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손이 절로 마우스로 간다. 밀린 외주 작업을 해도 시원찮을 판에, 또다시 사부작사부작 인터넷 조사를 해본다. ‘권리금’ ‘매매’ ‘양도’ ‘위생교육’ 따위의 키워드를 연달아 검색하며, 나는 또다시 나의 작은 가게를 오픈하는 달콤한 상상에 젖어 든다. 지난번의 교훈으로는 부족했을까? 나는 드리어 ‘이번에는 다를 거야’라는, 스스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로 또다시 작은 가게를 준비해본다.
그러니까 이 모든 시작은 약 2달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는 작은 가게를 오픈하고 싶었다. 내가 애장하는 빈티지와 예술 오브제들, 그리고 책들을 판매하고 싶었다. 그래도 꽤나 현실적인 편이라, 소품을 판매하는 것만으로는 월세를 감당하기 어렵다는 것을 충분히 알았다.
그렇다면 간단한 음료를 팔아보자. 그래서 내 수준에서 만들 수 있는 다양한 음료를 생각해 봤다. 드립 커피, 글라스 와인, 내가 좋아하는 티 한 종류까지. 음료를 팔려면 위생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걸 안 뒤에는 20시간 가까이 위생교육을 받았다.
여기에 폭발적인 추진력까지 더해지자, 가게 계약까지 덜컥 완료했다. 가게 계약을 한 이후에는 디자이너 친구들을 불러 모아 공간을 꾸밀 방법에 대해서 연구했다. 카페를 하는 친구에게 조언을 얻기까지 했다.
그렇다면 나는 지금쯤 가게를 하고 있어야 하지 않나? 그런데 지금 나는 뭘 하니? 컴퓨터 앞에 앉아 밀린 외주가 하기 싫어 사부작사부작 다시 가게를 준비하고 있지 않은가.
나는 그 한 달여간의 노력 끝에,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니 이곳에서 가게를 오픈하는 것이 시기상조가 아닐까 하는 걱정, 혹은 갑작스러운 변덕이 불쑥 튀어나온 것이다. 게다가 부동산 계약서를 자세히 살펴보니 내가 놓친 부분을 발견했다. 가게를 오픈하겠다는 마음에 무심코 작지만 큰 실수를 저질러 버린 것이었다.
한 달 가까이, 나뿐 아니라 내 친구들까지 함께 노력하며 준비했던 가게였다. 그래도 오픈할 수는 없었다. 시기도 불리했고, 계약서도 불리했다. 결국 가게 오픈을 포기했다. 친구들에게는 따로 사과했다. 나의 작은 실수와 판단 미스 때문에 다 함께 ‘제대로’ 삽질한 것이었다.
한 달을 몰입했지만, 결국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2020년의 2월. 나는 내가 포기했던 성산동의 그 가게를 ‘삽질의 추억’이라 명하고, 고이고이 추억 속에 묻어두기로 했다.
‘삽질’의 추억
어떤 활동이 ‘삽질의 추억’으로 기억되려면 충족해야 하는 조건이 몇 가지 있다.
- 공들인 시간이 흐지부지 사라지는 경험
- 그 시간 동안 들였던 노력을 누구에게도 보여줄 수 없는 현재의 모습
- 차라리 그 시간에 여행이라도 다녔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
- ‘그래도 겪어보니 많은 걸 배우지 않았냐’고 긍정적으로 생각하려 해도, ‘굳이 겪어야 했을까?’라고 툭 튀어나와 버리는 진심
그러니까 삽질의 추억은, 실패의 경험과는 또 다른 결의 시행착오이다. “내가 그때 이랬다면 좀 더 좋지 않았을까?”라는 말보다 “내가 굳이 그걸 왜 했을까”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성과는 없을 수도 있다. 똑같은 감정과 경험을 느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다른 방도로 하는 게 더 좋지 않았을까. 이 후회를 동반하는 시행착오인 것이다.
한 번의 제대로 된 삽질, 그게 토대가 되어 그다음 시도부터는 삽질을 피해갈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애석하게도 20살 이후의 내 행보는 ‘삽질의 연대기’에 가깝다. 경험에 경험을 쌓을 수 있다면 난 이미 유명한 디자이너나 작가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쪽을 팠다가 ‘꽝’을 겪고 나면 다시 저쪽을 파 보는 ‘삽질의 삶’을 택하게 된 지 오래다. 결국 나라는 사람의 정원에는 경험에 경험을 더한 무성한 밭 대신, 두더지 게임처럼 구멍 뻥뻥 뚫린 삽질의 흔적만 남게 된 것이다.
