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을 시작하기에 앞서 필자의 의견은 과학계를 대변하는 것이 아니며, 10여 년간 창조론자들과 게시판에서 설전을 벌였던 경험과 그간 출판되었던 종교와 과학에 기반한 개인적인 의견임을 미리 밝혀둔다. “나도 과학자지만 그렇게 생각 안 하는데?”라고 하실 분들을 위해서.
창조(과?)학 vs 진화과학
교과서에서 진화론과 창조론을 같이 다루어야 한다(혹은 진화론을 삭제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교과서진화론개정추진회(이하 교진추) 사태로 우리나라가 네이처(2012년 6월 5일자, “South Korea surrenders to creationist demands”)에 보도되는 영광을 누린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이번엔 미래창조과학기술부라는 부처가 새로 만들어질 참이다. 동명이인이겠지… 하는 마음으로 지켜보는 중이다.
식당에서 간혹 교진추 관련 뉴스를 소재로 손님들이 나누는 이야기를 들어보면 창조론과 진화론이 ‘논쟁’을 벌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분들도 적지 않은 것 같다. 실제로 작년에 갤럽이 서울 시민 613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바에 따르면 45%는 진화론을, 32%는 창조론을 믿는다고 답했다고 한다. 이런 상황에 교과서 개정을 하자고 덤벼대니 그동안 무시로 일관하던 과학계도 맞서 싸울 수밖에 없었고, 다행히 얼마 전에 교진추의 세 번째 개정청원도 기각되어 현재까지는 선방하는 중이다.
많은 분들이 진화론 vs 창조론의 논쟁을 보면서 과학과 종교가 생물학적 진화를 놓고 싸운다고 생각하시겠지만, 교진추나 창조론자들의 주장은 사실상 순수과학 전반을 무대로 삼고 있기에 지금부터는 창조과학으로 부르도록 하자.
종교와 과학의 차이: ‘왜?’와 ‘어떻게?’
왜 이렇게 치열하게 공방을 벌이(는 것처럼 보이)냐는 의문이 들 수도 있을 텐데, 근본적인 원인은 창조과학의 바탕이 과학이 아니라 종교적 믿음이기 때문이다. 일단 종교와 과학의 차이점부터 짚고 넘어가자.
종교와 과학의 가장 근본적인 차이라면 종교는 ‘왜 Why?’를, 과학은 ‘어떻게 How?’를 다룬다는 점이다. 물론 근대 이전, 과학이 자연철학을 포함하던 시기에는 그러했지만, 현대 과학은 목적이 아닌 원리를 밝혀내는 학문이다. 뒤에 다시 살펴보겠지만, 보통은 종교의 관심거리와 과학의 관심거리는 서로 겹치지 않는다. 쿨하게 서로 신경 쓰지 않으면 해피할 텐데.
과학적 이론은 일반적으로 유사한 현상들을 관찰하고 거기서 발견한 규칙을 토대로 가설을 세우는 것으로 시작한다. 가설에 기반해서 지금껏 알려지지 않은 어떤 현상을 예측하는데 그것이 맞아 떨어지면 이론으로 인정을 받는다. (물론 안 맞으면 즉시 폐기당한다.) 여기서 주의할 점은 지금 맞는 이론이라고 해서 앞으로 발견될 현상에 대해서도 맞을 거라는 보장은 없다는 점이다. 과학자들은 지금의 이론에 반하는 증거가 나타나면 이론보다 현상을 우선하라고 배운다.
엄격하게 말하면 과학의 모든 이론은 지금까지의 최선이며 잠정적이다. 이런 측면에서 ‘창조’라는 가설은 그것을 기반으로 어떤 예측도 내놓지 않았기에 폐기당하지 않은 사실상 불필요한 가설이라는 것이 필자의 생각이다. 마치 출전하지 않은 장수가 불패의 장수로 대접받는 상황이 지금의 현실인 셈이다.
