, 이는 여성을 같은 인간으로 보지 않는 발언입니다. 전혀 정의롭지 않습니다.
바꿉시다. 여성도 동등한 인권을 가진 인간입니다.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폭력 언행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고, 벌은 당연히 가해자가 받아야 합니다. 가해자와 친밀한 관계에 있는 여성들을 언급하지 맙시다.
원문: 박신영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