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⑤ ‘제국주의적 지배’와 ‘경제 성장’의 공존」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열아홉 번째, 1945년 해방 국면의 재해석-국가 만들기와 체제 선택
1.
이 부분도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이다. 아주 흥미로웠다. 1945년 해방~1950년대 기간의 역사적 중요성을 두 가지로 꼽는다. 이 두 가지에 대해서 하나씩 알아보자.
- ① 국가 만들기(State-building)
- ② 체제 선택
① ‘국가 만들기’의 관점에서, 일제 식민지 시기와 구분되는 대한민국 건국의 가장 중요한 의미는 무엇일까?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고, 인민의 대표가 정부를 구성하고,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게 된 것이다. 조선인과 구분되는 한국인들은, 단군 이래 처음으로 자신의 대표를 직접 선출하게 됐다. 즉,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며,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다”는 인민주권을 정치체제의 근간으로 채택했다.
1948년을 기준으로 한일합방이 되기 전 불과 50년 전만 하더라도 양반은 노비를 아무 이유 없이 죽이고 두들겨 패도 무방했다. 노비와 양반은 신분이 다르고, (심지어)피가 다른 것으로 간주됐다. 그런데, 불과 50년 만에 노비도 1표, 양반도 1표를 행사하고 남성도 1표, 여성도 1표를 행사하는 근대적인 민주공화국이 만들어졌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 아닐 수 없다.
2.
조선이 식민지가 된 것은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사적 변화가 중국, 일본을 거쳐 조선에 상륙했기 때문이다. 영국에서 시작된 세계사적 사건은 4가지였다.
- 시민혁명(의회제)
- 산업혁명
- 제국주의
- 보통선거권
의회제와 보통선거권은 모두 근대 민주주의의 요소들이다. 그러나 둘은 그 성격을 달리한다. 의회제는 왕과 구분되는 귀족·엘리트의 정치 참여를 의미한다. 의회제는 왕과 엘리트의 타협체제이다. 반면, 보통선거권은 엘리트와 대중의 타협체제이다. 의회제는 귀족·부르주아가 쟁취했지만, 보통선거권은 노동계급이 쟁취한 것이다.
일본은 1868년 메이지유신을 단행하고 구체제를 타파한다. 폐번치현, 토지개혁, 폐도령 등이 대표적이다. 1889년 메이지헌법 제정을 통해 의회를 신설하고 제한적으로 투표권을 허용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근대를 일찍 수용한 일본조차, 보통선거권의 실현은 ‘외세-점령군’이었던 맥아더에 의해서 실현된다.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을 식민지화하며 ‘근대 일부’를 조선에 이식시킨다.
- 화폐 금융 제도 정비
- 재정제도 정비
- 토지조사사업 실시
- 민법, 상법 등 경제 관련 법령
- 철도, 도로, 항만, 전기,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투자
- 초등학교 취학률 증가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가 조선에게 절대로 용납하지 않았던 것은 인민주권이다. 조선인들이 자신의 대표를 선출하고, 자신의 대표로 정부를 구성하고, 과세에 대한 동의권을 행사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일본 제국주의가 전(前)근대 조선에 비하면 진일보한 체제였지만, 일본이 조선에 이식시킨 것은 ‘반(半)근대’로 봐야 하는 이유이다.
근대의 본질을 ‘개인의 탄생’으로 본다면, 그 핵심은 신체의 자유와 재산권 보호이다. 국가가 개인의 신체와 재산을 함부로 약탈하지 못하는 것이 전(前)근대와 구분되는 근대의 핵심이다.
그러나 제국주의·식민지 관계에서 조선인들에게 ‘개인의 탄생=개인의 권리’가 온전히 실현될 리 없었다. 1948년 정부 수립을 통해, 조선 시대와도 구분되고 일제 시대와도 구분되는 ‘인민주권이 실현되는’ 대한민국이 만들어졌다.
3.
② ‘체제 선택’의 관점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농지개혁과 귀속재산의 처리 방법론이었다. 핵심은 둘 다 국유화를 할 것인지, 사유화를 할 것인지였다.
먼저 농지개혁을 살펴보면, 미 군정이 주도하던 남한은 유상몰수, 유상분배를 했다. 북한은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했다. 얼핏 보면 북한이 더 좋은 것으로 생각될 수 있다.
그러나 결코(!) 그렇지 않다. 북한에게 무상몰수는 국가 소유를 의미했다. 북한에서 무상분배는 (소유권의 이전이 아니라) 경작권의 배분이었다. 북한 농민들에게는 농지에 대한 처분권, 상속권이 허용되지 않았다. 즉, ‘농민들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 소유’였다. 말로는 ‘전(全) 인민적 소유’라고 하지만, 사실상 모든 농지는 김일성의 소유였다.