창조론자와 과학자의 다른 접근법
생명체의 진화 이론은 ‘생명체가 어떻게 세대를 거치며 변화해 나가는지’에 대한 과학적 설명이다. 과학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왜’와 ‘어떻게’의 차이점이 불분명하게 보일 수 있겠다. ‘왜’는 목적이 있다는 것에 기반한 질문이고, ‘어떻게’는 방법을 묻는 것이다. 과학적으로는 전자를 ‘증명’할 방법이 없고, 관심의 대상 또한 아니다. (목적이나 의도를 직접적으로 입증할 방법이 있다면 법정에서 진범이 무죄로 풀려나는 일도 없을 거다.) 간단한 예를 통해 둘의 차이점을 살펴보자.
어린이: 지구는 누가 만들었어요?
과학자: 나도 모르지.
창조론자: 전지전능한 어떤 분이 만드셨단다.어린이: 지구는 어떻게 만들어졌어요?
창조론자: 창세기에 보면…
과학자: 우주에 흩어진 물질이 중력에 의해 모여서 한 덩어리가 되고…
“왜 우주의 운동을 설명하는 데에 신을 언급하지 않는가?”라는 나폴레옹의 질문에 유명한 수학자이자 과학자인 라플라스가 “이것을 설명하는 데에는 신이 필요하지 않습니다.”라고 한 것에도 그런 관점이 묻어있다. 과학자가 얘기할 수 있는 건 사실 여기까지다. 목소리를 크게 내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창조과학이 체계를 가진 학문이라면 그것이 커버하는 범위 내에서는 지금까지 던져진 질문에 대해 만족할 만한 답을 내놓아야 한다. 물리학의 영역에서라면 빅뱅(창세기에 나오는 “빛이 있으라”는 구절이 빅뱅이라고 말하기도 한다)이나 인플레이션, 천체의 움직임을, 생물학에서라면 바이러스의 복제 과정이나 AIDS의 기작에 대해서든 최소한 설명은 제시해야 한다는 뜻이다.
창조과학자들의 ‘어떻게’에 대한 조악한 논리
필자는 아직까지 이런 문제에 대해서 창조론자들이 제시한 창조과학의 범위나 대안을 본 적이 없다. 법칙까지 바라지 않을 테니 사소한 공식이라도 만들어 놓은 걸 보신 분이 있는지 모르겠다. (있으면 제보 좀.)
조금 양보해서 그들이 자주 언급하는 우주의 시작, 생명의 탄생, 대멸종 같은 분야로 한정하면 어떨까. 필자가 지금까지 본 창조론 관련 문건 및 논문(인지 곰국인지)들은 진화론 혹은 기존 과학의 증거에 반박하거나, 연구방법론에 개별적인 사례로 끊임없이 이의를 제기하는 게릴라전법이었다. 그나마도 대부분 여러 논문을 짜깁기한 리뷰 페이퍼 형식인데, 원문의 내용과 상반된 주장을 하는 경우가 자주 있다.
존재하지 않는 참고문헌을 다는 정도는 애교로 봐주자. 사실 그 정도로 많은 사례가 있다면 그것을 종합해서 보편적인 원리나 이론을 세울 수 있어야 하는 것 아닌가? 일단 대안이 될 이론이라고 하려면 그동안 있었던 모든 현상을 잘 설명해야 하고, 아무도 몰랐던 설명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을 상기하자. 심지어 많은 사람들이 심리학 하면 바로 떠올리는 프로이트조차도 자신의 이론이 예측이 아닌 사후분석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창조과학의 주장 중에도 ‘격변적 판구조론’처럼 꽤 재미난 아이디어도 있는데, 교진추에 올라온글(링크)을 잠시 살펴보자.
바움가드너의 모델은 냉각된 대양저의 결정화된 암석판(crystal slabs)의 열적 탈주 섭입(thermal runaway subduction)이 비교적 멀지 않은 과거인 대격변기간에(약 5,000여 년 전) 발생하였기 때문에, 그 암석판(slabs)들은 그 주변의 맨틀로 완전히 동화되는 데에 충분한 시간을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그래서 맨틀 핵심부 경계 위쪽에 암석판(slabs)들의 증거는 오늘날까지도 발견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정말로, 그러한 동화되지 않아 상대적으로 차가운 암석판들의 증거는 지진파 연구에 의해서 발견되고 있다.