‘삽질’의 연대기
20살 때는 옷에 참 관심이 많았다. 잔뜩 차려입은 내 모습을 찍어 블로그에 하나하나 올렸다. 블로그는 생각보다 흥했고, 나는 여러 행사에 초대되기도 했다. 그때 패션 블로거들과 많이 알게 되기도 했다. 그들과 나란히 앉아 패션과 SNS의 활용법에 대해 토론을 하던 시절도 있었다. 내 작은 브랜드를 론칭해보겠노라 동에 번쩍 서에 번쩍 원단 시장을 뛰어다닌 적도 있었다.
그런데 무엇이 나를 멈추게 만들었을까. 내가 특별하게 옷을 좋아하지는 않는다는 깨달음이었을까, 너무나도 멋지고 당차 보였던 다른 파워블로거들에 위축돼서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돌연 블로그의 모든 게시물을 내렸다. 혹시라도 구글에 내 예전 사진이 검색될까 모든 기록을 샅샅이 찾아내 지우기도 했다.
하지만 ‘옷’으로 시작된 나의 첫 삽질은 또 다른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블로그 생활은 나에게 ‘글쓰기’라는 새로운 취미를 안겨줬던 것이다. 마침 파리에 가기까지 했으니, 글쓰기의 소재는 정말 무궁무진했다. 향수 가게, 골동품 거리, 디자인 박물관들과 패션위크. 더 좋은 글을 쓰기 위한 명목으로 300만 원의 거금을 들여 비싼 카메라도 구입했다. (그때 구입한 카메라는 아직도 잘 쓴다.)
그렇게 ‘사진’이라는 새로운 삽질이 추가되어 거대한 구덩이를 만들었다. 아예 한 달 동안 세계 4대 패션쇼라고 부르는 뉴욕·밀라노·파리·런던의 패션위크를 취재하는 여행을 해보기로 한 것이다. 오로지 인터넷에 나온 패션쇼 정보만으로 무작정 쇼장 앞에 찾아가 멋진 사람들의 사진을 찍었다. 그 막무가내 정신 덕분일까, 나처럼 무작정 비행기를 타고 날아온 여러 포토그래퍼도 알게 되었다. 그때 만났던 무명의 포토그래퍼들은 이제 패션쇼에 정식으로 초대를 받는 멋진 프로들이 되었다.
나? 나는 당연히 전문 사진사와는 아주 거리가 먼 삶을 산다. 삽질의 완성은 아무것도 이루지 않았을 때 비로소 완성되는 것 아니겠는가. 나는 그들의 소식을 SNS로 접하면서 ‘내가 한때 이런 사람들과 같이 활동했다’는 ‘라떼는 말이야~’만 연발한다.
물론 결과가 아예 없던 것은 아니다. 그렇게 알게 된 포토그래퍼분의 소개로 국내 유명 잡지의 객원기자가 될 수 있었다. 블로그 활동의 연장선에서, 파리 골목의 멋진 가게와 문화를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근데 그마저도 담당 에디터 분이 퇴사하시며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말았다. 마침 이 시기와 맞물려 취업의 기회가 찾아왔다. 그렇게 사진과 글로 가득 찼던 20대 초반의 삽질은 어이없게 막을 내렸다.
한국에 돌아와서도 삽질은 이어졌다. 아마 너무 이른 나이에 겪었던, 체질에 맞지 않는 기업 생활 때문이었던 것 같다. 갑자기 스타트업이 만들고 싶어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너무 흔한 기획이었는데, 엄청난 프로젝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아주 열중해서 앱을 개발했다. 특별한 수익 구조는 없었지만 ‘위대한’ 시도의 선두에 있다며 자신을 위안했다.
아주 열중했던 덕인지, 결과물은 1년 만에 나왔다. 하지만 결과는(당연하게도) 우리가, 혹은 내가 기대했던 것에 많이 못 미쳤다. 사용자는 5,000명도 채 안 되었고, 우리가 준비했던 앱보다 훨씬 기발한 기획으로 무장한 앱들이 쏟아져 나왔다. 어떤 이슈도 만들지 못하고 소리소문없이 사라졌다. 돈이 되기는커녕, 이 프로젝트가 참여한 사람들에게 최소한의 포트폴리오라도 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정작 시작했던 나조차, 지금은 완전히 다른 일을 해 이력서에 한 줄조차 넣지 않는다. 그렇게 모두가 밤낮 열중해서 진행했던 1년여간의 프로젝트도 어떤 이득을 주지 못한 채 ‘삽질의 추억’으로 남아버렸다.
그 후에는 디자인 에이전시에 입사했다. 수많은 유명 클라이언트를 상대했다. 직접 미팅을 가고, 공장을 뛰어다녔다. 내가 디자인한 제품이 출시되는 기쁨도 맛보았다. ‘스타 디자이너’라는, 단어만으로도 낯부끄러운 꿈도 살짝 꿔보기도 했다. 그런데 몇 년여의 회사생활 끝에 돌연 깨달음이 찾아왔다. “나는 나의 비위를 맞추는 데 젬병이다”라는 결론이었다. 그렇게 지금 나는 ‘일은 일이요, 내 것을 준비하는 게 남는 것이다’라는 지론 아래 카페 한구석에서 열심히 글을 쓴다.
