몰살의 하나님
퀴어 퍼레이드는 멋진 축제였다. 작은 오점이 있긴 했지만 말이다. 바로 반대 시위자들이었다. 기독교, 특히 개신교계를 주축으로 한 반대 시위자들은 설득력 없거나 이미 폐기된지 오래인 근거들을 들고 나와 퍼레이드에 참가한 성소수자들과 그 친구들을 괴롭혔으며, 성소수자들의 자존감(Pride)을 도로 모멸감으로 깎아내리기 위해 힘썼다.
세월호 사태를 두고 많은 개신교계 목사들은 모욕적인 발언을 서슴치 않았다. 한 목사는 “가난한 집 아이들이 수학여행을 경주 불국사로 가면 될 일이지”라고 말했다. 또 어떤 목사는 정몽준 전 서울시장 후보 아들의 ‘국민이 미개’ 발언을 두고 “미개하다는 것까지는 잘 모르겠지만, 하여튼 국민들에게 문제가 있어요. 이래서는 가나안 땅에 못 들어가요. 대한민국 국민들이, 무슨 이런 국민들이 다 있느냐 말이야. 특별히 좌파, 빨갱이, 종북” 이라 발언하였다.
(☞참조 링크: “서울 시민 다 돌았다” 전광훈 목사 8대 망언 모음 / 세월호 희생자 욕보인 목사들의 망동)
비기독교인들은 의아하게 생각할 것이다. 기독교는 사랑의 종교로 불린다. 무조건적인 사랑, 이웃에 대한 사랑을 그 무엇보다도 강조한다. 그런데 왜 이렇게 타인을 혐오하고 멸시하는 것일까? 왜 죽음을 슬퍼하긴커녕 정치적 선전에 이용하는 것일까?
이는 사람들이 기독교를 오해하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사랑만을 이야기하는 종교가 아니다. 성경은 곳곳에서 몰살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그리고 있으며, 기독교 신자들이 이를 본받아 미개한 국민들을 몰살시키려 하는 것 또한 결코 이상한 일이 아니다.
여리고를 몰살시키는 하나님
구약 성서의 ‘여호수아’에 묘사된 여리고 성 전투를 보자.
모세 사후 이스라엘 민족의 지도자가 된 여호수아는 요단강을 건너 하나님이 약속한 땅 가나안을 침략한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에게 성을 일곱 번 돌고 나팔을 불며 함성을 지르면 여리고의 성벽이 무너질 것이라고 약속하였고, 정말로 그렇게 되었다. 이렇게 여리고 성은 망했다. 이스라엘 민족들은 여리고 성 안에 살던 짐승 뿐 아니라, 사람까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여 희생제물로 바쳤다.
여리고 성에 살고 있던 당신. 새로운 땅을 개간해 농작물을 심을 기대에 부풀어 있던 순박한 농부였던 당신은 희생제물로 죽었다. 자애와 지혜로 아이들을 키우던 강건한 어머니였던 당신도 희생제물로 죽었다. 옛날 이야기를 듣는 아이들의 초롱초롱한 눈을 보며 행복해하던 할머니인 당신도 희생제물로 죽었다. 물론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의 아이들도 죽임당해 희생제물로 바쳐졌다. 아, 어제 여리고 성에서 한 남자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을 했던가? 방금 위대한 선지자 여호수아에 의해 산모와 함께 희생제물로 죽었다.
