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④ ‘대분기의 세계사’ 조선을 몰락시키다」에서 이어지는 글입니다.
열일곱 번째, 쌀 이출(수출)의 증가와 지주-소작제의 발달
1910년 한일병합 이후, 조선총독부의 농업정책은 ‘조선’의 쌀 생산을 늘려서 ‘일본 본토’에 쌀을 풍부하게 공급하는 것이었다. 그 이유는 1880년대 말 일본에서 산업혁명이 본격화되고,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이후, 쌀 수요가 급증했기 때문이다. 일본의 쌀 생산만으로는 감당이 안 됐다. 실제로 ‘쌀 폭동’이 일어나기도 했다.
1920년대 조선총독부가 추진한 ‘산미증식계획’은 이런 문제의식에서 추진된다. 저수지, 수로와 같은 관개시설을 대폭 확충한다. 실제로 수리조합과 관개 답은 크게 증가한다. 흥미로운 점은 일반 지주와 농민들 역시 농업 투자에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점이다. 일반 지주와 농민들은 왜 ‘농업 투자’에 적극적이었을까? 일본에 대한 이출(수출) 증가와 쌀 가격 상승으로 인해 농업투자에 대한 기대수익률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해 ‘소유권’이 명확해졌고,
- 소유권이 분명해져 토지의 매매 및 거래가 쉬워졌고,
- 토지를 담보로 대출하는 금융이 용이해졌고,
- 조선 말기와 달리 지방관리들의 ‘자의적인 약탈’이 줄어든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경제학 용어로 보면, ‘거래비용’이 확 줄어들고 ‘인센티브’가 강화됐다.
조선을 포함한 엔 통화권의 경우 ‘이출’로 표현하고, 엔 통화권 바깥은 ‘수출’로 표현했는데, 1916–1920년에는 생산량의 15.7%가 이출됐고, 1931–1935년에는 무려 49.3%가 이출됐다. 생산량의 절반이 일본으로 이출된 것이다(249–250쪽). 쌀 이출을 주도한 집단은 조선인, 지주들이었다. 이출 증가와 쌀 가격 상승은 지주의 수익을 늘려줬다. 1930년–1933년 1년 동안의 ‘평균 분배’ 현황을 보면,
- 지주는 62.3석 취득
- 자작농은 5.4석 취득
- 소작농은 2.2석 취득
지주는 자작농의 약 12배, 소작농의 약 28배를 취득했다(251쪽). 지주-소작제가 없었다면, 자작농 및 소작농 농민들은 ‘자급용 쌀소비’를 했을 것이다. 그러나 지주 입장에서는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일본으로 이출을 극대화하는 것이 ‘수익 극대화’ 원리에 부합했다.
조선 지주의 이해관계는 조선을 일본의 식량 생산 조달기지로 삼으려는 조선총독부의 ‘농업정책’에 부합했다. 총독부는 대체로 지주에 우호적인 토지-농업정책을 편다. 그러나 1937년 중일전쟁과 1941년 태평양전쟁 이후에는 ‘강제동원’이 더욱 중요했기에, 소작료 인상을 엄격히 하는 등의 ‘농민 우호 정책’으로 돌아선다. 지주-소작제 발달 이유를 정리해보면,
- 일본으로 이출을 촉진하는 조선총독부의 농업정책.
- 조선 후기 소농경영의 발달.
- 급격한 인구 증가.
- 상공업의 미발달로 인해 대부분의 인구가 농촌에 남았던 점(=농촌 과잉인구=소작 수요 증대).
- 토지조사사업으로 인한 ‘소유권 획정’(=거래비용 인하)가 영향을 미쳤다.
이 중에서 3. 급격한 인구증가를 살펴보면 조선 시대 연평균 인구증가율 0.22%였다. 반면 식민지 시기(1910–1940)에는 1.29%로 급증한다. 노동력은 더 많아졌고, 토지는 제한되어 있었다. 농민들의 소작수요는 증가했는데, 농지 공급은 제한되어 있었다. ‘지주의 협상력’은 더욱 강해졌다. 지주-소작제가 발달한 이유이다.
열여덟 번째, 근대적 경제 성장과 공업화
주목할 관전 포인트는 4가지이다. 하나씩 살펴보자.
① 일제 강점기, 근대적 경제 성장의 시작
전(前)근대 사회에서는 ‘맬더스 트랩’이 작동했다. 맬더스 트랩은 “인구증가와 1인당 경제 성장이 동시에 지속되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즉 둘은 양립할 수 없다. 거꾸로 근대적 경제 성장이란, ‘맬더스 함정을 벗어난 상태’를 의미한다. 인구 증가와 경제 성장이 장기간에 걸쳐 동시에 나타나는 현상을 말한다.
앙구스 메디슨(Angus Maddison)의 조사에 의하면, 1990년 달러 가치 기준 전 세계 1인당 GDP는 •서기 1년 467달러 •1000년 450달러 •1500년 567달러였다. 1500년의 기간 동안 제자리걸음을 했다. ‘맬더스 트랩’의 사례다.
먼저 인구증가율을 보면 조선 시대 연평균 인구증가율은 0.22%였다. 일제 시대(1911–1940) 인구증가율은 1.3%였다. 인구증가율이 무려 6배 커졌다. 같은 기간 식민지 조선의 GDP 성장률은 연평균 3.6%였다. 인구 성장을 감안한, 1인당 GDP 증가율은 연평균 2.3%였다. 드디어 ‘맬더스 트랩’을 벗어나 근대적 경제 성장이 시작됐다.