북한의 농지개혁은 지주에게 제공하던 수확물을 ‘국가=김일성’에게 제공하는 것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 이는 너무 당연하게도 인센티브의 왜곡으로 인해 근로 의욕을 떨어뜨리게 된다. 개혁개방 이전의 중국 공산당이 그랬듯, 북한의 농업 생산성이 낮은 이유는 국가사회 주의적 소유가 갖는 구조적 비효율성 때문이다.
남한은 농민들에게 3헥타르(3정보)를 줬다. 농지 면적은 각각 300미터 × 300미터 크기다. 남한의 농지개혁은 소유권의 이전을 의미한다. 소유권의 이전이란 처분권, 상속권이 농민에게 귀속됐음을 의미한다.
결국, 북한에서는 ‘무상몰수, 무상분배’가 이뤄졌고, 대한민국에서 ‘유상몰수, 유상분배’가 이뤄졌다는 표현은 양자가 갖는 질적이고 근본적인 차이점을 드러내지 못한다.
양자의 근본 차이를 드러내기 위해서는 소유권을 인수 분해할 필요가 있다. 소유권을 인수 분해하면 경작권·수확 배분권·처분권·상속권으로 나눌 수 있다. 북한 농민에게 배부된 것은 경작권과 수확 배분권 일부이다. 수확물의 일부는 북한 정권에 내야 했다. 처분권과 상속권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것이 되었다.
반면 남한 농민의 경우 경작권, 수확 배분권, 처분권, 상속권이 모두 넘어갔다. 이승만과 미군정이 따로 챙긴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4.
농지개혁의 효과를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 사회통합 효과. 이게 가장 중요했다. 공산화를 막고, 반공(反共)의 물질적 토대가 됐다.
- 초등학교 취학률이 오르게 된다. 인적개발에 도움이 됐다. 초등학교 취학률은 1945년(51%) → 1960년(97.5%)로 확대된다. 1960년이 되면, 국민 대부분이 초등학교에 입학하게 된다.
- 대(大)지주의 반대가 사라져서 공업화에 유리한 환경이 조성된다. 대지주의 반대 여부는 동북아시아는 경제성장에 성공하고, 동남아시아는 경제성장에 실패하는 분기점이 된다.
- 1950년대 후반~1960년대 초반, 농업 생산성 증대로 연결된다. 이는 김재호 교수 책에는 없고, 홍춘욱 박사의 『돈의 역사』에 잘 나와 있다.
위의 [그림1]은 1954년 이후 국내총생산(=성장율)과 농림어업 성장률을 보여준다. 보면 농지개혁으로 인해 1950년대 후반부터 전체 경제성장율을 상회하는 농림어업 분야의 성장율을 확인할 수 있다. 그간 한국의 산업화는 1960년대 중반 이후, 수출-중화학공업의 역할만 강조된 측면이 있다.
농지개혁은 농업 분야 생산성 향상을 통해 경제성장을 자극하게 된다. (‘1978년 개혁개방 이후’의 중국도 농업 생산성 향상이 매우 중요하게 작용한다.) 결국, 농지개혁이 산업화에 긍정적으로 작용하는 메커니즘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농지개혁 → 세계에서 가장 평등한, ‘소농(小農)의 나라’에서 시작됨 → 농민들의 인센티브 강화 → 농업 생산성 향상 → ‘더 적은’ 노동력으로 농산물 생산 가능(=농가 소득 상승) → 농촌 과잉인구 발생 → 농촌 과잉인구, 도시로 이동 → 도시 과잉인구 발생 (+도시화 촉진) → ‘더 낮은 인건비’로, 노동집약적 산업, 공업화 용이(=루이스 곡선) → 농가 소득 상승 + 산업화 발달의 경로
미군정이 관리하던 귀속재산의 규모가 놀라운 수준이었다. 당시 돈으로 3천억 원이었다. 대부분 일본인들의 재산이었다. 1948년 당시 정부 세출의 9배에 달하는 금액이었다. 3천억 원 중 71%가 기업체(사업체)였다.
정부 세출의 9배를 근거로 3천억 원의 ‘현재 가치’를 추산해보자. 대한민국의 2020년 예산안은 513조원니까 9배를 하면 현재가치로 약 4,617조 원이다. 513조원×9배=4,617조 원. 어마어마한 규모가 아닐 수 없다. 정부 예산의 4.5배를 적용해도 현재 가치는 2,308조 원 규모이다. 이래저래 어마어마한 규모다.
한일 청구권 협정을 협상하는 과정에서 일본은 한국에 두고 온 일본인 재산을 논거로 제시하며 청구권 비용에 대해 소극적이었다. 귀속재산의 규모로 볼 때 일본 주장을 ‘완전 억지’였다고 단정하긴 어려워 보인다.