몰살의 하나님은 이처럼 여리고를 ‘왕좌의 게임’에나 나올 법한 헬게이트로 만드셨다. 그러나 자애로우신 하나님이 아무 죄 없는 여리고 사람들을 이렇게 전부 죽이셨을 리 없다. 사실 여리고가 멸망했던 이유는 따로 있다. 이미 이 땅이 우상숭배, 동성애 따위로 더럽혀져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한국이 제 2의 여리고가 되기 전에 신실한 기독교인인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것이다. 제사를 지내는 집들을 모두 습격하여 쑥대밭으로 만들고, 퀴어 퍼레이드에 잠입하여 동성애자들의 목을 전부 치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의 땅을 정화해야만 우리는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하나님의 몰살로부터 안전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이건 대단히 힘든 과업으로,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렇다면 꼼수를 써 보자. 역시 구약 성서의 ‘여호수아’에 따르면, 여호수아는 여리고 성을 침략하기 전에 성에 스파이를 파견했다. 이 스파이들은 한 창녀의 집에서 묵었는데, 이 정보를 알게 된 여리고 왕이 창녀를 추궁했다. 그러자 창녀는 스파이들을 재빨리 집안에 숨긴 뒤 그들이 이미 떠났다고 거짓말을 했다. 이에 스파이들은 창녀에게 창문에 홍색 줄을 매어두고 식구들을 모두 집안에 머무르도록 시켰다. 이 집안의 사람들만은 죽이지 않겠다는 표시였다.
즉 한국이 이미 제 2의 여리고로 타락한 땅이 되었다면, 우리는 다른 방법을 고안해야 한다. 이스라엘 민족들이 한국을 침공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100% 협력하여야 한다. 만일 이스라엘의 스파이가 국내에 침투한다면 우리는 그들의 은신처를 제공해야 하며, 누군가가 스파이를 숨겨두지 않았냐고 추궁한다면 반드시 거짓말을 해야 한다. 이로서 우리는 하나님의 민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한국을 침공하더라도 그 공으로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중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어린아이들이었다면, 당신은 죽었다. 미안하다. 딱히 방법이 없는 것 같다.
이집트를 몰살시키는 하나님
시계를 조금 더 뒤로 돌려보자. 여호수아가 여리고 성을 침략하기 수십 년 전, 그러니까 여호수아보다 한 세대 전의 지도자인 모세가 이집트를 탈출하던 때의 이야기다. 역시 구약성서의 ‘출애굽기’가 그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출애굽기에 따르면, 하나님은 당시 이집트인들에게 노예로 부려지던 이스라엘 민족들을 해방하리라 마음먹으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라는 경고의 표시로 이집트에 아홉 가지의 대재앙을 내리게 된다.
1. 이집트의 모든 물을 피로 만들었다.
2. 개구리가 이집트 땅을 뒤덮었다.
3. 이집트 땅의 모든 먼지가 이로 변했다.
4. 이집트의 모든 집과 땅에 파리가 들끓었다.
5. 이집트 사람의 가축에게만 괴질이 생겨 모두 죽었다.
6. 화덕의 그을음을 이용하여 이집트인과 가축에게 종기를 일으켰다.
7. 이집트에 엄청난 우박을 내리게 했다.
8. 메뚜기가 땅을 뒤덮어 식물을 모두 먹어버렸다.
9. 짙은 어둠이 이집트를 뒤덮어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여덟 번의 재앙에도 끝까지 이스라엘 민족을 해방하지 않던 이집트의 왕이었지만, 결국 아홉 번째의 재앙에는 손을 들고 말았다. 결국 이스라엘 민족을 내보내기로 결정했으나, 하나님은 일을 좀 더 확실히 하기 위해 한 가지 재앙을 더 내리셨다. 이것이 바로 열 번째 재앙, 마지막 재앙이다.
10. 이집트의 모든 장남을 죽였다.
물 대신 피를 마시고, 이와 개구리와 파리가 들끓으며, 괴질과 종기가 창궐하고, 식물이 전멸한 이집트 땅에서도 끝내 살아남았던 당신. 폐허가 된 땅과 막막해진 미래를 바라보면서도 가족을 위해 끝내 살아야 했던, 가족을 부양해야 하기에 끝내 살아야 했던 당신. 미안하다. 당신은 죽었다. 당신이 딱히 무슨 큰 잘못을 했던 건 아니다. 장남이었기 때문이다.