나를 보는 가족들은 무슨 생각을 할까? 내가 먼저 말하기 전에, 내가 그래도 한때 디자이너 꿈나무였다는 것을 알아봐 주는 사람이 있을까? 그렇게 디자이너의 직업보다 글쓰기와 내 가게를 준비하는 게 더 즐겁다는 결론을 지었을 때부터, 나의 대학 생활과 그간 쌓아온 포트폴리오마저 삽질이 되어버린 것 같다.
결국, 기나긴 삽질의 연대기 끝에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가 남았다. 300만 원짜리 카메라는 케케묵어 세 달째 켜보지도 않았다. 한때 몇천 명이 되었던 블로그 이웃은 어디 가고 “블로그를 파세요”라는 광고성 쪽지만 매일 날아온다. 그래도 한때는 IT 스타트업의 작업 프로세스에 빠삭하다고 생각했는데, 최근 ‘피그마’라는 협업 툴의 존재를 알고 화들짝 놀랐다. 결국 나에게 남은 것은 숱한 삽질로 구멍이 뻥뻥 뚫린 밭뿐이고, 함께 삽질을 했던 동료들은 어느덧 꽤나 유명한 프로들이 되어 성큼성큼 걸어나간다.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내가 남았지만
그렇다고, 나의 구멍 송송 뚫린 밭이 아무 쓸모 없느냐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니다. 나의 삽질 이면에는 설렘과 순수함으로 무장한 몰입이 있었다. 그것은 순수한 열정에서 시작된 ‘땅파기 놀이’였다. 그렇게 기쁜 마음으로 파고 파다 단단한 암석을 만나 ‘더 이상 팔 수 없네’라고 느낀 순간, 비로소 땅파기 놀이가 삽질이었다고 인정하는 과정의 연속이었다.
아무런 결과를 얻지 못했고, 하나의 삽질에서 그다음 삽질로 넘어갈 때도 현실적인 요소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다만 오로지 마음이 끌려 땅을 팠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결과물은 없더라도, 저마다 이야기를 간직한 구덩이를 팠다. 아무것도 피어나지 못했지만, 들여다보면 제각기 그때의 추억과 경험으로 무장한 재미난 이야기들이 툭툭 튀어나오는 구덩이들이다.
그리고 나는 삽질을 할 때마다 구덩이에 작은 흔적을 남겨두고 온다. 나는 이걸 ‘씨앗’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씨앗은 깊은 구덩이를 다시 기어 올라와 언제든 싹을 틔운다. 상상도 못 한 시점에. 그리고 그 싹은 무럭무럭 자라, 다시 지금의 나를 만들어간다.
옷이 좋아 시작했던 블로그 삽질의 끝에 ‘글 쓰고 사진 찍는 나’가 태어났다. 디자인을 좋아하고 주말이면 벼룩시장에 나가던 나의 파리 생활 삽질에서 ‘소품 숍을 해보고 싶은 나’가 태어났다. 그러니 삽질을 통해 심어진 씨앗은, 꼭 그 일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더라도, 언제든 싹을 피울 것이다. 그 순간이 언제일지, 어떤 모습으로 피어날지는 아무도 모르더라도.
그렇게 나의 밭은 다양한 종류의 싹이 움을 트고 있다. 형형색색 다양한 삭을 지닌 나의 밭이, 한결같았던 나의 ‘삽질’ 끝에 탄생하리라는 것을 그때는 알았을까.
또, 여기 땅파기
그리고 오늘 나는 또다시 땅파기를 시작했다. 인터넷 여기저기 찾아보며 마우스를 부지런히 움직인다. 해야 할 일을 쭉 적어 내려가기 시작한다. 스스로도 안다. 새로운 씨앗을 던지는 중이라는 걸.
또다시 가게 준비가 멈춘다면, 이 노력이 결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나는 미묘한 후회와 함께 ‘또 삽질했다’라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내 눈에는 예전에 뿌려둔 씨앗이 뿌리를 내려 더 깊게 땅을 파는 모습이 그려질 뿐이다. 마음 한구석에서 몽글몽글 그때의 설렘과 기억이 떠오른다. 그 기억을 수십 번 돌이켜 본다. 다음번 가게를 준비할 때는 이렇게, 저렇게, 요렇게 해보자고.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그렇게 일이 다시 여유로워진 지금, 나는 플래너를 열어 새로운 가게를 준비할 계획을 세운다. 어쩌면 이전보다 더 큰 삽질이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깊게 단단히 뿌리를 내린 나의 싹은, 언제고 반드시 커다란 나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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