1950년대 주요 대기업 89개사 중에서 36개사(40%)가 귀속 기업이었다. 특히 면방직의 경우는 16개 사 중에서 12개사였고, 금속공업&기계공업은 10개사 중에서 8개사가 <귀속 기업>이었다. 산업에서 막중한 비중을 차지했다. (p.266~p.268)
1965년 한일협정으로 일본에게 3억-2억-3억 달러를 받았다. 무상원조 3억 달러, 공공차관 2억 달러, 상업차관 3억 달러이다. 그런데 실제로는 귀속 재산의 규모 역시 간접적인 방식으로 보상받은 것으로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지금 돈으로 환산해도, 최소한 수천조 원 수준의 규모였다.
5.
스무 번째, 제3세계 공업화의 2가지 방법 – 수입대체 노선 VS. 수출중심 노선에 관한 부분이다. 제3세계 국가에서 매우 첨예한 이슈였다. 남미와 동남아 등, 식민지 경험이 있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수입대체 노선이 압도적 흐름이었다. 한국도 예외가 아니었다.
수입 대체 노선은 선진국(외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소비재와 공업제품을 ‘국산화’로 대체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기술과 시장을 외부세력(수출시장)에 의존하지 않고, 자국의 자본, 자국의 기술, 자국의 노동력을 활용해서 경제적 자립을 이뤄야 한다고 봤다.
당시 식민지 경험이 있던 나라들에서 수입대체 노선이 압도적 다수가 된 이유는 개방=무역=교역을 하게 될 경우 외세(外勢)의 영향력이 강해질 것으로 봤기 때문이다. 이는 20세기 전반부에 ‘제국주의/식민지 경험’으로 인한, 역편향이었다. 요컨대, 수입대체 노선의 본질은 경제발전 버전의, 폐쇄적 민족주의였다.
한국의 경우 재야-민주화-진보 세력이 ‘수입 대체 공업화 노선’을 주장했다. 박정희와 관료들은 ‘수출 중심 공업화 노선’을 추진했다. 당시 제3세계에서 수출 중심 공업화 노선은 소수파였다. 한국과 대만이 수출중심 공업화 노선을 추진하는 나라였다.
수입대체 노선 VS. 수출중심 공업화 노선을 둘러싼 경제발전 논쟁은 1980년대가 되면서 완전히 종료된다. 왜냐하면, 한국과 대만의 경제적 성공이 워낙 압도적이었기 때문이다.
[그림2]는 1975~2005년 동남아·중남미·중국·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GDP의 변화를 보여준다. KDI 연구진과 하버드대학 교수들과 공동 작업한 『기적에서 성숙으로』에 나오는 그래프이다.
1975년 기준으로 한국의 1인당 GDP는 동남아시아 국가보다 조금 높고, 중남미보다 작았다. 그러나 2005년 기준, 한국은 동남아와 중남미에 비해 ‘압도적으로’ 높다. 수출중심 공업화 노선의 승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등소평은 1978년 개혁개방을 시작한 이후 일본-한국-대만 모델을 모방하여 수출-제조업-외자유치를 적극 추진한다. 1978년 이후, 중국의 등소평은 박정희 모델=수출중심 공업화 모델을 모방한 대표적인 경우이다.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의 마지막 챕터에서는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의 문제점이 잘 정리되어 있다. 수입대체 공업화 전략의 최대 문제점은, 실제로는 수입대체도 안되고 공업화도 실패하게 된다는 것이다. 재미있는 정리이다. 왜 그럴까?
- 국내시장이 매우 좁기에, 국내시장 사이즈만큼만 생산이 확대된다. 생산역량이 더 확대되지 않는다.
- 소비재만 공업화가 된다. 공업화에 필요한 부품-소재-기계의 공업화는 실현되지 않는다. 역시 ‘시장’이 없기 때문이다.
- 중화학공업에 필요한 부품의 국산화는 제대로 되지 않기 때문에, ‘수입대체’라는 이름과 달리 실제로는 기계나 소재를 계속 수입에 의존하게 된다.
메커니즘을 정리해보면 ①좁은(국내)시장 → ②소비재‘만’ 공업화 → ③중화학공업, 부품 국산화 실패 → ④부품-소재-기계의 수입 의존에 갇히게 된다. 근본적으로 국내시장의 규모가 작기 때문에 발생하는 문제이다. 반면 수출 중심 공업화 전략의 장점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 최대 장점은 국제시장을 대상으로 하기에, [큰 시장]이 존재한다는 점이다.
- 글로벌 시장을 대상으로 하기에 [규모의 경제]가 작동하고, [분업화/전문화]가 가능해진다.
