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 전 봤을 때와 결혼하고 아이를 낳은 뒤 봤을 때 완전히 다르게 느껴진 작품이 있다. 영화 〈클로저〉와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그랬다. 〈결혼 이야기〉도 10년 전이었다면 지금과 다르게 봤을 테지.
〈레볼루셔너리 로드〉의 배경은 1950년대 중반 미국, 주인공은 부부인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릿)이다. 에이프릴은 결혼 전부터 배우로 성공하는 게 꿈이었는데 소질도 부족하고 애 둘 키우며 살다 보니 몰입해 노력할 환경도 안 된다. 프랭크는 회사원인데 일에 흥미도 보람도 못 느껴 나이 서른에 벌써 지쳐 있다.
너무나 흔해서 뼈 때리는 스토리다. 가정이라는 건 일단 만들고 나면 ‘단순 유지’에 어마어마한 노력이 든다. 집세며 식비며 차 유지비 같은 것들을 위해 죽자고 일하고 살아남아야 한다. 한때의 꿈은 개 풀 뜯어 먹는 소리, 애들 먹이고 입히고 재우고 나면 거울로 자기 얼굴 들여다볼 시간도 없다. 그 와중에도 부부는 각자 외도를 하고, 마치 배우자가 자기 다리를 잡고 도저히 빠져나올 수 없는 늪으로 끌어들인 것처럼 서로를 맹렬히 원망한다.
이건 사람이 아니라 결혼이라는 제도가 가진 한계다. 여기서 살아남는 몇 가지 방법이 있긴 하다. 자기를 배신하든가, 부부가 처한 환경을 완전히 바꾸든가, 자신이 필부필부라는 사실을 정직하게 받아들이고 큰 욕심 없이 작은 것에 만족하고 살든가, 그것도 아니면 이 결혼 생활의 끝에 그래도 뭔가가 있다고 전제하고 마치 종교 생활 하듯이 규율을 지키며 도 닦는 마음으로 사는 것 등등.
프랭크와 에이프릴은 환경을 완전히 바꾸는 방법을 고른다. 이 부부가 사는 안락한 중산층 동네 이름은 ‘레볼루셔너리 로드’. 물론 이름이란 건 ‘존재하지 않지만 희구하는 것’을 반영한다.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레볼루션은 없다. 레볼루션을 이루려면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떠나야만 한다. 에이프릴은 파리로 가자고, 거기서 다시 시작하자고 프랭크를 조른다. 처음에 거부하던 프랭크도 마음이 흔들리고, 부부는 두 아이와 파리로 가기로 결정한다. 이런 결정도, 실은 남은 사랑이 있어서 가능한 거였다. 안정적이고 안락한 현재의 삶을 포기하고 새로운 모험을 시작하더라도, 그 모험의 파트너는 당신이어야만 한다는 사랑.
그런데 그 순간에 에이프릴이 셋째를 임신한다. 계획에 없던 임신은 모험에 제동을 건다. 낯선 곳에서 새 언어를 배우고 일자리를 구하는 데 써야 할 에너지의 대부분을 아기가 가로챌 판이다. 에이프릴은 아이를 지우고서라도 이민을 밀어붙이자고 하지만 프랭크는 다르다. 애초에 모험에 큰 열정이 없었던 데다 때마침 회사에서 일이 잘 풀려 크게 승진할 기회가 생긴다. 아기를 지우지 말고 키워야 한다는 건 그의 대의명분이지만, 사실은 모험을 회피하고 레볼루셔너리 로드에 남으려는 변명에 불과하다. 큰 부부싸움 끝에 일단 에이프릴이 한발 양보하고 현실을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에이프릴은 그러나 프랭크와 타협을 했을지언정 스스로와는 타협하지 않았다. 프랭크가 출근한 뒤 빈 집에서 에이프릴은 혼자 도구를 갖고 낙태를 시도한다. 이미 임신 12주를 훌쩍 넘겼을 때다. 당시 여자들의 입에서 입으로 민간 낙태법이 전해지는데, 이게 임신 12주 전이면 괜찮고 12주를 넘기면 위험하다는 걸 에이프릴도 들었다. 하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다. 죽고 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낙태를 해서 내 몸이 위험에 처하는 게 아니라, 낙태를 안 해서 내 삶이 위험에 처한다는 게 진실이다.