이 모델은 또한 대격변의 후퇴 메커니즘도 제공하고 있다. 시편 104:6-7 말씀은 산 위에까지 와 머물렀던 물이 물러가는 모양을 묘사하고 있다. 8절은 이렇게 번역되고 있다. “(…) 산은 오르고 골짜기는 내려갔나이다. (…)” 이 구절은 대격변이 끝날 때에 즈음하여 활발한 판상 지각운동의 주도적인 힘은 땅의 수직운동이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이것은 확장 기간에 대륙 지판의 주도적인 힘이 수평운동이었던 것과 대조된다.
격변적 판구조론 자체는 과학적 아이디어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아래 단락을 보면 이 모델이 메커니즘을 제공하는 게 아니라 성경이 설명을 제공하고 있다. 게다가 한 술 더 떠서 그 구절이 사실을 묘사하는 것으로 기정사실화 해버린다. 이런 주장들을 많이 모아놓으면 하나의 학문이 되고 교과서를 쓸 수 있을까?
창조론자들의 윽박 “니들이 틀렸을 수도 있잖아?”
창조론, 진화론, 우주론은 모두 어떤 질문에 답하기 위해 만들어진 지식 체계다. 과학적 이론들은 사람들이 던진 많은 질문에 답을 주었고, 여전히 많은 부분은 답을 모르고 있다. 과학이 제공했던 답은 적어도 지금까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들과 잘 들어맞는 최선이며, 한편으로는 단 하나의 반례만으로도 폐기될 수 있다.
창조론자들은 과학이 답하지 못한 부분의 답이 창조라고 하면서도 실제로는 기존의 과학이 ‘틀렸을 수도’ 있다는 말만 반복하고 있다. A의 진술이 틀렸다는 것과 B의 진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해주는 건 아닌데 말이다.
초기의 창조론은 다윈의 연구 내용에 대한 반박으로 시작되었지만, 지구과학, 물리학의 발전과 더불어 ‘창조과학’으로 내용이 ‘진화’하고 있다는 것은 참 재미있는 현상이다. 도대체 과학이 그렇게 못 믿을 거라면 왜 그리 창조’과학’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싶어하는 걸까. 논리적이고 멋있어서? 아니면 사람들이 과학에 보내는 신뢰가 부러워서? 어쨌건 과학자들이 창조과학을 싫어하는 이유는 바로 제값도 못하면서 (적절한 설명을 못하는) 지금까지 과학이 쌓아온 신뢰에 무임승차하려는 것 때문이다.
까는 김에 좀 더 까자면, 도킨스옹을 비롯한 무신론자 일파도 무리한 주장을 한다는 점에선 마찬가지다. “신은 없다”는 주장을 입증하는 건 일종의 부재증명인데,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볼 때는 도킨스옹이나 창조론자나 논리적으로는 이길 수 없는 싸움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굳이 현재 상황을 따지자면 도킨스옹이 공격적으로 보이긴 해도 사실 과학자 측의 수비전에 가깝다.
결론은 종교든 과학이든 할 수 있는 말만 하고, 그 외의 것들에 대해서는 좀 아니꼬워도 쿨하게 넘어가자는 거다. 물론 지금은 종교 측에서 오버해서 과학 영역으로 넘어온 거니까 발 좀 빼시고.
결론: 타협점은 존재한다.
최근에 본 어떤 창조과학의 진화론에 대한 입장 끝판왕을 소개하며 글을 마친다. 개인적으론 가장 적절한 타협안이 아닌가 싶다.
“진화하도록 창조하셨다.”
아… 그래서 왜 대한민국에 창조과학이 필요하냐고? 아래 짤방을 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