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에 거주하시는 분들이라면 다들 ‘빨간 버스’를 애용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지하철이 끊긴 늦은 밤에도 서울 각지에서 경기도로 사람들을 실어 날라주는 광역버스는 경기도 생활의 상징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종종 번화가나 오피스타운에서 버스를 탈 때면 놀랄 때가 많습니다. 사람들이 꽤 질서정연하게 줄을 서서 기다리는 모습을 보거든요.
난잡하게 흩어져 있다 서로 밀려드는 시내버스와는 달리 일종의 엄숙함까지 느껴지는 그분들의 모습에 저는 이런 것이 시민의식이란 것을 새삼 느끼곤 했습니다. 다만 그렇게 줄을 선 것이 사람만이 아니라는 게 문제죠. 흔히들 보셨듯이, 버스 정류장에는 항상 긴 테이크아웃 커피 컵의 줄이 바닥 어딘가에서 시작되어 정류장 주위를 맴돌거든요.
그런데 좀 이상하게 생각하신 적 없으십니까? 버스 줄도 그렇게나 잘 서는 시민의식 높은 사람들이, 왜 정류소 인근에 쓰레기를 무단투기하는 걸까요? 사실 거기엔 골치 아픈 사연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길거리 쓰레기통입니다.
한국에서 길거리 쓰레기통이 사라지기 시작한 것은 1995년에 쓰레기 종량제가 시행되면서부터입니다. 종량제 도입 초기, 쓰레기를 돈 내고 버리라는 것에 저항하는 사람들이 생각 이상으로 많았거든요. 쓰레기를 돈을 내고 버리라니 당시 관념으로는 잘 이해가 안 되는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렇게 종량제 봉투 가격을 지불하기 싫어하던 사람들이 찾아낸 대안이 있었으니, 바로 길거리 쓰레기통이었습니다.
종량제 봉투에 들어가야 할 생활 쓰레기가 거리에 비치된 길거리 쓰레기통에 꽉꽉 들어찼고, 이를 담당하던 지자체에서는 처리가 곤란하다는 이유로 쓰레기통을 모두 철거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다행히 지금은 종량제 봉투에 쓰레기를 버리는 것이 무척이나 보편화했지만, 길거리 쓰레기통의 설치는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서초구인데요, 서초구의 경우 2012년에 길거리 쓰레기통을 모두 철거하였습니다. 반면에 강남구의 경우는 972개나 설치해뒀습니다. 그래서 강남대로를 기준으로 한쪽은 길거리에 쓰레기가 넘치고, 다른 쪽은 쓰레기통이 꽉꽉 들어차는 신기한 광경을 볼 수가 있죠. 쓰레기통을 치운다고 쓰레기가 사라지진 않는 셈입니다. 그런데 최근 보건의료 영역에서도 비슷한 일을 벌이는 곳이 생겨 심각한 갈등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2016년 9월, 보건복지부에서는 「의료관계행정처분규칙」의 일부 개정을 예고했습니다. 비도덕적인 진료행위를 한 경우, 해당 의료인에 대한 자격정지를 내리는 것을 구체화하겠다는 겁니다. 진료 중 성범죄를 저지른 경우, 처방전 없이 마약이나 향정신의약품을 제공하는 경우, 변질하거나 유통기한이 지난 의약품을 사용하는 경우 등에 죄질에 따라 다른 수준의 처벌을 내리겠다는 거죠. 무척이나 타당한 개정이라고 생각되는데,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끼어듭니다.
형법 제270조를 위반하여 낙태하게 한 경우: 자격정지 1개월
쓰레기통을 없애버린 것에 이어서, 이제는 그 잘못된 정책을 현장에서 수습하는 환경미화원들도 처벌하겠다는 얘깁니다.
물론 낙태죄는 형법상 범죄가 맞습니다. 법에 따라 처벌을 한다는데 뭐가 문제냐면, 한국에서는 낙태죄가 실질적으로 사문화(死文化)된 법이라는 점입니다. 통계를 볼까요? 2001년부터 2010년까지 약 10년 동안 낙태죄로 입건된 경우는 426건이 전부입니다. 그런데 실제로 추산되는 임신중절 시술의 횟수는 연간 16만 건가량. 법은 있되, 실질적으로 집행되지 않는 법이라는 얘깁니다. 그렇게 실제로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음에도, 구태여 의료인에 대한 처벌 규정을 콕 집어서 새로이 명시한 셈입니다.