- 국제시장에서 판매에 성공하려면 생산의 효율성을 극대화해야만 한다. 큰 시장은 더 치열한 경쟁을 의미하게 된다. [시장 규율]에 의해, 더 강하게 효율성 압박을 받게 된다. 자본과 정치가 결탁하는 [부패 방지] 효과도 더 강력하다.
- 국제적 비교우위가 유리한 ‘노동집약적’ 경공업 분야가 우선 공업화된다. [고용 효과]를 창출하는 것이다.
- 노동집약적 공업화로 인해 농촌의 과잉 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하게 된다. (*농촌의 과잉노동력이 발생하려면 토지 개혁으로 인한 농업 생산성 향상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수출중심 공업화 노선을 했던 한국과 대만의 공통점은 모두 미국의 주도하에 토지 개혁을 했다는 점이다.) [도시화]
- 농촌의 과잉노동력이 도시로 이동하기 때문에, 1인당 [농가 소득]이 향상된다.
- 농가 소득 향상은 ‘농촌의 구매력’으로 작동되어, 소비재 산업 발전을 돕게 된다. [내수 시장 확대]
수출중심 공업화 노선의 메커니즘을 정리해보면 경로가 이렇게 된다.
①(글로벌) 큰 시장 → ②규모의경제=전문화=분업화 가능 → ③시장규율, 효율성 압박 → ④노동집약적 고용 효과 → ⑤도시화 확산 → ⑥농가 소득 향상 → ⑦내수시장 확대
수입 대체 노선과 수출 중심 노선의 성패를 갈랐던 핵심은 결국 시장의 크기였다. 시장의 크기는 강력한 부수 효과들을 낳게 된다. 이중에서 특히 중요한 것은 규모의 경제·전문화 = 분업화·시장규율의 작동으로 인한 효율성 압박, 부패방지 효과, 도시화 확산 효과이다.
6.
스물한 번째, 경제사상사와 연계하여 ‘경제성장의 5가지 방법’을 정리할 수 있다. 차명수 교수의 『기아와 기적의 기원』과 김재호 교수의 『대체로 무해한 한국사』에 언급되는 것은 3가지이다. 스미스적 성장, 솔로우적 성장, 슘페터적 성장.
2명을 더 추가할 필요가 있다. 폴 로머와 맨슈어 올슨이다. 폴 로머는 지식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맨슈어 올슨은 이익집단(=지대=Rent=암묵적 재분배)의 위험성을 경고했다.
- 스미스적 성장 (=시장=분업=전문화)
- 솔로우적 성장 (=자본 축적)
- 슘페터적 성장 (=창조적 파괴, 자원결합의 유연성)
- 로머적 성장 (=지식, R&D)
- 올슨적 성장 (=이익집단의 지대[Rent])
- 농업경제에 가까운 저(低)소득 국가 → 자본주의적 산업화에 기반한 중(中)소득 국가로 이행할 때는 ①스미스적 성장 ②솔로우적 성장이 중요하다. 대규모 시장(=수출 등), 도시화, 최초의 자본 유치가 중요하다.
- 중(中)소득 국가 → 고(高)소득 국가로 이행할 때 중요한 것은 ③슘페터적 성장 ④로머적 성장 ⑤올슨적 성장이 중요해진다.
- 슘페터적 성장이 이뤄지기 위해서는 요소 자원의 ‘자유로운 결합’이 중요하다. 자유주의적 경제구조와 규제개혁이다. 환경변화에 맞는 역동성 자체가 가장 중요하다.
- 로머적 성장에서는 R&D 투자와 고등교육의 혁신 시스템이 중요하다. 경제성장의 본질 중 하나는 ‘외부효과’와 그로 인한 ‘되먹음 효과’인데, 핵심은 지식이다.
- 올슨적 성장에서는 기득권의 지대(rent)를 개혁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올슨적 성장은 슘페터적 성장과 로머적 성장을 ‘돕기 위한’ 정치경제학의 영역이다.
칼 마르크스의 표현을 빌리면 ‘낡은 생산관계가 새로운 생산력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에 대한 정치경제학적 계급투쟁’을 의미하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올슨적 성장은 동시에 ‘마르크스적 성장’이기도 하다.
올슨적(=마르크스적) 성장이 중요한 이유는 경제 환경이 A국면에서 B국면으로 이동할 때, 생산방법 역시 유연하고 기동적으로 A제도에서 B제도로 이행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이를 가로막는 것은 ‘기존 체제의 강자집단들’이다.
기존체제 강자집단은 보수에도 있고, 진보에도 있다. 생산/성장의 문제가 정치경제학의 영역으로 넘어오게 되는 이유이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