위 그림은 1911–1940년 명목 GDP와 실질 GDP 성장률을 보여준다. 상단 그래프가 명목 GDP이다. 명목 GDP를 기준으로 보면, 1913년경부터 기울기가 가파라지고, 1931년경에 다시 그래프가 가팔라지는 것을 알 수 있다(255쪽). 특히 1913년, 1931년, 1940년대 조선경제의 성장률이 올라갔던 이유는 조선 경제가 엔 통화권에 편입되어 시장이 커지고, 일본으로 수출이 늘어나고, 일본 자본이 조선에 유입되었기 때문이다.
2. 산업구조 고도화
산업별로 광공업 부문이 가장 빠르게 성장했다. 아래 그림은 산업구조 고도화를 보여준다. 농림어업 비율은 줄고, 서비스업은 살짝 많아지고, 광공업은 더 가파르게 증가했다.
1911–1940년, 농림어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1.5%에 불과했다. 광공업의 연평균 성장률은 9.7%였다. 일본의 1931년 만주 침략과 1937년 중일전쟁 이후인 1930년대는 광공업의 연평균 성장률이 무려 13.5%에 달하게 된다. 생산의 증가율을 보면, 농림어업 비중은 67.8% → 42.0%로 줄고, 광공업 비중은 6.7% → 26.0%로 높아진다. 1930년대 이후가 되면 식민지 조선을 단순히 ‘농업사회’로 말하기 어려워졌다.
3. 경제 성장의 요인 분해
이 내용이 흥미롭다.
- 노동(L) 20%,
- 자본(K) 44%,
- 총요소생산성(TFP) 36%였다.
조선의 경제 성장은 수출, 투자, 제도 혁신에 의해 이뤄졌다. 투자의 경우 1942년 기준으로, 조선의 산업설비에 투자된 자본은 28–30억 정도였다. 이 중에서 74%가 일본 산업 자본의 직접 투자였다. 1927년 흥남에 질소 비료공장으로 세운 ‘일본질소’가 대표적이다. 제도혁신의 경우 일본의 ‘장기적인, 식민지 지배’의 일환으로 이뤄진,
- 화폐 금융제도 정비
- 재정제도 정비
- 토지조사사업 실시
- 민법, 상법 등 경제 관련 법령 정비
- 철도, 도로, 항만, 전기,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투자
- 초등학교 취학률 증가
등이 해당한다(257–259쪽). 초등학교 취학률의 경우, 1925년 12.2%에서 1940년 33.8%로 증가했다. 특히 1919년 3.1 운동 이후 민족의식이 고취되면서 증가 폭이 커진다.
4. 경제 성장의 동력과 한계
경제 성장의 동력 및 원인은 명징하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의도가 핵심이다.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의 발발로 인해, 조선은 군수물자 보급을 위한 병참기지의 역할이 더 강해진다. 조선의 경제적 역할은 일본 본토의 필요에 의해 변화했다.
1920년대는 일본 본토에 쌀 이출(수출)을 촉진하는 ‘식량생산기지’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1930년대 이후에는 군사물자 보급을 위한 병참기지 역할이 가장 중요했다. 1940년대 이후에는 군사물자 보급을 위한 병참기지와 함께, 노동력을 강제동원하고, 군인을 강제 동원하는 등 총력전의 수단으로 활용된다(258–259쪽).
다만 일본의 제국주의적 ‘의도’는 그것대로 들여다보더라도 경제 성장에 도움이 되었던 것 자체는 명백하다. 경제 성장은 수출증가, 자본증가, 총요소생산성 증가로 이뤄졌다. 이것은 박정희가 독재자였지만, 경제 성장에 성공적인 역할을 했던 것과 유사하다. 박정희가 ‘독재자’인 것도, 경제 성장에 성공적이었던 것도 팩트다. 마찬가지 원리로 일본의 제국주의적 의도와 제국주의적 침략도, 경제 성장도 팩트다.
게다가 •화폐 금융제도 정비 •재정제도 정비 •토지조사사업 실시 •민법, 상법 등 경제 관련 법령 정비 •철도, 도로, 항만, 전기, 통신 등 사회간접자본 시설 투자 •초등학교 취학률 증가 등은 일본 제국주의가 아니라 하더라도, 조선의 독립 이후에도 결국은, 언젠가는 했어야 하는 것들이다.
일본 제국주의는 근대적 제도의 우월성을 통해 조선을 식민지로 만들었다. ‘제국주의’와 ‘근대적 제도’는 한꺼번에 찾아오긴 했지만, 둘은 다른 것이었다. 제국주의는 타도해야 한다. 그러나 토지조사, 소유권, 민법, 형법, 회사법, 화폐금융제도, 중앙은행, 통화가치 안정, 사회간접시설 투자, 초등학교 등의 근대적 제도는 계승해야 한다.
1945년 해방 이후, 북한은 소유권, 민법, 회사법 등 ‘근대적 제도’를 ‘제국주의 잔재’라고 비난하며 함께 폐기했다. 북한은 (일제 시대만도 못한) ‘전(前)근대’로 퇴행했다. 북한은 제국주의와 근대를 함께 버렸다.
대한민국은 달랐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되, ‘근대적 제도’는 계승했다. 현재 한국의 민법은 일제시대 민법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프랑스, 독일, 영국의 근대적 민법이, ‘일본을 거쳐’ 들어온 것이기도 하다. 제국주의/식민지 구도에 파묻혀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하는 것은 전(前)근대 / 반(半)근대 / 근대 여부이다.
원문: 최병천의 페이스북
「⑥ 해방 국면의 재해석: 나라 만들기와 ‘체제 선택’」으로 이어집니다.