이 죽음을 피하기 위한 방법은 하나다. 장남으로 태어나지 말아라. 이건 기독교에서는 매우 합리적인 해결책이다. 동성애라는 죄악을 피하기 위해서는 동성애자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동성애자로 태어난 이상 당신이 나쁜 놈이다. 장남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로 죽지 않기 위해서는, 장남으로 태어나지 말아야 한다.
전인류를 몰살시키는 하나님
여리고의 몰살과 이집트의 몰살도 스케일에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지만, 역시 이 사건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노아의 대홍수다.
대홍수는 창세기 때의 사건이다.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 차자, 하나님은 세상에서 사람을 쓸어버리기로 한다. 그리고 이왕 쓸어버리는 김에 뭍짐승도 쓸어버리기로 한다. 왜 동물도 쓸어버리기로 한 건지는 성경에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단 한 사람, 노아는 그 시대에도 의로운 사람이었으므로 하나님의 계시를 받게 되었다. 홍수를 일으켜 사람과 (서비스로 동물들도) 몰살시킬 것이므로, 방주를 만들어 가족들과 함께 거기에 들어가라는 것이다. 다만 하나님은 생물학적 종의 다양성을 중시하셨는지 모든 동물들을 한 쌍씩 보낼 것이니 방주에 전부 태우라고 명하셨다. 꽤 큰 방주가 필요할 텐데 어떻게 노아 혼자 그게 가능했을지 모르겠다.
어쨌든 노아가 육백 살 때 대홍수가 일어났고 인류는 멸망했다.
창세기는 그 기록이 매우 빈약하기 때문에, 당신이 대홍수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힌트를 얻기가 쉽지 않다. 당신이 노아가 되면 되겠지만 그 넓은 세상에서 단 한 명 뿐인 의로운 사람으로 바로 당신이 꼽힌다는 건 일베에서 심청이가 나올 확률보다 낮을 테니 배제하기로 한다.
다만 이 대홍수를 소재로 한 다양한 예술 작품들을 통해 실마리를 잡을 수는 있을 것 같다. 성경에서의 묘사와 같이 노아가 아무도 더 구하려 하지 않고 딱 자기 가족만 방주에 태웠다면,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의로움인 것이다. 쓸데없는 오지랖 말고 내 몸만 건사하는 것이 바로 성경에서 말하는 의로움임에 틀림없다. 대한민국의 위대한 지도자들과 또한 큰 교회를 일으켜세운 성스러운 목사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말이다. 그렇다면 당신도 당신만 알고 살면 된다. 언제 하나님의 큰 은혜가 내려올지 모른다.
반대로 노아가 현대의 도덕을 기준으로 생각할 때 정말 의로운 사람이었다면, 혼자 살아남으려 했을 리가 없다. 주위 사람들을 설득해 방주에 태우려 했을 것이다. 물론 미친 소리처럼 들릴 것이다. ‘세계가 멸망할테니 이 방주에 타라’니. 그러니까 결국 성경에서도 노아의 가족 외에 아무도 노아의 방주를 타지 않은 것일테고.
그러니 당신은 대홍수 때 사람들의 어리석음을 답습해서는 안 된다. 누군가가 갑자기 찾아와 세계가 멸망할 것이며 내가 만든 방주 ‘글라도스’에 탑승하면 살 수 있다고 설득한다면,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방주에 타야 한다. 그게 성경이 말하는 몰살의 하나님으로부터 용서를 받는 길이니.
뭐, 때로는 진짜 사이비 교주도 있겠지. 아마 이쪽이 훨씬 많을 거다. 뭐 재수 없어서 사이비 종교에 걸린다면, 아마 9시 뉴스를 타게 될 것이다. 사이비 종교에 심취한 교인들, 집단 자살 정도의 타이틀이 걸릴 것이고. 그럼 대체 이게 사이비 종교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당신도 하나님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면 구분할 수 있겠지. 행운을 빈다.
원문: 임예인의 새벽 내리는 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