당연히 의료계에서는 반발했습니다. 특히나 해당 조항의 당사자라 할 수 있는 산부인과 의사들이 강력하게 반대를 했지만 복지부는 개정안을 그대로 가져갔고, 결국 2018년 8월 17일 개정안을 공표하기에 이릅니다. 저 규칙 그대로 시행하게 된 것이죠.
복지부에서는 ‘기존에도 적발 시에 1개월 자격정지를 해 왔으니 문제가 없다’는 입장만 반복하지만, 뭉뚱그려서 ‘비윤리적 의료행위’로 처벌하다가 새로이 낙태죄를 콕 집어서 ‘마약류 관리 위반’이나 ‘진료 중 성범죄’와 같은 수준의 것들과 함께 명시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되진 않습니다. 이에 대해 직선제 산부인과 의사회는 배수진을 쳤습니다. ‘낙태 수술 전면 거부’를 선언한 것입니다.
혹자는 이렇게 생각하실지도 모릅니다. 요즘 한국의 출생률도 낮은데, 기왕 암암리에 하던 범죄 행위를 이참에 모두 그만두면 출생률이 올라가고 대한민국이 발전할 수도 있지 않을까. 그런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인류가 문자로 스스로의 역사를 기록하기 시작한 이래, 우리는 역사에서 많은 것들을 배워왔거든요. 유럽에도 낙태의 전면 금지를 통해 출생률을 높이려던 정신 나간 독재자가 한 명 있었습니다. 바로 루마니아의 독재자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입니다.
차우셰스쿠는 1966년부터 1989년까지 루마니아에서 낙태를 전면 금지했습니다. 낙태만을 금지한 것이 아니라, 피임까지도 금지를 했습니다. 당연히 인구가 늘고, 행복한 루마니아가 도래했을 것 같지만 실상은 달랐습니다. 그 시기 루마니아에서는 여성 사망률이 폭증했으며, 고아원에 유기되는 아동의 숫자도 대폭 증가했습니다.
산부인과 의사를 통한 낙태가 불가능해지자 불결하고 비전문적인 방식으로 낙태를 시도하다 사망하는 여성이 늘었고, 그런 시도를 하지 않은 여성들도 출산한 자녀를 키울 여력이 되지 않자 고아원에 유기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버려진 아이 중에는 영양실조 등으로 조기에 사망하는 경우가 생길 수밖에 없으니 결국 아동 사망률도 증가한 것이죠. 길거리 쓰레기통이 사라진 버스 정류장에 버려진 테이크아웃 커피 컵들처럼 말입니다.
물론 태아는 길바닥에 굴러다니는 버려진 커피 컵이 아니기에, 낙태가 이런 단순한 비유로서 가볍게 접근할 수 없는 사안임은 자명합니다. 실제로 길거리 쓰레기통을 두고도 쓰레기통을 설치하는 것이 바람직하냐, 쓰레기통을 철거하는 것이 바람직하냐를 두고도 숱한 논쟁이 벌어지니 훨씬 더 복잡한 낙태죄의 경우로 일반화하긴 몹시 어렵겠죠.
그렇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쓰레기통이 없어도 환경미화원은 있어야 한다는 점입니다. 임신 중절을 시행하는 산부인과 의사를 처벌하는 것은 되려 여성들을 더 비위생적이고 위험한 불법 시술소로 몰아넣는 끔찍한 행동이니까요. 루마니아의 실제 사례에서 보듯, 또 한국 각지의 버스 정류장에 쌓인 커피 컵을 보듯 뒤처리를 할 사람은 언제나 필요합니다.
헌법재판소가 낙태죄를 헌법불합치로 판단한 만큼 국회에서 법을 개정할 테니 해당 조항의 존속 여부도 결정이 나겠지만, 복지부의 행정 편의적인 태도가 해당 부처가 표방하는 “국민의 삶의 수준을 높이고 모두를 포용하는 복지를 통해 내 삶을 책임지는 국가”라는 슬로건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닌지 한 번쯤 성찰해보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원문: Coldtongue의 브런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