에이프릴이 등장하는 마지막 장면에서 그는 창문 밖으로 조용한 거리,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바라보고 있다. 차분하고 평화로워 보이는 얼굴. 하지만 그의 하얀 치맛자락에는 선홍색 핏자국이 퍼진다. 아래로 핏방울이 똑똑 떨어진다. 에이프릴은 스스로 전화를 걸어 구급차를 부른 뒤 쓰러진다. 그는 병원으로 옮겨지고, 죽는다.
에이프릴과 프랭크 중 삶에 더 열정적인 사람은 누구인가. 꿈을 더 소중하게 생각한 건 누구인가. 마지막까지 희망을 놓지 않은 건 누구인가. 그걸 위해 자기 목숨까지 걸었던 건 누구인가.
낙태가 도덕적으로 아무 문제 없는 행위라는 말을 하려는 게 아니다. 나는 뱃속 아기가 인간의 모습을 갖춘 뒤의 낙태는 살인과 마찬가지라고, 그러니까 사는 게 힘들어서 자식들과 동반 자살하는 부모의 태도와 어떤 면에선 다를 게 없다고도 본다. 그렇지만, 그렇기에 더욱 낙태를 죄로 처벌하는 게 문제라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은 아마도 낙태죄가 사라지면 다들 아무 생각 없이 신나게 섹스하고 어라 임신이네, 합법이니 지워야지, 하고 지우개로 글자 지우듯 아기를 쓱싹 지울 거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사회에 일정 비율로 소시오패스가 존재하는 것처럼. 하지만 대부분은 그렇지 않다. 원치 않는 상황에서, 어쩌면 강요로 임신을 해서, 임신 중 문제가 생겨서, 앞길이 너무나 막막해서, 문자 그대로 자기 살 도려내는 심정으로 낙태를 할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다.
14주 이내 낙태가 합법화될 거라는데, 14주라는 기준이 정말 현실을 반영한다고 생각하는지 의문이다. 나는 둘째 임신·출산 때 한국에 있었는데 임신 6개월째인가 아기가 다운증후군 위험성이 높다고 판정을 받았다. 그래서 이제 뭘 해야 하냐고 병원에 물었더니 ‘다들 알아서 한다’는 답을 들었다. 알아서 뭘 한다는 건지 말은 안 해도 분명했다(이후 두 번째 정밀검사에선 다운증후군이 아니라고 나왔다).
병원에서 열심히 장애아 판별을 하고 겁을 주면서 사실상 낙태를 장려한 뒤 혹시나 문제가 생길 경우 자기 살 도려낸 여성에게 책임을 전가하는 게 현재 한국 시스템이다. 커플 사이 책임의 문제, 먹고 사는 문제, 장애아 키우는 문제 같은 것들은 해결하려면 복잡하니까 일단 눈 딱 감고, 오직 임신해서 낳아서 키워야 하는 여성의 몸에 모든 잘못을 전가하는 게 낙태죄다.
먹고 살기 너무 힘들어 자식과 동반자살하는 부모, 물론 자식한테 못 할 짓 했다. 근데 자식 죽고 혼자 살아난 부모를 살인죄로 처벌하면 그런 일이 일어나게 된 구조가 조금이라도 개선되나. 처벌 말고 무슨 의미가 있나. 지금은 어디 낙태죄가 없어서 암암리에 그 많은 낙태가 행해지나.
정말로 낙태를 줄이고 싶거든, 장애 있는 아이도 큰 걱정 없이 키울 수 있게 지원하고, 여성 혼자 아이 낳아도 잘 키울 수 있게 지원하고, 아이 낳은 뒤에도 여성이 사회생활 계속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고, 아이가 태어나면 커플이 결혼을 했든 안 했든 사이가 어떻든 관계없이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에게 절반의 양육 책임을 확실히 묻는 시스템을 만들면 된다.
원문: 김진경의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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